책 소개
처칠의 소신의 리더십
자유무역주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한 보수당을 떠나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기다
“나는 일관성을 지키기보다는 올바르고 싶다”
처칠이 자신의 롤모델인 아버지 랜돌프 처칠에게서 배운 것은 소신이었다. 랜돌프 처칠은 자신의 소신에 따라 뜻을 달리하던 수상과 결별하고 정치계에서도 은퇴하게 된다. 처칠은 아버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랜돌프 처칠이 지키고 싶어했던 소신을 더 중요시했다.
1900년 처칠은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4년도 채 안 되어 보수당과 결별하고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처칠이 정당을 바꾼 이유는 당선이 목적이 아니었다. 자신이 믿는 ‘자유무역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처칠은 ‘철새 정치인’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보호무역주의는 결국 고립을 자초하여 더욱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국의 산업만을 지키려는 보호무역의 결과를 역사를 통해 배운 처칠은 자유무역주의를 옹호했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20대의 초선 의원은 과감하게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처칠의 소신이 옳았음은 10여 년 뒤에 벌어진 ‘대공황’ 때 확인되었다. 이후 1924년에 소련에 대한 자유당의 내분으로 당이 붕괴하자 다시 보수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관성을 지키기보다는 올바르고 싶다.” 처칠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난과 회유에도 소신을 꺾지 않았다.
또 1930년대 정치계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는 독일의 전쟁 준비를 영국 국민과 정부에 지속적으로 알렸다. 처칠은 전쟁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전쟁광’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독일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호소했고, 자신의 생각을 믿고 여러 경로를 통해 독일에 대한 정보를 개인적으로 수집했다. 이러한 소신에 따른 준비는 그가 수상이 되고 영국이 독일의 침공을 받았을 때 전쟁을 침착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처칠의 포용의 리더십
“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바보일 리는 없습니다”
“전시에는 결단을, 패배 시에는 저항을, 승리했을 때는 너그러움을, 평화 시에는 선의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군 묘비에 새길 기념사를 부탁받은 처칠이 한 말이다. 이 말은 처칠이 겪은 모든 정치 상황과 전쟁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신념과 행동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독일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후 3국의 정상이 모였다. 스탈린은 독일군 10만 명을 즉결 재판으로 처형하자고 제의했다. 1,000만 명 이상의 소련군과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칠은 분개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여준 연합국의 독일에 대한 과도한 보복행위였음을 상기시켰다. 국민과 군인들이 사악한 지도자의 지시를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모두를 같은 사람으로 볼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처칠은 잊지 않았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수상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전쟁에 지친 국민들을 솔깃하게 한 노동당의 장밋빛 공약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공약들이 공약으로만 그쳤을 뿐 실현되지 못하자, 보수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고 1951년 처칠은 또 한 번 수상에 올랐다. 보수당 내 처칠의 측근들은 처칠에게 노동당의 실정을 홍보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처칠은 노동당의 정책이 실현되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처칠은 수상에 오르며 이렇게 말했다. “저를 반대하는 45%의 사람들이 모두 바보일 리는 없습니다.”
처칠은 노동당의 정책이었던 ‘국민건강복지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반대파가 추진한 법안일지라도 국민 대다수를 위해서 꼭 필요한 법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당을 초월해 영국의 미래를 위해 어떤 정책을 새로 수립하고 어떤 정책을 계승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처칠은 자신의 판단과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그의 판단과 신념은 합리성과 다수의 이익,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다. 초급 장교 시절에는 장군들의 무능을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썼고, 해군장관 때는 수병과 부사관들의 말을 더 많이 듣고 그들의 복지를 위한 정책을 추진했으며, 내무장관으로 재직할 때에는 교도소 죄수들의 인권을 살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독일 국민들을 연합국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으며,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운 연합국 소련의 공산주의 확장을 예측하고 루스벨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대해 단호한 정책을 취할 것을 주장했다. 포용의 리더십은 합리성을 기반으로 했을 때 빛을 발하게 된다.
처칠의 공생의 리더십
‘함께’가 리더십을 완성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을 시작으로 국제연합기구의 세계 구상에 따라
우리는 유럽합중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구도 안에서 유럽 가족을 재창조해야 합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강력하게 주장한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은 “첫째, 유럽연합 국가들에서 건너온 이민자들과 난민들이 값싼 임금을 무기로 영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둘째, 가난한 유럽연합 국가들의 재정난을 해결해주기 위해 영국은 너무 많은 분담금을 내고 있으므로 유럽연합 탈퇴를 통해 그 분담금이 영국에 재투자된다면 영국의 경제는 좋아질 것이다”라고 했다. 2016년 영국은 일명 브렉시트(Brexit)라고 불린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자존심 파운드화는 폭락했고 주가 역시 연일 폭락했다. 영국의 경제 상황이 불안정해지자, 대형 은행들은 런던을 떠나기로 결정했거나 이전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브렉시트에 대한 영국인들의 비난 여론은 모두 존슨을 향했다. 브렉시트 이후에도 영국의 경제가 나아지지 않으면 모든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존슨은 총리 출마를 포기했다.
처칠이 살아 돌아와 존슨의 연설을 듣는다면 처칠은 단호하게 브렉시트를 반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럽연합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제안한 사람이 처칠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야인으로 돌아간 처칠은 여러 곳에서 연설을 요청받았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유럽에 대한 첫 번째 연설을 했다.
“… 죄인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단죄가 끝나면 징벌은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 유럽 가족의 재창조를 위한 첫 번째 단계는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이 마음을 열지 않는 한 유럽의 부활은 없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 전범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46년 처칠의 발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을 시작으로 국제연합기구의 세계 구상에 따라 우리는 유럽합중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구도 안에서 유럽 가족을 재창조해야 합니다.”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전범국가로만 취급한 결과 독일 국민들의 분노와 절망의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유럽인들에게 상기시켰다. 처칠이 전후 유럽에 대한 구상을 밝히고 5년 뒤인 1951년 파리에서 프랑스의로베르 쉬망과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의 주도로 역사적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체결되었다. ECSC는 유럽의 석탄과 철강 자원을 유럽 국가들이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취지에서 설립되었다. 이 조약에는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해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도 함께 서명했다.
자원의 공동 관리로 출발한 ECSC는 조약에 서명한 6개국의 경제를 하나로 묶는 유럽경제공동체(ECC)로 확대되었다. 유럽은 경제 통합을 넘어 하나의 국가라는 개념의 유럽연합(EC)으로 완성되었다. 처칠의 ‘항복한 적에 대한 관대함’과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생에 대한 생각이 유럽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데 큰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과학기술이 끝없이 발전한다 해도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어느 사회건 조직이건 함께 가야 할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리더가 필요하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함과 동시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성공을 도와주는 리더가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리더의 모습이다.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국가가 모든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모든 것을 생산할 수도 없다. 상품의 교역과 인적 자원의 교류를 통해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처칠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가 함께 발전하고 번영하기를 바란 리더였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생을 바친 처칠의 삶과 리더십에서 어려운 시기를 더불어 헤쳐나갈 수 있게 하는 리더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무역주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한 보수당을 떠나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기다
“나는 일관성을 지키기보다는 올바르고 싶다”
처칠이 자신의 롤모델인 아버지 랜돌프 처칠에게서 배운 것은 소신이었다. 랜돌프 처칠은 자신의 소신에 따라 뜻을 달리하던 수상과 결별하고 정치계에서도 은퇴하게 된다. 처칠은 아버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랜돌프 처칠이 지키고 싶어했던 소신을 더 중요시했다.
1900년 처칠은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4년도 채 안 되어 보수당과 결별하고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처칠이 정당을 바꾼 이유는 당선이 목적이 아니었다. 자신이 믿는 ‘자유무역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처칠은 ‘철새 정치인’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보호무역주의는 결국 고립을 자초하여 더욱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국의 산업만을 지키려는 보호무역의 결과를 역사를 통해 배운 처칠은 자유무역주의를 옹호했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20대의 초선 의원은 과감하게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처칠의 소신이 옳았음은 10여 년 뒤에 벌어진 ‘대공황’ 때 확인되었다. 이후 1924년에 소련에 대한 자유당의 내분으로 당이 붕괴하자 다시 보수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관성을 지키기보다는 올바르고 싶다.” 처칠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난과 회유에도 소신을 꺾지 않았다.
또 1930년대 정치계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는 독일의 전쟁 준비를 영국 국민과 정부에 지속적으로 알렸다. 처칠은 전쟁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전쟁광’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독일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호소했고, 자신의 생각을 믿고 여러 경로를 통해 독일에 대한 정보를 개인적으로 수집했다. 이러한 소신에 따른 준비는 그가 수상이 되고 영국이 독일의 침공을 받았을 때 전쟁을 침착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처칠의 포용의 리더십
“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바보일 리는 없습니다”
“전시에는 결단을, 패배 시에는 저항을, 승리했을 때는 너그러움을, 평화 시에는 선의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군 묘비에 새길 기념사를 부탁받은 처칠이 한 말이다. 이 말은 처칠이 겪은 모든 정치 상황과 전쟁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신념과 행동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독일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후 3국의 정상이 모였다. 스탈린은 독일군 10만 명을 즉결 재판으로 처형하자고 제의했다. 1,000만 명 이상의 소련군과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칠은 분개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여준 연합국의 독일에 대한 과도한 보복행위였음을 상기시켰다. 국민과 군인들이 사악한 지도자의 지시를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모두를 같은 사람으로 볼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처칠은 잊지 않았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수상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전쟁에 지친 국민들을 솔깃하게 한 노동당의 장밋빛 공약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공약들이 공약으로만 그쳤을 뿐 실현되지 못하자, 보수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고 1951년 처칠은 또 한 번 수상에 올랐다. 보수당 내 처칠의 측근들은 처칠에게 노동당의 실정을 홍보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처칠은 노동당의 정책이 실현되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처칠은 수상에 오르며 이렇게 말했다. “저를 반대하는 45%의 사람들이 모두 바보일 리는 없습니다.”
처칠은 노동당의 정책이었던 ‘국민건강복지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반대파가 추진한 법안일지라도 국민 대다수를 위해서 꼭 필요한 법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당을 초월해 영국의 미래를 위해 어떤 정책을 새로 수립하고 어떤 정책을 계승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처칠은 자신의 판단과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그의 판단과 신념은 합리성과 다수의 이익,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다. 초급 장교 시절에는 장군들의 무능을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썼고, 해군장관 때는 수병과 부사관들의 말을 더 많이 듣고 그들의 복지를 위한 정책을 추진했으며, 내무장관으로 재직할 때에는 교도소 죄수들의 인권을 살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독일 국민들을 연합국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으며,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운 연합국 소련의 공산주의 확장을 예측하고 루스벨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대해 단호한 정책을 취할 것을 주장했다. 포용의 리더십은 합리성을 기반으로 했을 때 빛을 발하게 된다.
처칠의 공생의 리더십
‘함께’가 리더십을 완성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을 시작으로 국제연합기구의 세계 구상에 따라
우리는 유럽합중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구도 안에서 유럽 가족을 재창조해야 합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강력하게 주장한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은 “첫째, 유럽연합 국가들에서 건너온 이민자들과 난민들이 값싼 임금을 무기로 영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둘째, 가난한 유럽연합 국가들의 재정난을 해결해주기 위해 영국은 너무 많은 분담금을 내고 있으므로 유럽연합 탈퇴를 통해 그 분담금이 영국에 재투자된다면 영국의 경제는 좋아질 것이다”라고 했다. 2016년 영국은 일명 브렉시트(Brexit)라고 불린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자존심 파운드화는 폭락했고 주가 역시 연일 폭락했다. 영국의 경제 상황이 불안정해지자, 대형 은행들은 런던을 떠나기로 결정했거나 이전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브렉시트에 대한 영국인들의 비난 여론은 모두 존슨을 향했다. 브렉시트 이후에도 영국의 경제가 나아지지 않으면 모든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존슨은 총리 출마를 포기했다.
처칠이 살아 돌아와 존슨의 연설을 듣는다면 처칠은 단호하게 브렉시트를 반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럽연합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제안한 사람이 처칠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야인으로 돌아간 처칠은 여러 곳에서 연설을 요청받았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유럽에 대한 첫 번째 연설을 했다.
“… 죄인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단죄가 끝나면 징벌은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 유럽 가족의 재창조를 위한 첫 번째 단계는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이 마음을 열지 않는 한 유럽의 부활은 없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 전범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46년 처칠의 발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을 시작으로 국제연합기구의 세계 구상에 따라 우리는 유럽합중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구도 안에서 유럽 가족을 재창조해야 합니다.”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전범국가로만 취급한 결과 독일 국민들의 분노와 절망의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유럽인들에게 상기시켰다. 처칠이 전후 유럽에 대한 구상을 밝히고 5년 뒤인 1951년 파리에서 프랑스의로베르 쉬망과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의 주도로 역사적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체결되었다. ECSC는 유럽의 석탄과 철강 자원을 유럽 국가들이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취지에서 설립되었다. 이 조약에는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해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도 함께 서명했다.
자원의 공동 관리로 출발한 ECSC는 조약에 서명한 6개국의 경제를 하나로 묶는 유럽경제공동체(ECC)로 확대되었다. 유럽은 경제 통합을 넘어 하나의 국가라는 개념의 유럽연합(EC)으로 완성되었다. 처칠의 ‘항복한 적에 대한 관대함’과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생에 대한 생각이 유럽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데 큰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과학기술이 끝없이 발전한다 해도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어느 사회건 조직이건 함께 가야 할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리더가 필요하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함과 동시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성공을 도와주는 리더가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리더의 모습이다.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국가가 모든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모든 것을 생산할 수도 없다. 상품의 교역과 인적 자원의 교류를 통해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처칠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가 함께 발전하고 번영하기를 바란 리더였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생을 바친 처칠의 삶과 리더십에서 어려운 시기를 더불어 헤쳐나갈 수 있게 하는 리더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소개
저 : 윤상모
㈜한국마이스터 대표, ㈜BK마린 대표
다른생각연구소 소장, 리더십전문가, 미라클팩토리 경영고문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해운 관련 무역업에 입문하여 전 세계 30여 개 나라를 방문했다. 30대 중반 선박용 기계부품을 수출하는 ㈜한국마이스터를 창업했다. 2015년부터 동종업계의 ㈜BK마린에서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창업 초기 ‘리더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처칠’이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끼게 되어 처칠에 관한 번역서와 국내서를 모두 섭렵했다. 이 책들을 전부 읽고도 부족함을 느껴 처칠에 관한 외국 원서를 찾아 읽으며 처칠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처칠을 연구하며 깨달은 처칠의 리더십을 사업 경영에 적용하여 창업 첫해 10억 매출을 달성했다. 필자의 롤모델인 처칠의 리더십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다양한 해외 경험과 책을 읽으며 독학한 내용들을 강의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리더십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다른생각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독서모임을 통해 회원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또 중소기업 CEO를 대상으로 리더십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인이자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목 차
프롤로그
PART 1 리더의 시작
1. 리더의 롤모델: CNC 법칙
제 롤모델은 아버지입니다
CNC 법칙 - Copy and Create
롤모델 윈스턴 처칠
2. 리더의 연설
조국을 구한 위인들을 기억하라
신세계가 구세계를 해방시킬 것입니다
연설과 전쟁
3. 리더의 책임감
솔선수범하라
책임감이 리더십이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
PART 2 리더의 길
1. 리더의 반대말은 포기다
위대한 거인의 장례식
밤하늘의 별들은 엄마의 눈망울처럼 빛나고 있었다
살았거나 죽었거나 현상금 25파운드
2.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전함 50척이 필요합니다
독불장군 드골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스탈린
3. 리더의 용기
비행기를 모는 해군장관
폭격 맞은 참호
PART 3 리더의 자기계발
1. 리더와 리딩
라틴어.·그리스어 낙제생 영어공부만 3년
독서에 빠진 기병대 장교
리더의 연설은 리딩에서 출발한다
2. 리더의 글쓰기
나의 청춘기
폭풍의 한가운데
노벨문학상
3. 리더와 기록
모든 보고와 지시는 문서로 남겨라1
리더는 기록해야 하고 기록으로 남는다
기록의 나라 미국
PART 4 리더의 성장
1. 리더와 유머
여러분이 공화당 당원이길 바랍니다
젊은이, 젠틀맨이란 팻말을 보고 망설이지는 말게나
2. 포용의 리더십
현재가 과거와 다툼을 하면 미래는 없습니다
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바보일 리는 없습니다
3. 통찰력의 리더십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일본보다 독일과의 전쟁이 우선입니다
철의 장막이 드리워질 겁니다
4. 리더와 실무
리더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국방장관인 수상
현장에 해결책이 있다
5. 정보와 판단
레이더를 개발하라
에니그마를 해독하라
에니그마 해독은 누구도 몰라야 한다
PART 5 리더의 성공과 실패5
1. 처칠과 루스벨트 그리고 히틀러
처칠과 루스벨트의 공통점
처칠과 히틀러의 공통점
처칠과 히틀러의 차이점
2. 실패한 리더들
신하를 믿지 못한 황제, 제국의 문을 닫다 . 명나라 숭정제·
환관에게 휘둘린 허망한 통일제국 . 진나라 호해
초심을 잃은 군주의 결말 - 고려 공민왕
3. 리더십의 완성
리더의 결정, 미래를 바꾼다
‘함께’가 리더십을 완성한다
에필로그
윈스턴 처칠 연혁
참고문헌
PART 1 리더의 시작
1. 리더의 롤모델: CNC 법칙
제 롤모델은 아버지입니다
CNC 법칙 - Copy and Create
롤모델 윈스턴 처칠
2. 리더의 연설
조국을 구한 위인들을 기억하라
신세계가 구세계를 해방시킬 것입니다
연설과 전쟁
3. 리더의 책임감
솔선수범하라
책임감이 리더십이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
PART 2 리더의 길
1. 리더의 반대말은 포기다
위대한 거인의 장례식
밤하늘의 별들은 엄마의 눈망울처럼 빛나고 있었다
살았거나 죽었거나 현상금 25파운드
2.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전함 50척이 필요합니다
독불장군 드골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스탈린
3. 리더의 용기
비행기를 모는 해군장관
폭격 맞은 참호
PART 3 리더의 자기계발
1. 리더와 리딩
라틴어.·그리스어 낙제생 영어공부만 3년
독서에 빠진 기병대 장교
리더의 연설은 리딩에서 출발한다
2. 리더의 글쓰기
나의 청춘기
폭풍의 한가운데
노벨문학상
3. 리더와 기록
모든 보고와 지시는 문서로 남겨라1
리더는 기록해야 하고 기록으로 남는다
기록의 나라 미국
PART 4 리더의 성장
1. 리더와 유머
여러분이 공화당 당원이길 바랍니다
젊은이, 젠틀맨이란 팻말을 보고 망설이지는 말게나
2. 포용의 리더십
현재가 과거와 다툼을 하면 미래는 없습니다
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바보일 리는 없습니다
3. 통찰력의 리더십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일본보다 독일과의 전쟁이 우선입니다
철의 장막이 드리워질 겁니다
4. 리더와 실무
리더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국방장관인 수상
현장에 해결책이 있다
5. 정보와 판단
레이더를 개발하라
에니그마를 해독하라
에니그마 해독은 누구도 몰라야 한다
PART 5 리더의 성공과 실패5
1. 처칠과 루스벨트 그리고 히틀러
처칠과 루스벨트의 공통점
처칠과 히틀러의 공통점
처칠과 히틀러의 차이점
2. 실패한 리더들
신하를 믿지 못한 황제, 제국의 문을 닫다 . 명나라 숭정제·
환관에게 휘둘린 허망한 통일제국 . 진나라 호해
초심을 잃은 군주의 결말 - 고려 공민왕
3. 리더십의 완성
리더의 결정, 미래를 바꾼다
‘함께’가 리더십을 완성한다
에필로그
윈스턴 처칠 연혁
참고문헌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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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반품기한
- 단순 변심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7일 이내 신청
- 상품 불량/오배송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3개월 이내, 혹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30일 이내 반품 신청 가능
02. 반품 배송비
반품사유 | 반품 배송비 부담자 |
---|---|
단순변심 | 고객 부담이며, 최초 배송비를 포함해 왕복 배송비가 발생합니다. 또한, 도서/산간지역이거나 설치 상품을 반품하는 경우에는 배송비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
고객 부담이 아닙니다. |
03. 배송상태에 따른 환불안내
진행 상태 | 결제완료 | 상품준비중 | 배송지시/배송중/배송완료 |
---|---|---|---|
어떤 상태 | 주문 내역 확인 전 | 상품 발송 준비 중 | 상품이 택배사로 이미 발송 됨 |
환불 | 즉시환불 | 구매취소 의사전달 → 발송중지 → 환불 | 반품회수 → 반품상품 확인 → 환불 |
04. 취소방법
- 결제완료 또는 배송상품은 1:1 문의에 취소신청해 주셔야 합니다.
- 특정 상품의 경우 취소 수수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05. 환불시점
결제수단 | 환불시점 | 환불방법 |
---|---|---|
신용카드 | 취소완료 후, 3~5일 내 카드사 승인취소(영업일 기준) | 신용카드 승인취소 |
계좌이체 |
실시간 계좌이체 또는 무통장입금 취소완료 후, 입력하신 환불계좌로 1~2일 내 환불금액 입금(영업일 기준) |
계좌입금 |
휴대폰 결제 |
당일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6시간 이내 승인취소 전월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1~2일 내 환불계좌로 입금(영업일 기준) |
당일취소 : 휴대폰 결제 승인취소 익월취소 : 계좌입금 |
포인트 | 취소 완료 후, 당일 포인트 적립 | 환불 포인트 적립 |
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
의류/잡화/수입명품 |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
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가전/설치상품 |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
자동차용품 |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
CD/DVD/GAME/BOOK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
상품의 시리얼 넘버 유출로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감소한 경우 | |
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