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뒤죽박죽 엉망진창 하인즈 씨의 도시 산책
아동 문학, 장난감, 노름, 필적한, 포르노, 여행, 민속 예술품, 정신 질환자들과 같은 소외 집단, 예술, 음식, 다양한 매체(영화, 라디오, 삽화, 신문 등) 등 온갖 재료들을 글쓰기의 소재로 삼은 사람. 학술 논문, 소론, 서평, 라디오 대본, 각종 편찬물, 단편 소설, 탐정 소설, 대화편, 일기, 문학 번역, 소품문과 무수한 단상들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으며, 일기를 제외한 모든 글을 게재(판매)한다는 처절한 생계 전략을 세운 사람. 그러나 교수 자격시험용으로 쓴 논문이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혹독한 평가를 받으며 취업에 실패하고, 기획했던 잡지들은 줄줄이 엎어졌으며, 마흔이 넘도록 부모와 부인에게 생활을 의지한 채 평생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 받은 사람.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한 미국 망명길마저도 실패하자 결국 자살을 택한 이.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사상가이자 문예 비평가로 평가받는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다.
어둑어둑한 밤, 환한 달빛,
비틀비틀 질주하는 정신 나간 자동차
슬그머니 골목을 돌고 또 도네.
꼿꼿하게 앉은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소곤소곤 속닥속닥,
사냥꾼의 총에 맞은 토끼 한 마리
모래 언덕에 누워 있네.
이야기는 알쏭달쏭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시 한 편으로 시작한다. 시의 형식을 갖춘 이 글은 얼핏 보면 그럭저럭 말이 되는 듯 보이지만 그저 각각의 단어들을 무의미하게 아무렇게나 배치해 놓았을 뿐이다. 벤야민은 이 시처럼 앞뒤가 맞지 않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 한 편을 더 들려줄 텐데 그 속에 숨은 수수께끼를 풀고 오류를 찾아낼 것을 주문하며 다음과 같은 충고를 덧붙인다. 질문에만 너무 집중하지 말 것, 그리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오류를 찾아낼 것.
엉망진창 뒤죽박죽 문제적 하루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하인즈 씨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 문제 하나 때문에 전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이다. 그때 친구 안톤이 비서를 보내 엉뚱한 편지를 하인즈 씨에게 건넨다. 하인즈 씨의 친구 안톤은 수수께끼 풀기의 왕이다. 안톤이라면 자신이 밤새도록 풀지 못한 수수께끼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하인즈 씨는 안톤을 찾아 집을 나선다. 하인즈 씨는 가는 길에 이발소에 들러 느긋이 면도도 하고, 거리에서 펼쳐지는 마술 공연도 구경하며, 중앙 광장 약국 약사의 수집품들도 구경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자신이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 외에 또 다른 이상한 문제들까지 더해지며 하인즈 씨의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인과관계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아무 관련도 없는 일들이 뒤죽박죽 마구잡이로 엉켜 일어나자 하인즈 씨의 하루는 점점 꼬여만 간다. 안톤이 교사로 일하는 학교를 방문했지만 여전히 그의 행방은 묘연하고 하인즈 씨는 점점 지쳐간다. 안톤을 찾아 하루 종일 도시를 산보하며 돌아다닌 하인즈 씨는 겨우 친구를 만나게 되고 그는 자신이 하루 동안 겪은 엉망진창 뒤죽박죽 꼬인 일들을 친구에게 털어놓으며 하소연하는데? 하인즈 씨는 과연 풀지 못한 그 수수께끼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
첨단의 매체 ‘라디오’를 실험하다
발터 벤야민은 20세기 문화 철학과 예술 사회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가이자 비평가로 알려져 있다. 벤야민의 텍스트들은 아주 난해해서 독일인들조차 쉽게 읽어내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대학교수 자격 취득을 위해 집필한 논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다”는 혹독한 평가를 받으며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거부당하자 벤야민은 학계 진입을 포기한다. 이후 학술 논문은 물론 서평, 라디오 대본, 각종 편찬물, 단편 소설, 대화편, 일기, 문학 번역, 소품문과 무수한 단상들까지 소재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집필해 생계를 꾸려 나간다.
당시 독일은 세계 경제 공황과 나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던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였다. 생계에 어려움을 겪던 벤야민은 돈을 벌기 위해 1929년부터 193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남서독 방송국과 베를린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대본을 쓰고 제작에도 직접 참여했는데, 나치의 정치 개입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총 85차례에 걸쳐 방송 대본을 집필한다. 방송 드라마를 비롯해 청소년을 위해 구상된 대도시 베를린에 관한 시리즈물(『수수께끼 라디오』가 여기 포함된다), 브레히트와 카프카 등 작가들에 관한 강연, 대담까지 형식과 내용도 다양했다.
벤야민에게 라디오 작업을 권한 이는 서사극 형식으로 널리 알려진 베르톨트 브레히트였다. 당시 두 사람은 자주 만나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는데, 벤야민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영화 같은 매체가 단순한 보도 기능에서 벗어나 청취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올바른 정치의식을 일깨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직접 대본을 집필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함으로써 그 생각을 실천하고자 했다. 비록 생계를 위한 목적으로 한 작업이긴 했지만 벤야민의 라디오 작업물들은 꼼꼼한 구성이 돋보이는 지적인 작품들로 평가받았다. 『수수께끼 라디오』는 1932년 7월 6일 프랑크푸르트 라디오에서 방송된 대본으로, 발터 벤야민은 이 책에서 도시의 사소하고 파편적인 일상 풍경을 담백하게 서술하며 그 속에 수수께끼의 형식을 담아 청취자(독자)들이 텍스트에서 파생되는 사회적인 맥락을 읽어낼 수 있도록 유도한다. 당시로서는 첨단의 매체인 라디오를 접하며 쌓은 경험은 벤야민이 훗날 아우라를 상실한 시대의 예술작품에 관한 이론을 전개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파격적이고 개성 넘치는 글과 그림의 조합과 조화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넘나들었던 벤야민의 글쓰기에는 알레고리와 몽타주라는 독특한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그리스 어 ‘다른 것(allo)’과 ‘말하다(agoreuo)’가 합쳐진 말에서 유래한 알레고리Allegory는 단어나 문장의 유사성을 넘어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제적인 은유로 작동하도록 하는 표현 기교이고, 몽타주는 영화나 사진을 편집 구성하는 한 방법으로 각각의 이미지를 적절히 이어 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기법이다. 벤야민은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요소들을 감각적으로 이어 붙여 전혀 다른 맥락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방식의 글쓰기 특성을 드러내는데 언뜻 이미지와 무관해 보이는 소품들까지도 “이미지의 시퀀스(몽타주 원리에 따른 배열)”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수께끼 라디오』의 텍스트 역시 주인공 하인즈 씨가 도시를 산책하며 하나씩 보게 되는 기이하고 이상한 풍경들의 몽타주로 구성되는데 이런 특징들은 (비록 라디오 방송의 목적으로 쓰인 글이지만) 그림책의 서사 전개 방식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화가 마르타 몬테이로는 『수수께끼 라디오』에 나타난 벤야민의 개성적인 글쓰기 스타일과 그 내용에 담긴 유머를 이미지로 잘 구현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느리게 걷는 산책자의 시선으로 포착한 도시의 풍경과 인물들은 흔들리듯 리듬 넘치는 선과 감각적이고 독특한 색의 조합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한 화면 안에 긴 시간의 흐름을 분할해 담거나 여러 시점을 한 시점으로 포착해 담아내는 기법은 마치 피카소의 입체주의 미술 양식을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빈곤해졌다. 경제 위기가 곧 문 앞까지 왔고, 그 뒤에 그림자가, 곧 다가올 전쟁이 있다. 인류는 필요에 따라 문화보다 더 오래 살아남으려고 대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 일을 웃으면서 한다는 점이다” _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中
평생을 우울, 죽음에 대한 생각들과 싸우며 때로는 그 우울과 죽음을 자양분 삼아 다시 삶의 의지를 일으켜 세우기도 했지만 발터 벤야민의 어떤 글들은 명랑하고 섬세한 유머로 가득하다. 『수수께끼 라디오』에서도 주인공 하인즈 씨가 애초에 이야기가 시작되는 계기이자 목적이었던 첫 수수께끼 푸는 일을 어느 샌가 잊어버리고, 그 문제는 뒷전으로 밀쳐둔 채 또 다른 문제들에 골몰하는 모습은 듣는(읽는) 이들로 하여금 어리둥절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 책의 첫 장면에서 벤야민이 ‘질문에 너무 집중하지 말 것, 그리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오류를 찾아낼 것.’이라고 말한 의도 또한 유쾌하고 명료하다. 우리 주변의 지나치기 쉬운 사소하고 작은 풍경들 속에서도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을 예민하게 포착해 낼 것, 그것을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로 소화하며 현실을 비판적으로 또 능동적이고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야기 앞머리에서 벤야민이 들려준 이상한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어둑어둑한 밤, 환한 달빛,
비틀비틀 질주하는 정신 나간 자동차
슬그머니 골목을 돌고 또 도네.
꼿꼿하게 앉은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소곤소곤 속닥속닥,
사냥꾼의 총에 맞은 토끼 한 마리
모래 언덕에 누워 있네.
과연 정말 말이 안 되는 시일까? 아니다. 독자들은 그 듬성한 텍스트들 사이에 삶으로 경험한 무수한 맥락을 채워 넣어 자신만의 완성된 이야기 한 편을 읽어 낼 수 있다. 이런 작업은 요즘 SNS와 같은 매체를 통해 활발히 이뤄지는 작업과 유사하다. 각 개인이 사회의 갖가지 풍경에서 새로운 의미를 포착해 내고, 또 사회 속에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배치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마치 예술 작품처럼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전시하는 것이다. 아마 오늘날 발터 벤야민이 살아 있었다면, 파편적인 삶의 조각들을 저마다의 언어로 신속히 포착해 내고 재구성하는 SNS와 같은 형태의 매체를 보며 무척 흥미로워했을 것이다.
이야기는 알쏭달쏭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시 한 편으로 시작한다. 시의 형식을 갖춘 이 글은 얼핏 보면 그럭저럭 말이 되는 듯 보이지만 그저 각각의 단어들을 무의미하게 아무렇게나 배치해 놓았을 뿐이다. 벤야민은 이 시처럼 앞뒤가 맞지 않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 한 편을 더 들려줄 텐데 그 속에 숨은 수수께끼를 풀고 오류를 찾아낼 것을 주문하며 다음과 같은 충고를 덧붙인다. 질문에만 너무 집중하지 말 것, 그리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오류를 찾아낼 것.
작가 소개
글 : 발터 벤야민
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유복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193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를 불안한 눈빛으로 살다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40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국경 마을 포르부(Port Bou)에서 음독자살한 비극적 운명의 지식인이다.
하지만 그의 지적ㆍ사상적 세계, 그리고 그가 남긴 글들은 1930~40년대에 걸쳐 이루어진 성과물들이었지만, 21세기가 들어선 지금에서도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으며, 그 폭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시대 사상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나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등이 모두 벤야민 사상에 빚을 지고 있으며, 독일에서는 최근 들어 그의 매체미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봇물 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성만 교수는 발터 벤야민 사상과 글의 '현재성'이 벤야민을 향한 현재진행형의 해석들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대 유럽 지식인들의 글을 지금 접해보면 시대적 한계를 분명히 느낄 수 있지만, 벤야민의 글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양상이나 문제점들에 대한 풍부한 해석과 의문부호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그의 사상이 주로 유물론적 모더니즘 미학과 사회철학적 시각에서 해석되고 수용되어 왔다면, 1990년대 들어서는 언어철학, 번역이론, 미메시스론, 특유의 산문양식 등이 부각되고 있다.
그가 난해한 사상가로 통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사상의 기저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메시아주의 또는 카발라 등 유대신비주의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의 학문이 그동안 전통적인 분과학문적 영역에 치우쳐 통합적 사유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벤야민의 사상을 그저 유물론적 미학주의자 내지 유대신비주의 요소를 갖은 마르크시스트 정도로 평가한다면, 아주 협소한 그의 지적ㆍ사상적 세계를 볼 수 있을 뿐이었다.그에게는 분명 20세기 최고의 유대신비주의 학자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이 있었다.
하지만 벤야민은 그 유대신비주의에 매몰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렇다고 그 대척점에 있었던 마르크시즘에도 그 어떠한 해결책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의 연인이자 마르크시스였던 라트비아 출신 여성 아샤 라치스(Asja Lacis)의 영향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지만, 그에게 '사상'의 문제는 언제나 '지식인'의 관점에서 무엇이 위기에 처한 인류의 문제를 고뇌할 수 있게 하는가 였다. 그것은 바로 지식인이 가져야 하고 가질 수밖에 없는 정치적ㆍ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한 신랄한 자기비판적 성찰에 있음을 그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1940년 마지막으로 쓴 역작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일명 '역사철학테제')가 스탈린과 히틀러의 비밀협약에 대한 절망에서 나온 글임을 보면, 이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림 : 마르타 몬테이로
마마르타 몬테이로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한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보그 등 다양한 언론 및 잡지와 콜라보 작업을 수행했으며, 여러 단행본과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2017년 미국 일러스트레이션 36어워즈에 선정되었으며 2018 리스본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바스코 그란자 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포르투갈 페나피엘에 머무르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발터 벤야민의 수수께끼 라디오》는 한국에 소개된 첫 작품입니다.
역 : 박나경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멕시코 몬테레이 공과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페루에 있는 산 아구스틴 국립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영어, 스페인어 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아들 노아, 남편 마이크와 함께 살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는 『행복한 늑대』『넘어져도 괜찮아!』 『안전대장 리시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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