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비정한 도시의 리얼리즘
[최측의농간 | 시 004] 『멜랑콜리』
『멜랑콜리』, 채상우 시집, 2018, 최측의농간
가장 순결하게 정치적이었을 때 열반으로 이르는 길은 열리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지금부터 나는 줄곧 악취가 날 것이고 불타는 지옥에서 살을 태우고 태워야 하리
「마지막 나날들」 부분.
전망이 없을 때에는 어떤 전망 속에서 삶을 견뎌야 할까. 여기 이 세상의 바깥에 내던져져 있는 것 같은, 음울하며 무력하고 움직임이 느려지는 멜랑콜리아의 시간 속에서, 6월의 일몰 속에서, 시 쓰는 시간을 있게 한 비명의 기억들에 반쯤 갇혀 그 기억들의 진상을 추적하고 그로부터 풍겨오는 썩은 냄새를 증언하는 시인이 있다.
어떤 저녁은 이 세상의 바깥에 있다 잘못 꽂힌 서표처럼 …(중략)… 책엽을 넘길 때마다 점멸하는 여백을 세심히 필사하는 유월의 日沒 누가 알 것인가 일찍이 이 세상이 있기 이전부터 있어 온 침묵과 그 침묵 속에 잠입해 있는 부패한 슬픔 바람이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비명의 기원을 몰약과 유황으로도 봉인할 수 없는 시간들이 오래도록 썩은 향내를 풍길 때, 어떤 저녁은
「멜랑콜리」 부분.
이 시인이 상재한 첫 번째 시집의 첫 번째 시의 한 대목을 통해 우리는 뜨거웠던 한 시절이 막을 고했음을, 낭만과 몽환의 분위기 속에서 절절하고 무력하게 받아들였던 시인과 만난다. 거대서사의 전망으로 가슴 뜨거웠던 한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 그 시절의 끝과 진상을 곱씹는 자의 마음속에는 어떤 쓰라림이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 회한 속에 통곡하며 다시 한 번 기회가 오길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뿐 기도의 끝에 한 마리 새가 날고 그 새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한 줌의 의심도 없이 길을 걸어가는 일 그러나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러서야 겨우 깨닫곤 하죠 지난 생에도 그랬고 지지난 생에도 그랬듯 내가 갔어야 했던 길은 처음부터 이 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 괴델의 정리」 부분.
채상우 시인의 시집 『멜랑콜리』는, 너의 후일담은 비루하고 고루하다고, 그 후일담의 후일(後日)이 말 걸어올 때, 시인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멜랑콜리’라는 시어/시제는 그러므로 우울에 짓눌리거나 주저앉은, 비관에 젖어 무력한 상태의 한 상징이 아니며 전망 속에서 전망 없음을 보고 찬란 속에서 비루함을 바로 보는 일을 위한 밀알이 된다.
세상의 모든 저녁이 평온할 수만 있다면 나 하나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습관적으로 밥상을 엎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버지가 엎은 건 밥상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시시때때로 부인하며 다음 날에도 街鬪에 나섰다
「푸앵카레의 추측」 부분.
“세상의 모든 저녁이 평온할 수만 있다면 나 하나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시절” 속에서 시인은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의 희망 없는 공회전을 견디는 한 양식을 이미 훈련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가투의 일상을 살아낸 세대의 일상 속에, 억압과 부조리의 씨앗들은 어떤 모습으로 웅크리거나 발아하고 있었는가. 그 모든 구체적인 억압과 부조리가 거대한 억압과 부조리들 앞에서 정치적으로 말소되었으니, 그가 그것들을 시적으로 소생시키는 이유는 그것의 복권을 위해서가 아니며 그것을 보다 근본적으로, 제대로 못 박기 위해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는 ‘멜랑콜리’의 나날 속에 신음해야 했던 기억들을 아픔의 단절이 아닌 비극의 연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서라야, 자신을 뒤덮은 모순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음을 예감했던 것 같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풍경 속엔 때때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잠복해 있는 법 그 무엇이더라도 죽음에 가까워져서야 치사량을 알 수 있으니 복화술사여 내게 남은 건 둘이거나 셋이거나 또는 그 이상일지도 모를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 그리곤 곧바로 나에 대해 세 번씩 부인하는 일
「멜랑콜리」 부분.
시인은 모순으로 점철된, 지나치게 낭만적인 풍경 속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그는 때때로 그 모순을, 지나친 낭만을 감당하기 어려워 분노했고 죽음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 같다. 그의 낭만적 풍경 속에 도사리고 잠복해 있었던 것들은 그러므로 낭만적인 것들이 아니라, 제 자신의 뼈아픈 모순의 결과물들이었다. 조작적이고 인위적인 것으로부터 잉태된 지나친 낭만을 증언하는 그의 진술을 통해 썩은 냄새가 풍기고 눈살 찌푸려지는 시간들이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지만 그로인해 그것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여기-우리 곁-에도 있다는 것이 비로소 구체화되고 뼈아파지게 될 것이다.
한 치 앞을 불허하는 삶 앞에서 쩔쩔매는 건 인간의 몫이다 함부로 약속 시간을 변경한 자는 생의 필연을 배우리라 투명한 칼들은 정말 어디에서 왔나 어디로 가나 묻지 마라 현실은 비정하다 투명한 칼들 처음엔 그저 한줄기 소리였지만 지금은 결단을 촉구하는 정신이다 저 정신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입을 굳게 다물어라 투명한 칼들이 달려간다 그 속으로 뛰어든 자들의 마지막 표정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등에 내리꽂히는 무수한 칼들 젖은 상처 위로 피어오르는 신의 입김 신은 어디선가 킬킬대고 있을 거다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 투명한 칼들의 소리 요령 소리 결단하라 귀를 자르든가 저 속으로 뛰어들든가 참든가 참아 보든가 어떻게든, 잘라도 잘라도 되살아나는 투명한 칼들 투명한 칼들의 소리
「悲情城市」 부분.
그의 반성이 지난했던 이유는 그러므로 그 반성이 순결에의 욕망의 한 형태일 뿐이며 새로운 상상을 어렵게 하기 일쑤라는 것을 그가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버려야 하는데, 버릴 수 없는 나날들이 백색왜성처럼 단단하게 식어 간다
「멜랑콜리」 부분.
버려야 하는데, 버릴 수 없는 나날들이 그를 구체적으로 아프게 했지만, 반성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가 멜랑콜리에 갇혀 꿈틀거리고 꿈꿀 수 있도록 했다. 오랫동안 신음하던 그는 멜랑콜리와 함께 제 치부를 활짝 드러내 놓고도 천연덕스럽게 아름다울 수 있기를 꿈꾸었던 걸까.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서 시인은, “연락이 두절된 척후처럼,” “푸른 재가 되기 위해 불타고 있다”고 적었다.
난 내 지난한 반성의 끝자락에서 열심히 상상한다 능소화처럼 능소화처럼 저녁놀 속에 제 恥部를 활짝 드러내 놓고도 천연덕스럽게 아름다운 능소화처럼 지금, 남조선은 젖고 있고 나는 푸른 재가 되기 위해 불타고 있다 연락이 두절된 척후처럼, 즐거웠다
참, 좋은 人生이었다
「마지막 나날들」 부분.
불협은 어떻게 화음이 될 수 있는가. 불협과 화음이 만나 불협화음이 되기 위해서는 아픈 상상력이 오만한 통속이 되지 않도록, 감내한 시간들에 대한 진술이 무딘 자기기만이 되지 않도록 하는 엄정하고 비정한 자기 관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 비정한 자기 관찰을 통해, 비정한 도시[悲情城市]를 바로 보기 위하여, 비틀거리면서도 끝까지 살아내기 위하여, 투명한 칼들이 날아오는 비정성시의 끝과 시작을 증언하는 시집이 있다.
작가 소개
저 : 채상우
경북 영주 출생. 2003년 계간 [시작]을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멜랑콜리』, 『리튬』이 있다.
목 차
自序 5
멜랑콜리 11
멜랑콜리 12
Zigeunerweisen 14
멜랑콜리 15
교감 22
勿忘草 24
迷妄 26
샹그릴라 30
푸앵카레의 추측 31
回文의 계절 33
괴델의 정리 34
멜랑콜리 35
비극의 탄생 37
쿨룽의 법칙 39
멜랑콜리 42
집념 44
안녕 안에 있는 안녕 이상의 것 46
사랑이 뭐길래 ―기적의 형식적 층위에 관한 사례 48
보로메오의 매듭 54
輟耕錄 55
降仙마을 근린공원 배롱나무 그림자 56
하도 심심해서 58
참! 좋은 봄날 60
悲情城市 62
기적의 조건 64
아름다운 시절 68
耳鳴 69
El Condor Pasa 71
深淵 73
기적의 징후 74
멜랑콜리 75
엘레지 77
玉水洞 여자 78
마늘 까는 여자 79
멜랑콜리 81
비는 내렸고 껌을 씹었다 82
첫눈 84
단단한 기억 85
선악의 피안 87
아득한 88
Stockholm syndrome 90
변두리 연대기 92
마지막 나날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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