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이번에는 식구들 얼굴을 그려 볼까
아흔이 넘어서 돌아보니 할아버지 인생에서 가족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다정한 말로 가족들이 함께 살아온 시간을 표현하고, 강렬한 색감의 크레파스로 가족들의 얼굴을 색칠했다. 앞에 앉혀 놓고 얼굴을 보고 그린 것도 있고, 사진을 보고 그린 것도 있다.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리다 보니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둘째 사위는 ‘착한둥이’, 셋째 딸은 ‘우리 집 문제아’, 큰딸은 ‘신통하고 똘똘하고’ 하며 이야기하다가, 여전히 성미가 안 맞아 티격태격하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례’라고 할지, ‘내 사랑하는 남례’라고 할지 고민한다. 쌍둥이 손주들이 부쩍 자란 모습에 깜짝 놀라고, 큰 병을 이겨 내고 씩씩하게 사는 손녀딸은 기특하고,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자식들은 고맙고 든든하다. 할아버지는 한마디씩 툭툭 던지지만, 그 말은 식구들을 향한 할아버지의 따뜻하고 정겨운 사랑 고백이다.
돌잽이 때 본 게 마지막인데
아득해서 어떻게 그리갔냐
힘들어서 그만둘까 하다가 ‘누구는 그리고 누구는 안 그리면 서운하지 않갔냐’ 싶어서 할아버지는 딸 셋과 아들, 사위와 며느리와 손주들까지 다 그렸다. 그리고 “이제 다 됐지?” 했지만, 할아버지가 그리지 않은 얼굴 하나가 남아 있었다.
전쟁 때 헤어진 딸내미 ‘숙녀’. 돌쟁이 때 본 게 마지막이라 아득해도 안 그릴 수가 없다. 살아 있으면 일흔 살 가까이 되었을 테지만, 다른 딸의 얼굴을 보고 상상을 더해 그려 본다. 딸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으며 얼굴을 그리고 색칠을 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헤어져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하지 못하고 살아온 기나긴 세월이었다. 충분히 오래 살았다고, 언제라도 즐거이 떠날 수 있다고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남은 바람이 있다면, 그건 황해도 고향 땅을 한번 밟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딸을 만나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이 열리고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은 언제쯤일까? 하루라도 빨리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새로운 이야기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작가 소개
글 : 유현미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오랫동안 책 만드는 일을 했다. 구순인 실향민 아버지와 함께 그림책 『쑥갓 꽃을 그렸어』를 쓰고 그렸으며, 그림 전시회 [서 있는 사람들] 전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갯벌』 『내가 좋아하는 야생 동물』의 글을 쓰고, 『냇물에 뭐가 사나 볼래?』 『세밀화로 그린 동물 흔적 도감』 같은 책을 만들었다.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펴낸 『상처 입은 자의 치유』를 우리말로 옮겼다.
글 : 유춘하
1926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1950년 입대한 지 얼마 안 되어 6·25 전쟁이 일어나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전쟁이 멈춘 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쪽에 남게 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에서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았다. 아흔 살에 우연히 딸과 함께 그린 그림들로 『쑥갓 꽃을 그렸어』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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