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소설로 읽는 1990년대 노동운동사!
제3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이인휘의 새 장편소설 『노동자의 이름으로』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노동운동사를 소설적 장치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실제 인물인 양봉수인데, 그는 1995년 노동조합 대의원 활동을 하던 중 노사협의 없는 신차 투입해 항의하다 두 번째 해고를 당하고, 그 해 5월 공동소위원회 출범식장에서 분신을 했다. 그 당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노사협조주의를 지향했던 집행부여서 노동 강도 강화와 회사 측의 노무관리에 협조적인 상태였다. 이에 대한 항의로 양봉수는 분신을 택한 것이다. 양봉수의 분신자살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그의 희생을 바탕으로 새로운 민주노조를 건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그 힘으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IMF구제금융 체제가 강요하는 정리해고에 맞설 수 있었다.
이 책은 양봉수의 그 뜻을 기리는 ‘서영호·양봉수열사정신계승사업회’에서 기획하고 소설가 이인휘가 집필한 일종의 ‘평전소설’이다. 하지만 작가는 ‘김광주’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 노동자의 전형성을 창출해냈다. 소설은 일단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의 큰 흐름을 바탕으로 하고, 실제 인물들과 가상 인물인 김광주 사이의 교유와 갈등, 그리고 연대와 배신, 투쟁 등을 직조해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으로 상징되는 1990년대 노동운동사에 대한 기록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의 생활과 심리를 묘파해낸 소설 작품이 된다. 예를 들어 1991년 현대자동차가 632억 원의 순이익을 내자 노동조합은 그 성과를 분배하라는 투쟁에 돌입하고 1992년 1월 14일 88.88%의 찬성으로 쟁의에 돌입했다. 이 때 김영삼 정권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여주는 ‘사실’을 이렇게 복기해놨다.
여명이 염포산의 경계를 푸른빛으로 물들일 때 태화강을 건너온 헬리콥터의 요란한 굉음이 차갑게 얼어붙은 새벽을 깨웠다. 자동차 공장의 하늘에서 수만 장의 전단지가 살포됐다. 헬리콥터는 공장의 하늘을 빙빙 돌면서 선무 방송을 했다.
(…)
최병렬은 노동부 장관직을 걸고 폭력 세력을 처단해서 회사와 노조를 정상화시키겠다고 했다. 체포 특공대를 포함한 전경 120개 중대 1만7천여 명이 자동차 공장을 에워싸고 명령을 기다렸다. 오전 집회를 열자 노동자들이 7천여 명으로 줄었다.
날을 세운 톱니바퀴처럼 수많은 유언비어가 노동자들 사이를 돌고 돌았다. 울산 전산망과 명촌교 폭파설이 나돌았다. 지역방송은 북한 공작원들 개입설까지 언급하면서 울산 시민의 민심을 자극했다. 울산에 있는 우익단체와 자동차 공장에 기생하는 업체들이 합심해 일인당 만 원씩을 주고 5만 명을 동원해서 ‘조업 촉구 궐기대회’도 열었다. (219~220)
역사와 문학이 만나 이룬 구성
이 소설은 당시의 국가권력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 사이에 확실한 구분선이 존재했음을 사실 기술과 노동자들의 심리 상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국가권력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와 두려움, 심리적 좌절 등도 솔직히 다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현장을 나와 도로를 건너간 봉수는 전경에게 뺏긴 공장을 쳐다봤다. 정문에 불이 켜진 공장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이방인의 나라처럼 보였다. 바람이 얼어붙은 뺨을 야무지게 때렸다. 식어서 굳어버린 마음이 맹렬한 추위에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가재이, 술이나 진탕 묵구 죽자.”
경태가 봉수를 잡아끌었다. 며칠 동안 바싹 말라버린 나뭇잎처럼 푸석해진 얼굴을 떨구며 경태가 걸었다. 가슴속에서 비명이 아우성쳤지만 입이 닫혀버렸다. 터져 나오지 못한 비명이 온몸 구석구석에서 돋아나 바늘처럼 쑤셔댔다. 두 사람은 패잔병처럼 힘겹게 다리를 끌고 술집 문을 열었다.(222)
이런 꾸밈없는 사실 묘사가 큰 역사적 사건 사이에 촘촘히 박혀 역사적 사건을 더욱 살아 있게 하고, 인물들의 구체적인 캐릭터를 확보해 소설적인 성취를 밑받침해준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만의 이야기인가? 작가는 김광주의 아내 미경을 통해 IMF 시기 구조조정이 어떻게 노동자의 삶을 파괴했는지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IMF로 고달프게 사는 시절에 노조 간부들이 노래방에서 삐삐아줌마 불러 논다는 소문이 나자 운동판에서 비난이 쏟아졌던 거 알지? 근데, 사실은 우리 마누라가 원조였어. 내가 감옥에 들어가고 나서 먹
고살 길이 막막하니까 노래방을 다닌 거야. 감옥까지 그 소문이 들려왔을 때 창피하고 화가 나서 미치겠더구만. 소문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삐삐아줌마에서 몸 파는 여자라는 소리까지 들렸을 땐 탈옥을 해서 아내를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었지.(457)
물론 여기서 등장하는 광주나 그의 아내 미경은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이지만, 노동운동과는 그리 가깝지 않았던 평범한 노동자의 모습을 그려내어 역사적 기록이 감당해내지 못하는 개별적인 삶의 모습을 메워주고 있다.
미경은 파업이 있을 때마다 참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광주와 갈등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들인 개벽이와의 평범한 삶을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주는 광주 나름대로 동료들의 헌신과 열정에 끝내 등을 돌리지 못한다. 도리어 친한 후배였던 양봉수의 분신자살로 깊숙이 노동운동에 동참하게 되고 1998년 정리해고 반대 투쟁에서 ‘녹색사수대’의 지대장까지 맡게 된다. 물론 그 투쟁의 실패로 체포영장을 받고 도피해 있다가 ‘자수 투쟁’을 감행해 감옥으로 향하게 된다. 그 결과 그의 가족은 파괴되고 출옥 후 자살을 택하게 된다. 광주의 선택은 문학적으로는 상투적일 수 있지만 문학적 차원과는 다른 감동을 독자들에게 준다.
잠들면 그대로 죽을 것 같아 사흘을 뜬눈으로 버티던 어느 순간 눈앞에서 대왕암이 아른거리며 손짓을 했다. 그는 집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간절함에 사로잡혀 새벽에 맨발로 뛰쳐나가 차를 몰고 달렸다. 여명이 움트고 있는 한적한 도로를 질주해 대왕암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편해질 것 같았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 끝까지 차를 몰고 갔다. 아침 햇살이 소나무 숲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솔잎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퍼져 들어오는 숲길로 광주는 허겁지겁 걸어 들어갔다. 대지가 허연 입김을 내뱉고 있었다. 넋이 나간 듯 비틀거리며 무엇인가에 이끌려 점점 빠르게 걸었다. 숲속을 벗어나자 대왕암이 눈부시게 우뚝 서 있었다. 광주는 바위 사이로 난 길을 따라서 대왕암 제일 끝에 다다랐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다 저 멀리 세상의 끝처럼 수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광주는 그대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473~474)
노동자가 인간답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
광주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부활을 상징하고 싶어서였을까? 그것은 그렇지 않다. 광주는 그 뒤로 노동현장을 떠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광주라는 인물은 실제 인물인 양봉수가 조형해냈다. 다른 말로 하면 양봉수의 목숨을 건 투쟁이 또 다른 노동자를 만들어냈으며, 그 면면히 이어지는 노동자의 역사가 바로 ‘노동자의 이름으로’라는 운명을 탄생시킨 것이다. 바다에 몸을 던진 자신을 구해준 노파의 집에서 13년을 살고 광주는 아들 개벽이를 찾아나선다. 그런데 그 개벽이는 현재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고공농성 중이다. 하지만 광주는 개벽이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광주에게는 노동운동의 역사가 큰 상처였으며,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운명 앞에 서기 위해 광주가 우회로를 택하는 게 이 소설에서의 뒷이야기이다.
작가는 작중 인물 광주를 통해서 실제 인물 양봉수가 분신을 통해 던진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셈이다. 광주는 양봉수가 남긴 메시지를 “도대체 인간이라는 것이 뭔데?”로 요약한다. 이것은 심원한 물음이면서 양봉수의 선택을 통해 제시된 ‘답’이기도 하다. 그것은 광주가 비정규직 투쟁을 하고 있는 아들에게 불가피하게 물려준 역사이기도 하지만 전태일 이후 식을 수 없는 이념,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다. 작가는 그 ‘길’을 그치지 않는 투쟁으로 봤다.
이 소설은 오늘날 변함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노동 현장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지만,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새삼 묻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 소설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투쟁에 기대 그간의 노동운동에 대한 소설적 응답인 동시에 전태일을 이은 양봉수의 투쟁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작가 소개
저 : 이인휘
李仁徽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8년 [녹두꽃]에 「우리 억센 주먹」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폐허를 보다』로 2016년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오랫동안 노동문화운동을 했고 박영진 열사 추모사업회에서 일했다. 진보생활 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과 ‘사단법인 디지털노동문화복지센터’를 만들어 후배들에게 이어주었고,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이사이며 행동하는 작가네트워크 ‘리얼리스트 100’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7년 전부터 남한강이 아름답게 흐르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관덕마을에 내려와서 살고 있다.
목 차
2장. 지나간 나날들 / 21
3장. 또 다른 인생 / 107
4장. 구체적 현실 / 163
5장. 빛을 찾아서 / 233
6장. 또 다른 시작 / 341
7장. 노동자라는 이름의 굴레 / 439
작가의 말 /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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