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등단 30년 만에 내놓는 네 번째 시집
견고한 고독의 세계에서 새어나오는 절박한 신음
오로지 ‘직진 인생’을 살아온 이의 내면은 어떠할까. 잠시 멈춰 서거나 곁눈질하거나 뒤돌아보는 일 없이 정면만을 응시한 채 주어진 길을 걸어온 고독한 시인이 여기 있다. 바로 조현석 시인이다. 기자로, 편집자로, 출판사의 대표로 언어를 다루며 살아온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사회인으로서 치열하게 글과의 사투를 벌여 왔다.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등단한 스물다섯 살의 청년은 그새 3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기고 네 번째 시집 『검은 눈 자작나무』를 출간하게 되었다. 등단 30년 동안 출간한 시집이 고작(?) 네 권이라니, 요즘 같은 세태에 어울리지 않는 행보다. 작품에 대한 엄격한 자기검열이나 출판인으로서의 삶에 치여 늦었다는 핑계는 무의미하다. 세 번째 시집 이후 10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 시인은, 시와 생활의 경계에서 서 있는 자신의 시름을 그러모았다. 근 10년 만에 내보이는 사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집 『검은 눈 자작나무』는 오랜 시간 응축된 언어들이 터져 나온 만큼 절박하면서도 어딘가 모를 쓸쓸함을 전해준다. 시인으로서 조현석의 저력은 이미 등단작을 통해서 확증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시인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성찰을 수반하는 반성적 내면지향’의 시로 승화시켜 왔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의 등단작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 스케치」는 신춘문예 당선 우수시 100선에 선정될 만큼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시로 손꼽힌다.
감각적인 이미지와 감성적인 언어 분위기로 세련되고 독특한 시세계를 선보였던 조현석 시인은 이제, 빽빽한 빌딩 숲 어느 언저리에서 “오피스 코쿤족”의 신음처럼 토해 낸 시의 육성을 통해 고독한 도시인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의 시에서 묻어나는 절박함과 쓸쓸함은 바로 ‘고독’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고독 속에 침잠해 자폐적으로 치닫지 않고 도리어 부둥켜안아 시로서 견고한 ‘고독의 세계’를 빚어내는 조현석의 시를 만나 보자.
가장자리에서 형성된 견고한 고독의 세계
쉰, 인생의 반 바퀴를 달리고 잠시 숨을 골라야 할 나이. 시인은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가장자리에 선 중년 남성의 황폐한 내면을 더듬는다. 사회적 고독과 실존적 고독이 버무려진 가운데 시인은 가감 없이 감정의 실체를 드러내어 보인다. “지친다 슬프다 괴롭다 그리고, 외롭다고 모두 드러내지 아프다 마구 떠들어대지 결코 그렇지 않으면서 폭염(暴炎) 때문이라 여기지 연옥(煉獄)의 벽 지고 앉은 고독한 짐”(「고독의 주인」)이라고. 이는 ‘오십고개’를 넘어서는 ‘지금’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는 시인이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할 감정인지도 모른다.
지나온 시간의 구덩이는
눅눅하고 검고 깊다
화창한 창밖 세상을 거침없이
지나가거나 달리는 젊은이들
나 역시 찬란하던 그곳을
지나쳐 왔다 말할 수 있을까
주마간산(走馬看山)
눈 껌뻑거릴 반도 안 되는 순간들
허리 굽어지기도 전에
숨 가쁘게 오십고개를 올라선다
―「내일의 뿌리」 부분
단 한 번 뒤돌아보지 않고 직진 행로만을 따라 걷던 그는 어째서 돌연히 멈춰 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았을까. 생의 고독을 ‘견뎌 낼’ 힘이 소진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시인은 “창밖 세상을 거침없이 지나가거나 달리는 젊은이들”을 보며 “찬란하던 그곳”을 지나쳐 왔던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인으로 하여금 지나온 시간을 호출하게 하는 매개는 ‘젊은이들’뿐만이 아니다. 그는 “폐허처럼 적막해진 마을회관 건너편 세탁소”의 빨랫줄에 걸린 외투에서도 지나온 시간의 흔적을 발견한다. 오십고개를 넘는 시인의 내면에 침투한 과거의 시간들은 ‘지금-이곳’의 삶을 뒤흔들며 더욱 짙은 고독을 형성해 낸다. 그리하여 그의 고독은 이내 하나의 세계가 되어 그라는 존재를 둘러싼다.
조현석의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정서는 ‘고독’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도시에서 느끼는 고독, 현재적 불행으로 인해 모든 소중한 것들은 과거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느끼는 고독,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세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단한 노동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년 사내의 고독 등이 겹쳐져 견고한 고독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해설, 「모든 것의 가장자리」).
생에 도사리는 ‘불안’ 감각의 기원
생성보다는 상실, 상승보다는 하강이라는 단어에 가까워지는 중년에 이르면 어쩔 수 없이 자주 떠올리게 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죽음’이다.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죽음은 생의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 같아서 무시로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조현석의 시에 얼비치는 불안의 감각 또한 바로 그 죽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중년에 접어든 시인 역시 그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터, 그는 차라리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더욱 고독해지기를 택한다.
분주했던 오후와 헤어진 후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다
어두워지는 서쪽으로 점점이 날아간 새 떼 수만큼 돋아난 별들
검은 구름 뒤편 묵언 속으로 꼬리 감추며 사라지는 별똥별 하나
아무리 빠르게 눈길 뒤따르려 해도 그 흔적 찾을 수 없다
자정 무렵 들른 장례식장에서 누군가 탄생을 떠올리는 무모함이라니
수백, 수천 번의 이별 후 겨우 한 번 더 더해진 가슴 속 절벽으로 추락
이별을 습관처럼 견디고 견뎠으니 헛웃음 한 번으로 담담할 때 되지 않았나
가로등 스러져 그림자마저 지워져 돌아오는 도시의 뒤안길
만남과 이별은 자웅동체라 외롭지 않아 치유의 핑계가 좋다
―「치유의 핑계」 전문
그는 누군가를 영영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도시의 뒤안길에서도 “만남과 이별은 자웅동체라 외롭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고독한 걸음을 옮긴다. ‘생존’과 ‘생활’의 차이를 잊은 채 ‘출판노동자’로 살아온 수십 년,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뒤돌아볼지언정 행선지를 바꾸지 않고 원래 걷던 그 길을 향해 하염없이 직진할 뿐이다. 회피하지 않고 ‘견뎌 내는’ 것, 그것이 곧 ‘살아 있는’ 것이며 ‘살아가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5년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를, 1992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 스케치」로 등단했다. 중앙일보 출판국 문예중앙과 월간중앙, 경향신문 편집국 ‘매거진X’ 팀에서 십여 년 넘게 기자로 근무했다. 시집으로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 스케치』 『불법, …체류자』 『울다, 염소』를 출간했다. 현재 도서출판 북인 대표이다.
목 차
시인의 말
1부 이별의 고고학
자코메티의 언어로
천수관음도
뒷모습
그 의자는 죄가 없다
노동절 백반 한 상
시리우스를 애도하다
쉰
너무 즐거운 불면
갯벌의 첫 새벽
그림자의 눈
보름달은 60촉이다
우는 팝콘들
책 읽는 법
아침의 독서법
라일락에 갇히다
2부 검은 눈 자작나무
거짓말들의 세계
페이스북에서 놀다
검은 눈 자작나무
모나미153 검정 볼펜
오십견
되돌아오는 비
액자 뒤에서
고독의 주인
산그늘 눈빛
꽃무늬 홑이불
침묵의 기억
천년만년의 속죄
들숨날숨
이별의 고고학
고흐를 위한 변명
3부 사막을 읊다
낡은 신발
물랭루주 물랭루주
액땜
일침(一鍼)
빙장(氷葬)
정사품
합창
한겨울밤의 꿈
사막을 읊다
속도의 재발견
여름과 헤어지는 방법
눈치
미리내
마그리트, 당신 말이야
샤갈의 닭
4부 치유의 핑계
불편한 밥상
일용할 양식
울컥
치유의 핑계
내일의 운세
둘코락스
별스런 다이어트
어떤 망년회
울게 하소서
밥 한 공기의 희망
붉은 달
내일의 뿌리
더스트 인 더 윈드
불타는 책
세도나에 서다
해설 | 고봉준(문학평론가)
모든 것의 가장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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