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설탕이 아니라 마스코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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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엄은희
출판사항따비, 발행일:2018/08/30
형태사항p.222 A5판:21
매장위치식품가정부(B2)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98439521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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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설탕으로 쌓아올려진 나라, 필리핀
 필리핀 설탕사史이자 설탕으로 본 필리핀사,
그리고 필리핀 설탕을 둘러싼 공정무역사

≪대한민국 치킨展≫, ≪라멘의 사회생활≫에 이어 ‘따비음식학’ 시리즈 세 번째 책이 나왔다. 이번엔 필리핀 설탕 이야기다. ‘음식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사람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자’ 하는 시리즈 기획 의도답게, 비단 필리핀 ‘설탕’ 이야기만이 아니라 ‘필리핀’ 설탕 이야기이며, 또한 필리핀 설탕을 둘러싼 공정무역사를 다룬 책이다. 그렇다면 질문. 한국에 치킨, 일본에 라멘이야 너무나도 분명한 연결고리가 보이지만,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 설탕을 통해 필리핀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까?
물론이다. 설탕은 전 세계인이 가장 많이, 가장 자주 먹는 것 중 하나다. 그럼에도 설탕 원료인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아)열대 기후가 필요하다. 이는 다시 말해 사탕수수 재배지이자 설탕 생산지가 일정한 지역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설탕을 대체할 각종 감미료가 개발된 지금과 달리) 한정된 생산지에서 가능한 한 많은 설탕을 생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설탕의 역사는 세계의 착취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리핀은 사탕수수 재배지이자 설탕 생산지, 식민 지배로 착취당한 나라이자 그렇게 생산된 설탕으로 쌓아올려진 나라였다. 설탕을 통해 필리핀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단순히 필리핀의 기후, 지형, 산업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의 근현대사 전체가 설탕과 맞물려 있다.


‘마스코바도’를 아십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예’라고 대답할 이가 몇이나 될까? 생소하게 들리는 이 단어는 ‘필리핀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비정제설탕’을 가리킨다. 이 간단한 설명만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좀 더 부연하자면, 마스코바도나 우리가 시중에서 구입하는 백설탕이나 원료가 사탕수수인 것은 같다. 다만 이 둘을 구분짓는 것은 기계식 정제과정을 거쳤느냐, 거치지 않았느냐다. 사탕수수 원액을 설탕 입자로 만들어주는 이 정제과정에서는 불순물이 걸러지지만, 동시에 사탕수수에 포함된 미량의 영양물질까지 걸러진다. 이러한 영양물질은 곱고 일관적인 설탕 입자가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당밀 형태를 취하고 있어 대량생산 공정에서는 이를 제거하고 순수 자당을 추출해낸다. 이것이 백설탕을 만드는 근대식 설탕공장에서 핵심적인 공정이다. 이에 반해 마스코바도를 비롯한 비정제설탕은 제조 공정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되, 대형 공장에서와 같은 당밀 제거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사탕수수에 함유된 영양물질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요컨대 마스코바도는 설탕계의 현미나 다름없는 존재다.
세상에 꼭 필요한 것들을 설명할 때 흔히 ‘빛과 소금’이라는 비유를 들곤 하지만, 우리는 하루에 소금보다도 설탕을 더 많이 섭취한다. 커피, 청량음료, 빵, 과자 등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먹는 찌개며 반찬에도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한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양으로만 따진다면, 설탕은 전 세계인이 가장 많이, 가장 자주 먹는 것 중 하나다.
가와기타 미노루가 쓴 ≪설탕의 세계사≫에 따르면, 설탕은 최초의 세계상품이다. 설탕은 전 세계인이 좋아하는 것이자, 근대 초기부터 세계적으로 널리 거래된 상품이다. 16세기 이래 근대의 역사는 이러한 세계상품(설탕, 차, 커피, 향신료 등)에 대한 패권을 놓고 유럽 열강들 간 치열한 경쟁을 벌여온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하나인 향신료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듯이) 세계를 재편하다시피 했다. 포르투갈, 잉글랜드, 네덜란드의 아시아 식민지들은 향신료를 찾아 떠난 항해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향신료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부를 축적하거나 목숨을 잃었고, 제국들이 조성되었다가 파괴되었으며, 심지어 새로운 대륙이 발견됐다.
그렇다면 설탕은 어땠을까?


설탕의 세계사, 설탕의 필리핀사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커피나 설탕이 유럽의 행복을 위해서 꼭 있어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구상의 커다란 두 지역에 불행을 초래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설탕이 세계상품으로 등장한 과정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아메리카는 사탕수수를 경작할 땅으로 충당되느라 인구가 줄었고, 아프리카는 그것들을 재배할 인력에 충당되느라 허덕였다. 다양한 생태종이 어울려 살던 열대우림은 대규모로 벌채됐다. 토착민 공동체의 땅은 강탈되어 대규모 플랜테이션으로 조성됐다. 요컨대 아주 오랫동안 상류층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이 ‘하얀 금’이 지금처럼 일상적인 식품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 이면에는 다른 세계의 ‘저발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노예노동, 대규모 단작 플랜테이션은 막대한 희생을 필요로 했다. 생태계 파괴는 물론, 인적 구성까지도 뒤바뀌었으며, 그렇게 재배한 농산물가격이 폭락하기라도 하면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어야 했다.
필리핀은 그러한 저개발국 중 하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설탕 산지(중·남아메리카), 노예들의 출신지(아프리카), 설탕의 주 소비처(유럽, 특히 영국)를 중심으로 서술된 설탕의 세계사에서 필리핀은 조금 비껴나 있다. 필리핀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들어온 것은 이미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였으며, 이마저도 다소 뒤늦게 이루어졌다. 333년간 필리핀을 식민 지배했던 스페인은, 200년 이상 필리핀을 선교지 혹은 중개무역의 중간 기착지로만 활용하다가 18세기 말에서야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도입했다. 식민지 경영비를 현지에서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나무가 베이고, 정글이 사라지고, (노예 대신) 가난한 임노동자들이 사탕수수 재배지로 들어왔으며, 다른 산업이 발달할 여지 없이 설탕산업이 비대해지면서 미국 시장(미국은 필리핀 농산물의 가장 큰 수입국이었다)에 대한 의존도가 비할 데 없이 커졌다. 여기에는 사탕수수를 재배하던 농업자본가들이 국가나 사회의 발전보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미국에 의존적인 농업국가로 남기를 원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즉 필리핀 설탕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설탕을 통해 부를 축적한 필리핀 지배계층의 형성 배경을, 나아가 필리핀 근현대사를 살펴보는 것이기도 하다.


설탕에 울고 설탕으로 다시 일어서다

≪흑설탕이 아니라 마스코바도≫라는 제목대로, 마스코바도는 언뜻 보기에 흑설탕처럼 생겼다.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설탕보다 색깔이 짙어서다. 굵은 입자에, 일정량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어 약간 끈적거리는 점도 닮았다. 그런데, 이 비정제설탕에 대해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을까? 백설탕에 비해 건강에 좀 더 좋으리라는 점 말고?
앞서 말했듯 설탕은 전 세계인이 가장 많이, 가장 자주 먹는 것 중 하나다. 쌀이나 밀가루처럼 주식 삼아 먹는 것은 아니더라도 생필품이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 ‘설탕’은 점점 하나로 좁혀지고 있다. 바로 입자가 고운 백설탕이다. 필리핀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드는 마스코바도는 점차 자취를 감추고 ‘슈가 센트럴’(근대식 제당공장)이 가파르게 늘어난 것도 입자가 고운 백설탕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시장은 새하얀 설탕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마스코바도는 정제설탕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것 혹은 낙후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요컨대 설탕의 대중화를 떠받친 것이 세계의 불균형이었듯이, 필리핀 설탕산업을 떠받친 것 역시 이러한 세계의 불균형이었다. 필리핀은 미국을 위해 설탕을 생산했고, 미국은 이를 싼값에 사들였다. 이러한 불균형한 판 위에서, 설탕을 대체할 감미료들이 개발됨에 따라 설탕 수요가 줄어들고 국제 설탕가격이 하락하자 필리핀 설탕산업이 고꾸라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스코바도는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된 것이었다. 일반 마트 진열대에서야 쉽게 찾아볼 수 없지만, 생협 매장에서는 진열대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공정무역 상품’으로서 말이다. 흔히 공정무역 하면 턱없이 많은 마진을 떼어가는 중간유통업체 없이 농부들에게 제값을 치르고 사는 상품들을 떠올리곤 한다. 공정무역 커피, 공정무역 차, 공정무역 초콜릿 등. 맞다. 마스코바도 역시 불균형한 판 위에 올라서는 대신, 공정한 값을 치러줄 소비자들에게 연결되고자 애쓰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히 마스코바도를, 공정무역 상품을 사자는 것이 아니다. 제3세계의 농부들에게서 ‘제값’에 상품을 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것은 좀 더 싼 대량 생산품에 대한 유혹이 아니라, ‘착한 무역’이라는 프레임이다. 공정무역은 플랜테이션 농업을 기반으로 한 불균형한 판을 바꾸지 못한다는 비판에 자주 맞닥뜨리곤 하지만, 그러나 (원조가 아닌 교역으로서) 공정무역을 이어가는 일은 생산지에 작지만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 사탕수수 생산자들에게 적정한 수입과 지속적인 고용을 보장함으로써 삶의 안정성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됐다. 말하자면 무언가를 계속 도모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변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무언가를 바꿔내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크나큰 인내심이, 지난한 싸움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정무역은 거래에 앞서 생각을 바꾸는 적극적 마주침이어야 하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렇게 다시 보는 설탕 혹은 설탕의 역사는 단맛보다는 쓴맛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단맛 뒤에 숨은 쓴맛을 맛보는 순간, 또 하나의 세계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엄은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정치생태학자이자 동남아 전문가다.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환경 이슈, 농업·농촌·농민, 개발협력, 대안개발, 해외 한인기업 등을 연구해왔다. 논문으로 〈공정무역 생산자의 조직화와 국제적 관계망〉, 〈환경부정의의 공간성과 스케일의 정치학〉, 〈메콩의 에너지 경관〉, 〈팜오일의 정치생태학〉 등이, 공저로 《말레이세계로 간 한국 기업들》(2014), 《세계의 시장을 가다》(2017), 《통합사회를 위한 첫걸음》(2018)이 있다.
 
 

 

목 차

1장 ‘마스코바도’를 아십니까?
설탕계의 현미, 마스코바도
세계 속의 설탕, 한국의 설탕
설탕의 세계사
필리핀에서의 설탕의 의미

2장 일곱 개의 키워드로 필리핀 이해하기
바랑가이: 전통사회의 기원
동남아의 관문국가: 태평양 건너 찾아온 이방인들
종 아래 사는 사람들: 스페인 식민시대의 유산
영어와 미국화: 미국 식민시대의 유산
필리핀의 최대 수출품?
피플파워의 기억: 변화의 희망은 풀뿌리에

3장 필리핀 역사에서 설탕의 위치
전통사회의 설탕: 자연의 선물
스페인 식민시대의 설탕: 하시엔다의 출발
개항(1834) 이후 필리핀 설탕(1): 영국의 영향과 수출의 본격화
개항(1834) 이후 필리핀 설탕(2): 설탕 산지의 확대와 토착 엘리트의 등장
미국 식민시대의 필리핀 설탕: 약속된 시장
독립 이후 필리핀의 설탕산업: 슈가블록의 승리
마르코스 집권기의 설탕산업
설탕 때문에 울다: 1984년 설탕섬 최악의 기아사태
마스코바도로 다시 일어서다: 원조가 아닌 교역의 시작

4장 파나이섬과 마스코바도
파나이로 가는 길
파나이공정무역센터의 출발
마스코바도 생산의 시작
사회적 경제를 실천하는 PFTC
파나이의 마스코바도 생산자들
PFTC의 지역사회에 대한 경제적 기여
PFTC의 조직적 발전과 정체성
한국의 생협과 파나이 마스코바도 생산자의 만남
설탕공장이 선물한 지역사회의 변화
AFTC 설립 이후 PFTC의 변화

5장 공정무역, 연대로 만드는 희망의 거래
공정무역 이해하기
공정무역의 태동과 지구적 확산
지금, 세계의 공정무역
공정무역운동의 지역화, 공정무역마을운동
공정무역과 설탕
한국의 공정무역: 15년의 역사

6장 나가는 글

부록1 루스 살리토의 이야기
부록2 로메오 카팔라 이야기
참고문헌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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