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구마라집의 일대기,
불경 전래사이자 실크로드를 둘러싼 문화사
이 책은 4세기 중반(344년)에서 5세기 초반(413년)을 살았던 구마라집의 일대기다. 당시는 중국사에서 보면 정치 사회적으로 어지러운 시대라 새로운 철학과 사상이 절실한 때였고, 불교사의 시각에서 보면 중국의 초기 불교 이해가 한계에 다다른 때이기도 했다.
그런 시대, 그런 상황에서 구마라집은 역경가이자 사상가로, 또 큰 수행자로 활동했다.
그는 한역 불경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위대한 역경가로 기록된다. 구마라집은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대승 경전인 《금강반야바라밀경》 《묘법연화경》 《유마힐경》 등을 한역했다. 우리가 오늘 읽는 바로 그 문장, 그 뜻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동시에 구마라집은 동아시아에 《중론》 《백론》 《십이문론》 등 중관학의 공관(空觀)을 전파한 사상가였다. 또 중국에 선종이 태동하기 전 선경(禪經)을 번역하여 초기 선법을 전한 시대를 앞선 수행자였다.
그의 삶은 불교 전래의 역사와 함께한다. 공간적으로 그의 삶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이어졌다. 일곱 살에 사미승이 되어 십 대에 타림 분지와 파미르고원을 둘러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불교문화를 체험하며 불학을 배우고 명성을 떨쳤다. 사십 대에는 구자국을 떠나 중국 동쪽 변경 고장에서 17년간의 긴 유폐 생활을 보낸 다음 후진의 수도 장안에서 역경(譯經)과 강설(講說)로 홍법의 뜻을 이루었다. 그 과정을 시간적으로 보면 구마라집의 행적은 불학이 소승에서 대승으로 전환하고, 대승 공 사상이 동방으로 퍼져나가는 길잡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마라집 평전》은 한 인물의 삶의 기록이자 불경 전래의 역사이며 실크로드의 시대 풍경을 담은 사회 문화사로서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서 책은 《진서》 《한서》 등의 역사서, 《고승전》 《출삼장기집》등 많은 승려들의 전기와 여러 기록물을 기초로 하여 중앙아시아의 찬란했던 불교문화,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험난한 자연환경,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오호십육국의 상황, 장안 역장(譯場)의 생생한 모습, 강남 여산의 혜원과 보기 드문 불학 교류, 구마라집과 함께한 걸출한 제자들의 면면까지 4, 5세기 서역과 중원의 문화, 사회, 승단의 모습을 되살려 내고 있다.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는 것과 같다.
오직 연꽃만 취하고 더러운 진흙은 취하지 말라"
"성품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고승전》에 나오는 어린 시절 구마라집에 대한 성격 묘사다. 그다음에 이어진다. "그의 모든 행동이 수행자들에게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스스로 이해하는 바가 있어 남의 의심에 마음 쓰지 않았다."
구마라집은 복잡한 특성과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믿기 힘들 정도로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았고, 수행자로서 겪기 어려운 치욕과 모욕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꺾여 뜻을 접지 않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숨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비구의 계율을 어겼다고 주변의 수군거림을 받을 때도(4장), 세속의 권력자에 의해 파계할 때도(9장), 무도한 전진의 장수 여광에게 조롱당할 때도(11장), 음계를 어긴 스승에게 반감을 가지며 제자로부터 대우 받지 못할 때도(17장)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를 "천재는 제멋대로 행동하기 십상이고 소소한 규율을 닦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과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정신이야말로 학술 연구와 예술 창조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 구마라집이 말한 대로 한평생 홀로 엄격하게 계율을 지킨 자들 중에서 몇 명이나 불법을 크게 흥하게 했는가? 불교가 계율을 만든 근본 목적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갈고 닦아 아라한과를 얻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있다"(138쪽)고 저자는 말한다.
"파계하지 않으면 우바굴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한때 구마라집은 지혜 제일인 사리불(부처의 십대제자)의 현신, 용수보살(제2의 붓다로 일컬어짐)의 재림, 우바굴다(인도의 제4대 조사로 아소카왕의 왕사)에 못지않으리라는 평을 얻었던 천재적 사상가이자 수행자였다. 하지만 그를 얻기 위해 두 번의 전쟁이 일어나고 그들에 의해 두 번의 파계를 했다.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가던 중 전진의 왕 부견의 죽음으로 황량한 땅 고장에서 십칠 년을 머물며 여광의 군사(軍師)나 하며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 전적과 불경을 읽었다. 육십 대가 거의 다 되어서야 장안에 와서 후진의 군주 요흥의 지원 속에 불경을 번역하고 강설하며 홍법의 뜻을 이루었다. 그 과정은 그 자체로 개인의 역사를 넘어 시대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구마라집이 겪은 계율을 어긴 수행자의 번뇌와 업장이 깊고 무거움에 대한 고통은 컸고, 그 고통을 대승 공관으로 속박에서 벗어나며 세상의 따가운 시선에 대처하는 의연하고 담담한 모습이 기록과 상상을 넘나들며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구마라집과 사막을 지나고
파미르고원을 넘고 인더스강을 건너…
인도 중부에서 발생한 불교는 서북쪽 계빈, 간다라, 대월지 등을 거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림분지 주변 서역을 지나 중국에 전해졌다. 구마라집의 삶도 구자국을 기점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 중앙아시아에서 동쪽 중국 고장, 장안으로 이어졌다.
구마라집의 일생을 따라가는 여정에는 불법뿐 아니라 험준한 자연환경, 찬란했던 불교 사회의 모습, 서역만의 독특한 문화가 함께한다.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구자는 서역의 핵심 국가이자 물산이 풍부하고 불교가 흥성한 나라였다. 수도 연성에서 북쪽으로 사십여 리를 가면 "고차하의 서쪽 연안은 기복을 이룬 언덕이었고, 작리대사는 그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각 층의 건축과 금박이 칠해진 불당과 불탑 등은 언덕 위에 난데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세워져 있었고, 그 기세는 장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저 갈색의 언덕은 마치 황금색을 주조로 하는 거대한 주단(綢緞)으로 변해서 남쪽에서 시작해서 북쪽까지 대지를 덮는 듯했다"(37쪽)는 작리대사가 눈앞에 나타난다.
아홉 살 구마라집의 계빈 유학길을 가다 보면 수많은 구법승과 상인들이 다녔을 파미르고원과 인더스강을 만난다. "우전하의 양안은 사람 사는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사방은 온통 모래와 자갈뿐이었다. 가는 내내 마차 바퀴가 모래와 자갈에 끼이고 걸렸다. 냉기를 품은 매서운 칼바람은 뿌연 먼지를 몰고 왔다. 며칠 동안 큰 바람이 불었다. 모래와 자갈이 섞여 바람에 날렸고 말은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92쪽)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돌산에 있는 힘을 다해 겨우겨우 기어올랐다. 꼬박 반나절을 보내고 나서 마침내 비좁은 협곡 입구에 이르렀다. 입구 맞은편과 좌우 양쪽의 산봉우리 모습은 커다란 짐승의 새하얀 어금니 같았다. (…) 말이 풀을 뜯지 않고 머리를 들어 귀를 세운 채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았다. 바위에서 내려온 말몰이꾼 두 명이 바람을 맞아가며 밧줄을 단단하게 부여잡고 간신히 말들을 끌었다. 그들은 한데 모여 서로를 꽉 잡았다. 눈 깜짝할 사이 눈발이 거세게 몰아쳤다." "벼랑에서 내려다 본 협곡의 물살 빠르기는 화살이 날아가는 듯했다. (…)그 강은 거의 상상에나 나올 법한 고난과 위험을 의미했고, (…) 정으로 쪼아 벼랑에 만든 통로에서 위아래로 칠팔백 개의 계단이 있었다. 한 시간쯤 후 일행은 마침내 높은 벼랑에서 신두하 강가로 내려왔다. 강 위로 가로놓인 긴 밧줄은 사발보다 굵었다. 굵은 밧줄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광주리는 십여 명 정도를 실을 수 있었다. 거센 바람이 계곡을 휩쓸었고 밧줄이 이리저리 계속 출렁였다."(98-100쪽)
사막을 가로지르고 파미르고원을 오르고 인더스강을 건너는 자연과의 사투를 하고 나면 만나는 곳이 최고의 학맥을 자랑하던 불국 계빈이다. "노란색 작은 꽃잎을 활짝 피운 개자리가 깔린 들판은 아름다운 양탄자 같았다. 자주 눈에 띄는 코끼리 무리가 물소와 목 쪽이 불뚝 솟은 이른바 봉우(封牛) 무리 사이에서 갑자기 뛰어나오기도 했다. 곳곳에 보이는 사육한 공작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깃털을 뽐냈다. 민가와 궁실의 건축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설주 위에는 대부분 조각상이 있었다. 금은동과 주석으로 만든 물품에는 정교한 꽃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유통되는 금은 화폐의 앞면은 국왕의 두상이었고 뒷면은 기마 형체이거나…."(101-102쪽)
험한 자연과 화려한 시가지만 만나는 것은 아니다. 서역 남로 우전국에서는 불상 뒤를 따르며 절하고 춤추는 종교 의식인 행상(行像)을 볼 수 있고, 구자에서는 서역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악무인 <소막차(蘇莫遮)>, <호등무(胡騰舞)>와 <호선무(胡旋舞)>, 우리에게도 익숙한 <오방사자무> 공연도 함께할 수 있다. 여기에 당나라 시인 유언사가 지은 칠언고시 <중승 왕무준의 집에서 밤에 호등무를 감상하다(王中丞宅夜觀舞胡騰)>(268쪽)를 읽으면 전진의 여광이 384년경 구자에서 보고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구자 악무가 삼백여 년 뒤에는 당나라에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여광 군대의 전리품에 실려 간 것일지도 모른다. "구자국과 서역에서 획득한 수많은 보물과 진기한 물건과 희귀한 동물들이 이만여 필의 낙타와 만여 필의 말에 실려 실크로드를 가득 메웠다. (…) 낙타 무리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긴 선처럼 보였는데, 그 끝은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 부발 두 마리를 가둔 커다란 상자가 소가 끄는 두 바퀴 달린 수레에 실렸다. 그중 한 마리는 뿔이 하나였고 다른 한 마리는 뿔이 둘이었다. 이 두 마리는 평상시에는 상대방을 향해서 서럽게 울었다. (…) 전리품 중에는 강거 출신의 마술사도 몇 명 있었고, 호등무와 호선무를 담당한 십여 명의 남녀 배우와 오방사자무의 사자랑 배우도 있었다. 나무 상자 안에는 구자의 각종 악기가 실려 있었다."(327-328쪽)
"스승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을 제자가 그 뜻을 열어 주는구나.
화상은 나의 대승의 스승이고, 나는 화상의 소승의 스승이오"
불교는 논증이 치밀하다. 더욱이 구마라집이 동쪽에 처음 전한 대승 공 사상은 당시 중국 승려는 물론이고 소승 설일체유부의 승려가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연기법(緣起法)에 근거한 소승의 논리와 대승의 일체법개공(一切法皆空)의 논리는 완전히 다른 사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불교의 교리와 계율 등을 때론 역사를 약술하는 방식으로, 때론 논쟁하는 대화 방식으로, 때론 대소승 경전에서 관련 내용을 옮겨와 보여 준다. 그 중 구마라집이 소승에서 대승으로 개종할 때 대승 경전인 《아뇩달경》을 처음 배우며 눈앞에 드러나 있는 것이 실상(實相)인지 대승 포교자와 논쟁하는 장면은 치밀한 논증 과정을 보여 준다.(148-155쪽)
또 하나는 소승의 사부 반두달다를 대승으로 교화시키는 장면이다. 구마라집은 아홉 살에서 열두 살 무렵 당시 소승 불교의 메카였던 계빈에 유학해 서역에 이름이 높았던 소승 삼장의 거두 반두달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아함류 경전을 배운다. 이후 그는 대승으로 개종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금사자좌에 앉아 설법하라는 국왕의 권유를 물리치고 스승인 반두달다를 개종시키기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 소승을 대표하는 스승과 대승 공 사상을 서역에 널리 퍼뜨리는 제자의 논쟁은 소승과 대승의 차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구마라집은 비유를 들고 대승 경전을 널리 인용하면서 '일체법개공'의 깊은 뜻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모습은 성 안에서 벌이는 전투와 같았다고 한다. 서로 죽기를 각오하고 치고받는 듯했는데 일 개월여에 걸친 논쟁 끝에 열세에 놓인 달다는 점점 '성공(性空)'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203쪽)
구마라집이 "일체 모든 법은 결국 공"이라는 구절을 해석할 때 반두달다가 의문을 표시하며 구마라집에게 반문했다. "유위법은 생주이멸을 말하는데, 대승에 어떤 다른 것이 있어서 그대는 대승에 귀의하여 대승을 높이 받드는가?"
이에 구마라집이 답했다. "유위법의 사상(四相)은 가법(假法)에 지나지 않으며 실법(實法)이 아닙니다. 생주이멸은 때때로 변하고 자성이 없으니, 즉 《덕녀문경》이 말하는 인연·공·가(假) 등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승의 이치는 매우 깊어서 유법(有法)이 모두 공(空)임을 분명히 드러내는데, 소승은 유(有)에 집착하고 누실(漏失)이 많으니 그 때문에 대승은 숭상하고 높일 만합니다."
하지만 반두달다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그대가 말한 '일체 모든 법은 결국 다 공[一切諸法畢竟皆空]'이라는 것은 심히 두려워할 만하구나. 어찌 유법(有法)을 버리고 공(空)을 좋아할 수 있단 말이냐. 그 옛날 미치광이와 같구나.
"스승님의 비유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제법필경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의 무자성(無自性)을 지적한 것입니다. 법상(法相)의 상은 인연이 화합해서 생겨나는 것으로서 실체(實體)가 없습니다. 대승은 유로써 공을 증명하지만, 유는 비유(非有)이고 공상(空相)이고 가명(假名)입니다. 유는 속제(俗諦)이며, 대승은 속제로써 제일의제를 증명합니다. 제일의제가 바로 공입니다. …… (201-203쪽)
중국 장안에서 대승 공사상을 전파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구마라집은 "중국 땅에는 깊은 학식이 있는 자가 적어" 가장 중요한 중관학의 논서 번역도 뒤로 미루었다. 중국 승려들이 공사상에서 어떤 문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사례가 강남 여산의 호법보살로 유명한 혜원과의 서신 왕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들어왔다는 것이 전해지자 혜원이 편지를 보내 시작된 강남북의 서신 교류는 당시 중국의 불학 수용 상황과 구마라집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는 사료다.(18장) 오랫동안 이어진 구마라집과의 교신에서 드러나듯이 혜원은 물(物)이 그 자체로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중국 불교의 수준이 그러했다.
"아름다운 문채를 잃어버리면 …
번역은 밥을 씹어 남에게 주는 것과 같으니
맛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구역질나게 만든다"
불법은 경전으로 전해진다. 범어로 된 불경 논서 율장이 한역되는 시기와 종류를 보면 불교의 전파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구마라집은 장안 소요원과 초당사에서 십여 년 동안 삼백여 권의 불전을 한역했다. 그중 중국 불교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중론》 《백론》 《십이문론》 등 중관학 논서의 한역이다. 이 논서로 대승 공 사상이 중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또 《금강경》 《법화경》 《유마경》 《대품반야경》 《소품반야경》 등의 주요 대승 경전은 오늘날까지도 구마라집 역본이 다른 어느 역본보다도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다.
"문자는 죽이고 뜻은 살린다"고 하듯이, 문자에 구속되지 않고 뜻을 깊이 새긴 번역이 구마라집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 중국 불교의 저변이 아름답게 닦였다. 그 번역의 현장이 이 평전에서 재현되었다.
구마라집의 역장은 번역과 강경이 이루어지는 홍법의 장이자 학술 활동의 공간이었다. "구마라집은 호본을 들고 중국어로 읽어 내려갔다. 경전의 원문을 번역하는 한편으로 뜻풀이도 했다. 사실 역장의 의학 사문이 모두 번역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국왕 요흥은 직접 《대품반야경》의 옛 번역본과 새 번역본을 대조하면서 어느 곳이 나아졌고 어느 곳이 부족한지를 살폈다. 혜공, 승략, 승천, 보도, 혜정, 법흠, 도류, 승예, 도회, 도표, 도항, 도종 등 오백여 명이 반복해서 불전의 바른 의미를 토론하고, 번역문의 뜻을 심의한 후에야 정본(定本)을 써서 완성했다. 이처럼 폭넓은 참여와 엄숙하고 진지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이 진행되는 토론 속에서 번역 작업은 진정한 학술 활동으로 자리를 잡아갔다."(456쪽) "승려와 속인이 모두 경건하게 한 구절마다 세 번씩 반복하면서 그 뜻을 새기고 정밀하게 추구하면서 성인의 뜻을 보존하는 데 힘썼다."(602쪽)
구마라집 번역의 새로움은 역장의 규모, 걸출한 제자들, 어학 수준의 차이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구마라집이 범어와 중국어의 언어적 특성을 깊이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매우 중시하는데, 범문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를 잃게 된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한다"(480쪽)고 했다. 승조는 〈백론서〉에서, 구마라집이 "정본(正本)을 꼼꼼히 따져서 교정하고, 갈고 닦아서 소(疏)를 붙였는데, 논(論)의 종지를 보존하는 데 힘써서 질박하면서도 비속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반드시 종지에 나아갔다"(《출삼장기집》권11)라고 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공빈
상하이 푸단대학교 중문학과 출신으로 현재 화둥사범대학교 중문과 교수다. 오랫동안 중국 고대문학과 문화를 연구했는데 최근에 중고문학과 중고사회로 연구 범위를 넓혔다. 동진, 남조의 송나라 초기에 활동했던 시인 도연명을 좋아하여 그에 관한 저서가 다수 있다. 도연명(365-427)은 이 책의 주인공인 구마라집(344-413)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으니 저자의 관심이 위진 시대에 집중한 듯하다. 주요 저작으로 도연명 작품 주석서인 《도연명집교전(陶淵明集校箋)》, 세설신어 주석서인 《세설신어교석(世說新語校釋)》, 도연명 평론집인 《도연명전론(陶淵明傳論)》, 구마라집과 동시대 승려인 혜원의 전기 《혜원법사전(慧遠法師傳)》, 중국 시가의 역사를 다룬 《중국시가사화(中國詩歌史話)》 등이 있으며, 공저로 《중국고대문학사전(中國古代文學事典)》, 《중국고대산문삼백편(中國古代散文三百篇)》 등이 있다.
옮긴이 : 허강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중국 베이징영화학교에서 공부했다. 출판사에서 편집과 기획 일을 해왔고, 지금은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단행본 기획 및 저술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끝나야 끝난다》 《숫자의 법칙》 《해적왕 정성공》이 있으며, 발표한 글로 <역사, 그 드라마적 재연과 정서적 진실의 변주 - ‘제5공화국’의 경우>가 있다.
목 차
1 구자의 사리불, 구마라집이 태어나다
2 일곱 살의 사미승
3 총령을 넘어 계빈에 유학하다
4 부처님의 가사를 입고 설법하다
5 구마라집, 대승으로 개종하다
6 서역에 대승을 전파하며 명성을 떨치다
7 구자를 손에 넣으면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보내라
8 여광, 구자를 파괴하다
9 무도한 권력, 파계한 고승
10 구자에서의 마지막 나날
11 인욕과 침묵을 닦고 원한의 마음을 품지 마라
12 어둠에 갇힌 운명
13 서역의 고승 구마라집, 동방의 사미 승조
14 구마라집, 중원의 장안에 들어서다
15 한손에 범본 불경을 들고 중국어로 옮기다
16 구마라집의 걸출한 제자들
17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
18 불세출의 천재와 호법 보살의 대화
19 초기 선법의 대가 구마라집과 불타발타라
20 불경 번역의 역사를 다시 쓴 홍법 대사
21 몸은 재가 되어도 혀만은 남아
22 제자들은 흩어지고 벗들은 떠났지만
부록 구마라집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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