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우연의 발견’에서 시작된 ‘필연의 기록’
아버지가 간 길과 그 뒤를 쫓아 아들이 다시 걸은 길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인생의 시침이 어느덧 60이라는 숫자에 가까워진 한 남성.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한 집안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인 그에게 7년 전 어느 날 필연과도 같은 우연의 사건이 발생한다. 2009년 가을, 그는 우연찮게 집 안의 한구석에서 낡은 종이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그의 말처럼 “이사 갈 때 싣고 가서 어느 구석엔가 그냥 두었다가 다음 이사 갈 때 다시 싣고 가선 또다시 처박아두는, 그런 상자”였다. 자기 자신 혹은 가족의 누군가가 둔 물건이겠지만 낯설기 짝이 없다. 가벼운 호기심으로 열어본 상자 안에는 50년 전의 필름 꾸러미가 담겨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가 찍은 것들이었다. 게다가 마침 어머니가 내미신 양철 상자에는 아버지가 메모해놓은 개인수첩들도 있었다. 그 순간 지나간 시대가 그의 눈앞에 확 다가왔다. 사진과 수첩을 맞춰보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 것만 같은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들었다.
잘 알지 못하던 과거로부터 빛바랜 영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다소 충동적으로 몇 가지 결단을 했다. 우선, 무조건 이 모든 자료들을 디지털화, 말하자면 스캐닝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야 원본에 손을 대지 않고도 정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둘째로는, 그 디지털화 작업이 끝날 때쯤 되면 그 자료들을 들고 아버지를 기억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증언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사학자들은 ‘자료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는 대단히 멋있는 경구를 잘 써먹지만 그것은 기본일 뿐이다. 파편화된 자료와 자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그 틈새는 결국 누군가의 기억과 합리적 추론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 현대사가 특히 그렇다. 그 기억을 찾아가는 여행이 결국 나의 가장 큰 과제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_ 34~35쪽
20년 넘게 신문기자로 활동했던 이 책의 저자 김창희, 그에게 이런 생각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오래도록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추적하며 글로 옮겼던 그에게 아버지의 유품은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반추할 필연의 계기가 되어준다. 그렇게 그는 50년의 시간을 거슬러 남쪽 바닷가, 아버지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통영으로 떠날 계획을 품는다.
북쪽의 만주에서부터 평양과 서울을 거쳐 남쪽의 통영까지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의 끝자락에서 남녘 바다의 유채꽃 향기를 맡다
저자의 아버지 김필목 씨는 1923년 서울에서 태어나, 하얼빈과 만주의 봉천(지금의 선양)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뒤 평양에서 청소년기를, 그리고 서울에서 20대의 대학 생활을 보냈다. 이후 계룡산 지역을 거쳐 통영에서 중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직업을 바꿔 서울에서 약국을 경영하다 1966년 우리 나이로 44세에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저자의 나이 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소년 시절에 결핵에 걸린 후 치료와 재발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병마의 그림자와 평생을 함께해야 했다. 지병에 걸려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록의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음을. 저자의 아버지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각종 증명서와 수첩, 사진, 편지 등 여행용 트렁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기록물을 남겨두었다. 이 방대한 자료를 앞에 둔 아들의 심정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남들과 달리 아버지의 정을 오래 느낄 수 없었던 저자로서는 아버지 사후 50년 만에 발견한 아버지의 수첩과 사진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아버지의 삶을 ‘평양’, ‘서울 북아현동’, ‘계룡산’, ‘통영’ 등 아버지가 거쳤던 주요 지역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누구나 인생을 통틀어 전성기라 할 만한 시절이 있지 않은가. 고인에게서 직접 들을 수는 없으나, 저자는 아버지의 전성기를 통영 시절로 확신한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직업다운 직업을 가졌고, 결혼을 했으며, 첫아이까지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버지가 사진과 메모 등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것도 바로 1953년부터 1959년까지의 통영 시절이었다. 저자가 이 책의 절반 이상을 통영에 할애하고, 책의 구성을 통영에서 시작해 통영으로 끝맺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한 시기가 저물고 새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6년, 어머니는 2년 동안의 통영 시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두 분 모두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다.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통영에서 함께한 그 2년은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그 시간을 더 특정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너 낳고 나서 첫돌 될 때까지 통영에서 보낸 마지막 1년이 가장 행복한 때였던 것 같다. 너희 아버지는 카메라 하나 사서 시도 때도 없이 너 찍어준다고 하고, 할아버지도 그 무렵부터 부산에서 통영 내왕하고……. 그런 축복 속에서 지낸 나날이었다.” _ 406쪽
고 박경리 작가가 ‘한국의 나폴리’라고 예찬할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라 불리는 통영. 이 책에는 1950년대 중후반 통영의 모습이 100여 점의 사진으로 다양하게 담겨 있다. 여중·여고의 입학식과 졸업식, 소풍과 시가행진, 체육 활동 등의 학교 풍경, 강구항과 동피랑을 비롯한 통영 항구의 전경, 통영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세병관과 남망산 충무공 동상, 그리고 농민과 어민, 하역 노동자들의 모습이 저자 가족의 일상 풍경과 어우러져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이 아버지의 카메라 파인더에 잡힌 통영의 풍경과 사람들 하나하나를 아버지와 같은 시선으로 살펴보며, 때로는 잔잔한 웃음을, 때로는 향수 어린 애수의 감회를 전한다. 그리고 이들 사진과 이야기의 중심에 모두 아버지가 자리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는 아버지가 통영을 떠나기에 앞서 카메라를 들고 찾았던 장소로 가서 다시금 아버지와 같은 시선으로 통영을 바라보며 이 책을 맺는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세병관 마루에 걸터앉아 다시 바다를 내려다본다. 호젓하게 앉은 나의 시야에 아침 항구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들어온다. ‘파란색 새벽 공기’는 더 이상 불어오지 않는다. 바다는 그 대신 밤새 간직하고 있던 생명을 항구로 마구 토해내고 있다. 그렇게 토해내는 사이에 바다는 짙푸른 색에서 어느덧 황금빛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아버지의 통영이 그랬고, 아들이 다시 찾은 통영 역시 그렇게 싱싱하기만 하다. 결코 싫지 않은 옅은 비린내도 코끝에 스친다. 아, 그 냄새! 아버지가 어느 날 통영과 작별해야 할 시간이 왔을 때 통영 항구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찾았던 곳도 이 세병관 뒤의 언덕이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맡은 통영의 냄새는 갯비린내 속에 실려 오는 유채꽃 향기였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아버지가 다시 시작한 자리에서 이제 나도 다시 시작이다. _ 467쪽
‘기억’과 ‘기록’의 협업으로 복원한 이야기
기자 특유의 객관적인 시선과 취재력이 돋보인 한 편의 로드무비
저자의 말처럼 그의 아버지는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시민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거쳐 갔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면면이 적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곧이어 벌어진 6·25 전쟁과 1·4 후퇴, 휴전협정, 그리고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과 그 혼란 속에서도 각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당시 시민들의 의지를 엿보게 된다. 그리고 저자의 부모를 비롯해 당시 사람들이 겪었던 이러저러한 사건담은 우리에게 역사의 추체험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는 저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맞이했던 해방의 순간에 대한 기억도 있다.
“어느 날 밤 자다가 뛰쳐나가 보니 밖이 벌겋더라. 경상골 언덕 위의 신궁이 불타고 있었다. 궁사들이 불을 질렀다고도 하고, 궁사들이 그 불에 타 죽었다고도 하더라. 그게 해방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게 해방인 줄도 몰랐다. 그다음 날 너의 아버지에게 와서 라디오를 켜서 귀를 세워 듣고서야 해방된 줄 알았다.” 최도명 목사(아버지의 평생지기)가 기억하는 1945년 8월 15일 밤과 그다음 날의 상황이다. _ 181쪽
“어느 날인가 여름철이었는데 남의 집 우물에 빨래하려고 어머니(나의 외할머니)와 함께 갔더니 옆의 사람들이 라디오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수군수군하데. 그리고 그 잘 들리지도 않는 라디오 주위로 청년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귀를 기울이더니 해방됐다고 하더라. 내가 스무 살 때 일이다.” …… 아버지가 평양에서 친우 최도명 목사와 함께 ‘귀를 세워’ 라디오를 듣던 바로 그 시각에 어머니는 고향 합천의 우물가에서 동네 청년들이 같은 내용의 라디오 방송을 ‘귀를 기울여’ 듣는 가운데 함께 해방의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 “빨래한 걸 들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디서 나왔는지 태극기가 하나 우리 집에 있데. 광목에 태극과 괘를 재봉틀로 박은 것이었는데 아주 단단하게 잘 만들었더라. 그걸 들고 읍내로 나가서 나도 ‘독립 만세’를 불렀지. 정말 속이 다 후련하더라.” _ 371쪽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그저 남의 아버지 이야기에 불과하니 읽고 나면 다 잊어달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단순히 한 개인의 인생사 또는 한 가족의 사적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참으로 많고,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크고 작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아버지가 남긴 기록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그 기록에 적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증언을 들었다.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 아버지와 어머니의 동료와 이웃 주민, 일가친척, 함께 수학했던 동급생 등 지금은 대부분 70대의 노인이 된 그들은 과거 아버지에게 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그 아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지난 시절을 행복하게 회상해주었다. 그리고 저자는 사실관계를 좀 더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관공서, 학교, 교회 등에서 각종 증명서, 졸업장, 학적부와 같은 공적 기록을 찾아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가 남겨놓은 사적 기록과 행정·교육기관의 공적 기록,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기억을 교차대조하여 반세기의 역사를 복원했다. 또 기자 특유의 객관적인 시선을 토대로 개인적인 감상에 빠지지 않고 아버지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이 책을 역사학 분야의 책이라고 본다면, 내용 면에서는 저자 자신과 선친의 흔적을 찾아가는 ‘가족사’이고 역사학의 흐름에서 볼 때는 ‘미시사’이며, 또 문학으로 본다면 과거 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한 현장 취재가 적절하게 버무려진 ‘르포 문학’인 동시에 저자 자신의 존재 근거를 모색하는 ‘성찰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꼭 어느 한 가지 장르로 규정하기 힘들면서 그 모든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에게도 저마다 특별한 사연과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삶이 팍팍하다는 핑계로 우리가 그 이야기를 나서서 찾지 않을 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들은 각자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울림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매일같이 목소리를 듣고 마주하면서도 지나치기만 했던 그 얼굴에 눈을 돌려보자. 그리고 말을 건네보자. 저자가 얘기했듯이 “우리네 아버지들은, 생존해 계시건 돌아가셨건, 무엇인가 우리에게 답할 준비를 하고 계시므로”.
작가 소개
저 : 김창희
아버지가 1953년에 정착한 경상남도 통영에서 1958년 출생했고, 첫돌이 지나서부터 지금까지는 줄곧 서울 또는 그 인근 지역에서 살고 있다. 어려서는 통영을 ‘고향’이라고 부르다가 조금 커서 그곳이 고향이 아니라 그저 ‘출생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이 컸다. 그러나 요즘은 다시 통영을 ‘고향 이상의 장소’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재생’과 ‘신생’의 이력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자취를 따라가는 지난 몇 년간의 작업이 오히려 나 자신을 찾아가는 작업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특히 젊은 날의 아버지를 기억하는 노인으로부터 “아들이 아버지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아버지께 송구스러운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언론인 생활을 한 것이 이 책의 취재와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고, 『오래된 서울』(공저)이라는 도시 역사서를 펴낸 경험도 아버지가 거쳐 간 지역들을 답사하고 그 지역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앞으로도 시간과 공간의 결합체로서의 역사 이야기를 다루는 글들을 계속 썼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소망은 뭐니 뭐니 해도 ‘아버지만 한 아들’이 되는 일이다.
목 차
01 통영 밤바다
02 계룡산
회상 / 발견 / 냉면 / 열정 / 표봉기 씨 찾기 / 노성에서 통영까지
03 통영
‘촌사람 모던보이’ / 이북 출신 선생님들 / 염치 / 시가행진 / 약혼시대 / 손님 / 할아버지 이야기
04 평양 경상골
‘쓴 약’을 함께 먹는 친구 / 보물지도 / ‘그 맑은 시냇물’ / 아름다운 청춘 / 스무 살의 책꽂이
05 서울 북아현동
새로운 시작 / 기억의 문 / 스스로 선택한 길 / 고통의 길, 희망의 불씨 / 불바다 / 서울시민증 / 흰 사발 발굴 작업
06 통영 II
결혼식, 신혼여행, 그리고 연하장 / 고양이와 닭이 있는 풍경 / 가족, 그리고 나 / 도다리쑥국 / 나의 첫걸음 / 할머니 이야기 / 다시 할아버지 이야기 / ‘통영여중 (비)공식 찍사’ / 통영 사람들 / 통영의 향기 / 세상을 향해 열린 창 / 내부를 향해 난 창
07 어머니 이야기
수녀 또는 간호원 / 합천에서의 유년기 / 돌아온 고향 / 가장 빛나던 순간들 / ‘왕자님’이 ‘마음 굳센 공주님’에게 / 다시 찾은 고향
08 아듀! 통영
전근과 사직의 기로 / 통영에 허기진 사람 / 준비 / 마지막 향기
09 소멸 혹은 위로: 다시 ‘노성에서 통영까지’
에필로그: ‘자’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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