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거기 있지만 거기 없는 고향, 찾아갈 수 있지만 돌아갈 수 없는 도시의 고향 이야기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기획지원사업 선정작입니다.
나는 지금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갑니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습니다. 나고 자란 곳, 살던 흔적과 익숙한 풍경, 친숙한 사람들이 남아 있는 곳. 운이 좋은 경우라면, 언제든 돌아가 지친 마음을 부려놓을 집과 웃으며 나를 반겨 줄 어버이가 기다리는 곳. 하지만, 모두가 고향을 간직하는 건 아닙니다. 고향을 등진 사람도 있고, 고향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도 있으며,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고향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할 수 있는 걸까요? 존재의 근거, 삶을 이루는 기억의 공간이기 때문 아닐까요. 이 그림책은 그 기억의 공간, 고향을 잃어버린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나를 이루는 기억의 장소들을 찾아서...
해마다 라일락 꽃 필 때면 내 마음은 그곳을 서성입니다. 바람이 실어 오는 꽃향기에 취해 학원 가던 발길을 멈추고 늦는 줄도 모른 채 한참 서 있던 곳, 유리창을 지나오는 오후의 햇빛 속에서 사내애들, 여자애들 뛰노는 소리에 엉덩이가 절로 들썩이던 곳,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들 목소리와 우르르 몰려오는 아이들 발소리가 긴 복도를 가득 메우던 곳, 노을이 물든 복도에 도마소리와 따뜻한 밥 냄새가 흐르고, 창문들 하나둘씩 노랗게 불 켜지던 곳, 삐걱거리는 시소소리, 두부장수 종소리, 어느 땐가는 노란 가로등 아래서 나를 기다리던 그 사람도 거기 있던 곳... 나는 그곳이 그립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갑니다. 둔촌주공아파트.
하지만 그곳은 사라진 고향. 댐을 가득 채운 물에 잠겨버린 마을처럼. 아직 거기 있지만, 이제 거기 없습니다. 나는 거기 있는 고향을 만나고 싶어 물속으로 들어가지요. 깊이깊이 내려가 기억 속을 거닙니다. 라일락나무 꽃 피운 화단을 지나 현관 우편함을 열어 옛날의 편지들을 찾아보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려 아이들 뛰어다니고 엄마들 한담을 나누는 복도를 지나, 505호 우리 집 문을 엽니다. 우리 가족의 손때가 묻은 익숙한 물건들, 가로수 꼭대기가 보이는 창밖의 풍경, 여섯 살 생일파티를 하던 아련한 기억, 아! 그 생일에 받은 곰돌이 인형...! 곰돌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틀 가에 키 잰 흔적이 남아 있는 내 방 문을 엽니다. 거기 아직도 가만히 누워 있는 곰돌이. 눈이 마주치자 나는 곰돌이만한 작은 아이가 됩니다. 작은 아이가 되어 곰돌이를 힘껏 끌어안습니다.
재개발의 호수에 잠겨버린 아파트단지도 간직하고 싶은 고향입니다.
이 그림책의 화자인 ‘나’는 고층 아파트로 재개발 공사 중인 둔촌주공아파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 자신입니다. 1970년대 말 이후 대단지들이 들어서면서부터 아파트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가 되어 왔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나고 자라게 되었으니 아파트가 '고향'인 세대가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시기에 지어진 단지들이 속속 재개발에 들어선 이즈음, 그 세대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철거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실향'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래된 단지가 철거되는 것은 건물만이 아니라 그 세월 동안 무성하게 자란 나무도 손때 묻은 놀이터도 숱하게 발길이 닿았던 길마저도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또한 그렇게 고향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지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개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기억과 경험의 거처, 정서의 근거지를 잃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기억과 정서처럼 비물질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는 오래된 건물이나 마을을 새로 지어야만 할 때 거기 살던 사람들이 그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 어루만지며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아카이브 사업에 공을 들인다고 합니다.
우리의 경우는 공적영역에서의 인식과 노력이 부족하여 주로 개인들이 그러한 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에스엔에스와 독립출판물로 아카이빙 작업을 하고 있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나 최근 개봉된 다큐 영화 [집의 시간들] 같은 경우가 그러하며 이 그림책 <나의 둔촌아파트> 또한 그 맥락 위에 있습니다.
그림책을 만든 김민지 작가는 공간이 있던 곳으로서 그 자리는 거기 있으나 사람이 살던 곳으로서 그 장소는 거기 없는 고향을 대형 댐의 건설로 물에 잠긴 수몰마을에 빗대어 실향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몰마을이 독재적 개발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라면 재개발로 사라진 아파트단지는 맹목적 자본논리의 제물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낡아져 불편한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건폐율이니 용적률이니 투자가치, 시세차익이니 하는 경제논리에만 함몰되어 정말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여기고 쉽게 폐기처분하는 재개발이라면, 신중하게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 애틋하게 아름다운 그림책이 우리 사회에 그러한 사유의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갖게 만들고 고향을 잃은 이들에게 작은 위안이마나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민지
다섯 살 되던 해 봄날에 둔촌주공아파트로 이사를 하여 어른이 될 때까지 쭉 그곳에서 세상을 고 느끼며 자랐습니다.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그러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여전히 살갗에 닿을 듯 생생히 떠오르는 그곳의 시간들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HILLS에서 일러스트레이션과 그림책을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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