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광장의 시민들이 적폐세력을 향해 부르짖은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유진오의 큰 업적은 바로 이 나라의 정치인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엄청난 메시지가 담긴 헌법을 기초했다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여러 기관 및 단체에서 과도적 헌법안이 나왔다. 유진오는 당시 ‘조선 유일의 헌법학자’ 신분이었기에 해방정국 3대 주도세력으로부터 각각 헌법 초안을 의뢰 받는다. 헌법 초안을 작성할 때 앞선 과도적 헌법안 외에 세계 주요 각국의 헌법전과 여러 학자들의 저서를 참고하여 여러 날 고심한 끝에 헌법 초안을 작성하게 된다. 심의과정에서 내용이 추가되거나 수정된 것은 있지만 대부분 유진오의 초안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즉, 유진오가 작성한 헌법 초안은 그만큼 상당히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헌법안이었다는 말이다. 헌법 제정이 개인의 공적일 수는 없지만, 해방 후 황무지 같던 상황에서 이런 헌법안이 나올 수 있었던 건 빼어난 헌법학자였던 유진오의 공이 크다.
게다가 법제처장으로 임명되어 신생정부의 각종 법률안과 조약안을 만든 그는 명백하게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라 단언할 수 있다.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공로
하지만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지식인
그의 공로는 정부 수립 초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려운 시기에 야당을 이끌며 치열하게 3선개헌 반대투쟁을 벌였고, 총장 재직 시절 고려대학교를 발전시켜 명문으로 만든 것도 유진오였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 한편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일제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 5·16쿠데타 이후 맡았던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의 직위, 전두환 정권하에서 지낸 국정자문위원 및 국토통일원고문 자리 등등. 그때그때 시류에 맞추어 처신해 왔기에 그의 태도는 일관성이 없고 모순적이다. 고려대학교를 가장 크게 발전시킨 그였지만, 오죽하면 사후 빈소를 학교 내에 마련하지 못하게 한 ‘유진오 빈소시위 사건’이 일어났을까?
유진오의 일생에서 특히 부끄러운 시기는 일제강점기이다. 친일단체의 간부직을 지내며 각종 강연과 친일작품 등으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지지하고 침략전쟁을 미화·찬양했다. 훗날 그는 일제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고자 무단으로 이름을 도용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직접 나섰던 각종 강연이나 기고, 좌담 등의 발언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유진오’를 검색해보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 붙는다. 물론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천재적인 지식인 중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상당수이다. 식민 지배하에 있었다는 시대의 특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시대에도 변절하지 않았던 훌륭한 지사들이 많기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지식인의 경우 어려운 상황(처지)에서도 참과 정의, 민족과 국민의 편에 서야 한다며, 이것이 필부초동과 지식인의 처신이 달라야 하는 이유라고 저자는 외친다.
시대정신이 결여된 지식인
유진오의 삶은 어떤 교훈을 남기는가?
이런 관점에서 유진오의 삶 역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런 천재가 조금 더 역사의식이 뚜렷했다면 현대사가 다른 판으로 짜일 수 있지 않았을까?
1906년에 태어나 1987년에 사망한 유진오의 일생은 아주 거친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의 삶은 아주 무탄하기만 했다. 우수한 두뇌와 타고난 재능으로 문학인, 법학자, 관리, 대학인, 교육자, 정치인, 저술가의 분야에서 그는 모두 일가를 이루고 더러는 명성과 권위를 얻었으며, 역사의 한 자락에 남는 삶을 살았다. 일제에 저항하지 않았고 이승만과는 맞서지 않았다. 박정희의 3선개헌 장기집권 때는 업히다시피 제1야당 신민당 총재가 되어 개헌반대투쟁에 앞장섰으나 전두환 정권에는 한쪽 다리를 얹혔다.
분명 유진오가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다. 그럼에도 그에게 찍힌 ‘권력의 부역자’라는 낙인은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시대정신에 충실하지 못한 지식인이었다. 현실에는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으나 역사의식은 크게 무뎠던 것 같다.
그래서 공로와 과오를 함께 안고 있는 유진오의 삶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그의 친일행위와 권력지향성의 처신은 ‘반면교사’로, 헌법 초안과 3선개헌 반대투쟁은 ‘정면교사’로서의 의미가 있겠다고 판단했다는 저자의 말처럼, 그의 공과를 공정하게 기록한 이 평전이 역사의 법정에 한 사료가 되기를 바라본다.
더불어 수많은 공로를 지녔음에도 ‘유진오 빈소 시위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지식인이 시대정신을 잊지 않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오늘날의 지식인이 이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과 소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 소개
저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주요 저서로는 『곡필로 본 해방50년』, 『한국필화사』, 『백범 김구 평전』,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안중근 평전』, 『이회영 평전』, 『노무현 평전』, 『김대중 평전』, 『안창호 평전』, 『빨치산대장 홍범도 평전』, 『김근태 평전』, 『독부 이승만 평전』, 『안두희, 그 죄를 어찌할까』,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몽양 여운형 평전』, 『우사 김규식 평전』, 『위당 정인보 평전』, 『김영삼 평전』, 『보재 이상설 평전』, 『의암 손병희 평전』, 『조소앙 평전』, 『백암 박은식 평전』, 『박정희 평전』 등이 있다. 최근의 저서로는 『신영복 평전』이 있다.
목 차
1장 출생과 가계
2장 경성제국대학 시절
3장 문학청년 시절
4장 보성전문학교 교수 시절의 친일행위
5장 해방공간의 활동
6장 각계로부터 제헌헌법 초안 의뢰 받아
7장 제헌헌법에 담긴 민주공화주의
8장 대학경영자의 1950년대
9장 4월혁명과 5·16쿠데타 시기
10장 정계에 투신, 야당의 길
11장 신민당 총재로서 3선개헌 반대투쟁
12장 정계 은퇴 이후 유신시대
13장 은둔기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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