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이 책에 실린 43편의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삶’이 될 것이다. 저자 스스로 밝혔듯이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보다 주체할 수 없는 사랑으로 썼기 때문인지 우리는 어느새 저자가 소개하는 영화의 내면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영화의 내면은 알고 보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영화와 우리를 점도 높게 연결한 것은 당연히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다. 스스럼없는 고백과 치장하지 않은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에 이끌려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느낌에 휩싸인다.
영화는 현실이다
박명순의 영화에세이 『영화는 여행이다』는 영화 속으로 떠난 무전여행에 대한 기행문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저자는 “영화를 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놀이를 소비하기보다는 생산의 콘텐츠로 만들고 싶은 역발상이 크다.” 따라서 이 영화에세이는 영화와 실컷 놀긴 놀되 단지 여가 시간을 보내는 용도가 아니라 누군가를 만난 흔적을 남겨 저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는다. 다시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생각할 때, 영화는 가장 경제적인 문화 콘텐츠이다. 두 세 시간 영화에 온몸을 맡기는 순간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만남과 다양한 감정의 흔들림을 나는 고해苦海의 엑기스를 복용하는 것으로 여긴다. 세상과 소통하는 또 하나의 거울로서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간다.(17)
실제로 구체적인 영화를 보고나서 저자가 남긴 감상을 보더라도 이것은 명확하다.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폭력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임을 우리 현실에 빗대 말한다거나,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집 떠나는 엄마도 있지만, 현실에는 자식을 버리는 엄마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지운 무거운 짐을 더 이상 당연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감 등은 저자가 영화를 통해 실제 삶의 질감을 자꾸 더듬어 본다는 증좌가 될 것이다.
영화는 텍스트이다
이 책에는 총 43편의 영화에 대한 길지 않은 영화 감상문이 실렸는데, 전문적이 영화 평문이 아니라 문학도인 저자가 영화를 읽은 기록에 해당된다. 다시 「프롤로그」를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좋은 영화는 반복해서 읽는 것이 좋다. 한번으로 만족할 영화도 있지만 대부분은 두세 번 읽어야 폭넓은 감상이 가능하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수십 번 만나야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저자의 말이 있다. 박명순은 이렇게 영화를 하나의 텍스트로 마주한다.
빠르게 편집되는 장면들 속에 미자의 시가 흐른다. 여중생이 뛰어내린 강물과 그 다리가 클로즈업된다. 아네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소녀는 얼핏 슬픈 표정을 거두어들인다. 미자는 강물에 휘말려 떠내려가고 시의 화자는 미자와 소녀로 겹쳐진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누군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했다고 한다. 미자와 소녀와 함께 노무현의 웃음까지 겹쳐진다. 어쩌면 노회찬 의원의 잔영도…. 미자가 완성한 시를 읽어야 영화는 끝이 난다.(209)
이 글은 이창동 감독의 <시>를 보고 쓴 것인데, 영화 텍스트와 현실이라는 텍스트는 묘하게 겹쳐진다. 이렇게 겹침의 효과를 통해 ‘시’에 대한 느낌을 갖게 한다. 시에 대한 어떤 정의를 내린다거나 시적 표현과 이미지를 차용했다는 뜻이 아니다. 영화의 이미지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선을 “미자가 완성한 시”에 연결시키면서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뜻이다. (인용한 문단 다음에 이어지는 시는 생략.)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영상 문화에 맹목적으로 함몰되지 않겠는다는 의지도 내포한다. 저자가 영화를 읽으며 저자 자신의 과거와 현실을 겹쳐 놓는 시도를 자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세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영화를 영화로만 보지 않는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박명순이 이 에세이집에서 하는 일은 영화에 대한 전문가적인 소견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주체 못할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는 공부이다
영화 읽기를 여가 시간을 선용하기 위함만이 아니고 “공부나 생각할 거리”로 삼는 것 또한 저자의 영화를 대하는 자세이다. “부드럽게 어루만져주거나 위로하는 영화도 좋”지만 “때로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영화도 마찬가지로 좋아한다”는 저자의 고백도 있지만, 영화 속 인물을 통해 자신의 지적 욕망을 고백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은 그 고백의 진실성을 밑받침하고 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버려진 책으로 독서를 하고 소양을 쌓으며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욕구를 채워나가는 조제를 생각하면서 뭉클해지는 시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나듯이 한계에 갇힐수록 갈망은 더욱 강렬해져간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기 때문이다.(163)
이렇듯 저자는 영화를 통해서 뜻밖의 공부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가족의 의미와 지난 시간의 일들을 반추하는 것도 공부이지만, 영화를 통해 여성의 현실을 새로이 깨닫게 되는 경험을 갖기도 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현실이면서 읽어야 할 텍스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읽는다는 것은 읽는 이의 사유를 촉발시킨다. 읽는 일은 이론과 개념을 접어두고 읽는 이가 처한 여건과 현실을 새로이 해석하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음미는 인간만이 가진 이성 활동임에도 그것을 작동시키지 않는 것이다. 영화를 읽는 일! 이것은 영상 문화가 압도적인 시대에 갖추어야 지적인 태도이며 덕이다. 이것을 박명순은 지금껏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 흔적의 일부를 이 책에 남겼다.(’추천사’ 중)
작가 소개
조치원 신흥동 건어물 가게 8남매 중 맏딸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종촌 싯골 과수원집에서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을 보냈다. 공주사대 재학 중 연극반 ‘황토’ 주변 멤버로 활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두 번 받은 후 미발령 교사로 분류되기도 했다. 30년 세월 국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채만식의 페미니즘』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공주대, 순천향대 등에서 대학 강의를 했고 검인정 교과서 「비유와 상징」 집필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작가마루』를 통하여 늦깎이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산문집 『아버지나무는 물이 흐른다』와 문학평론집 『슬픔의, 힘』을 출간했다.
목 차
023·아버지나무는 물이 흐른다―참새들의 합창
030·이별이 주는 선물―굿’ 바이: Good & Bye
036·쿵따리 샤바라 빠빠빠―세 얼간이
042·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케빈에 대하여
051·모드 루이스의 평범한 마술 이야기―내 사랑
057·아버지의 자존감―자전거 도둑
062·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라따뚜이
067·늙음과 젊음을 합체하는 발칙한 욕망―수상한 그녀
075·‘가족애’의 빛과 그림자―마농의 샘
081·집의 무게와 가족의 굴레―길버트 그레이프
086·영화관을 찾는 호사스러운 외출이 좋다―신과 함께―죄와 벌
091·불가능한 꿈을 꾸는 영화―웰컴 투 동막골
096·엄마 찾아 삼만 리―우리는 형제입니다
102·빌리 엘리어트의 춤에는 함께 비상하는 조력자의 꿈이 있다―빌리 엘리어트
106·웃기는 자식이 되고 싶어요―두근두근 내 인생
111·‘똥주샘’을 만나지 못했다면―완득이
116·나를 만나는 음식 여행―리틀 포레스트
122·또 하나의 대안 가족을 찾아라!―굿바이 싱글
126·독박 육아와 모성애의 불편한 진실― 미씽: 사라진 여자
132·코미디 영화와 살인의 몽타주―조용한 가족
138·전쟁은 가해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반딧불이의 묘
144·집으로 가는 길을 잃고 살 때가 있다 가끔―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150·너의 잘못이 아니다―굿 윌 헌팅
155·전설이 된 사랑 이야기―가위손
161·자유와 사랑과 행복은 공존할 수 있는가―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165·첫사랑과 마지막 사랑―산사나무 아래/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170·<화양연화>는 첫사랑처럼 발칙했다―화양연화
177·<신세계>는 유혹이다―신세계
181·친절하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우리들―헬프
189·세 여자 이야기―히든 피겨스
193·늙은 남자의 마지막 사랑―오베라는 남자
198·사막의 오아시스를 꿈꾸며―바그다드 카페
204·이창동을 만나는 시간은 특별하다―시
212·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노무현입니다
219·에디트 피아프의 불꽃 같은 생애―라 비 앙 로즈
223·멕시코에서 프리다 칼로의 파란 집을 만나고 싶다―프리다
229·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보는 시간들―모던 타임즈
234·불꽃 같은 삶과 혁명가의 사랑―박열
238·최초의 트랜스젠더는 누구였을까―대니쉬 걸
245·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동주
249·시멘트 틈에서 피어나는 노란 민들레처럼―아이 캔 스피크
255·30년 전, 강산이 세 번 바뀌다―1987
262·산 자와 죽은 자로 구분 짓는 사진 한 장― 화려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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