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그곳들엔 특별한 내가 있었다.”
느린 여행이 남긴 장면들,
그리고 생각의 조각들
그는 자신의 천성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따라 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자신의 친구로 삼았으며, 모든 소녀들과 여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살았다.
_『크놀프(민음사)』,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초기 작품 『크놀프』에는 고독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주인공 ‘크놀프’가 등장한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결혼, 직업 등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고, 언제나 새로움을 찾아 방랑하는 인물이다.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그렇기에 평탄하지 않게 살아가는 크놀프의 삶. 이를 쉬 좇지는 못하지만, 누구나의 가슴 한구석에는 그와 같은 삶을 꿈꾸고 동경한다.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러면서 우리는 현실의 안정과 방랑에 대한 동경 사이의 타협점으로 ‘여행’이란 대안을 찾곤 한다.
최근 재출간된 『오늘이 너무 익숙해서』의 서제유 작가 역시도 마찬가지다. 기존과는 다른 삶을 꿈꾸면서도, 당장 오늘은 밤새워 경제활동을 하며 여러 사회관계 속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이 책은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그녀가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했던 20대 초반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낯선 여행지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들과 그때의 생각들을 엮은 것이다.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 속에서 사진과 글로 기록된 그녀의 이야기들은 여행자든 아니든 많은 독자들에게 큰 공감과 울림을 준다. 당장 떠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희로애락이라는 삶은 비슷하게 주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 책은 5년 전 출간된 바 있으나, 안타깝게도 2년 만에 출판사 폐업으로 절판되는 불운을 겪었다.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젊은 독자층으로부터 열렬한 공감을 얻고 있었기에 더욱 아까운 책이었다. 이 책 속 구절들이 여기저기 회자되면서 출처를 물어가며 중고서점과 헌책방을 기웃거리는 독자들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책의 재출간으로 많은 이들의 갈증이 해소될 것은 물론이다.
저자는 5년 전 썼던 자신의 글들을 차근차근 손보았다. 기존의 글 가운데 다소 작위적이거나, 좀 더 잘 사는 것처럼 꾸미려 했던 것들은 이번 개정판에서 빼거나, 솔직하게 고쳐 썼다. 그리고 한 장(cahpter)을 더 추가하여 좀 더 느리고 깊어진 최근의 여정들 속 이야기를 담았다. ‘오늘이 너무 익숙해서’, ‘그곳에는 특별한 내가 있었다’, ‘나의 내일에도 당신이 있으면 좋겠다’,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런 날들이 이어져 여행이 된다’, ‘나는 여전히 느리게 걷는다’ 등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여행, 자아, 사랑, 관계, 인생, 그리고 이어지는 삶들’에 관해 기록했다.
“다녀올게.”
돌아올 곳이 있기에 고단함도 설렘이 된다
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사업체를 꾸려나가는, 꽤 잘나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그녀는 여행 속에서 일과 인생 전반에 새로운 영감을 주는 다양한 삶, 사물, 시공간을 만나왔다. 여행에서 우리는 새로운 타인뿐 아니라, 새로운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 이름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친구가 되는 데 중요하지 않기에 작가는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이들에게 먼저 이름을 묻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행 중에 만난 새로운 자신은 기존의 자신을 부정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보다는 익숙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만든 껍데기 안에 숨어서 언젠가 목소리를 내려고 준비 중이었던 ‘특별한 나’인 셈이다.
특별한 나를 만나고 싶은 그녀의 욕망은 이 책의 여러 글 속에서 드러난다.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낯설고 작은 마을에 무작정 내려, 그곳이 마음에 들면 살아보는 건 어떨지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왠지 그러면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고, 언젠간 진짜 그럴지도 모를 거라며 달콤 짜릿한 상상을 한다.
“다녀올게.”라는 말은 참 좋다.
어딜 가든, 얼마나 오래 걸리든
결국은 돌아온다는 말이니까.
나는 그래서 항상 “다녀올게.”라는 말로 여행을 시작한다.
_『오늘이 너무 익숙해서』 본문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마무리는 언제나 ‘따뜻한 나의 공간’이다. 언제든 돌아가면 자신을 반겨줄 사람들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나의 잠자리가 있는 곳. 작가의 말처럼 여행을 앞둔 전날 밤엔 두렵기도, 설레기도, 또 별일 아닌 듯 담담하기도 하다. 낯선 사람과 공간에 대한 두려움도 있겠지만, 자신이 누군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세계에 대한 기대가 공존한다. 그렇지만 결국, 여행이 이렇게 설렐 수 있는 이유는 떠남의 결말이 고단한 방랑자의 삶이 아닌, ‘다녀온다’는 낭만적이고 따스한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일요일일 수는 없지만
내일의 이름은 ‘여행’이기를
차츰 매일에 익숙해지고
그러면서 자꾸 용기 없어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언제든 마음을 털어 버리고
무작정 떠날 용기와 여유가 있기를.
오늘에 너무 익숙해져서
떠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없게 되기를.
-『오늘이 너무 익숙해서』 본문 중에서
과거에 작가는 멋진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 가족, 사랑, 자신의 행복까지도 잠시 미뤄둘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처음엔 여행마저도 디자이너는 많이 봐야 하는 직업이란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행을 하며 만난 여러 삶들을 통해서 점차 일상에서 배울 수 없던 것들을 알아갔다.
한 인도 청년으로부터 상대에게 돈 대신 꽃 한 송이를 건네는 것이 더 따뜻한 인사일 수 있음을, 가진 것 없고 학교도 다니지 않는 꼬마로부터 삶에 대해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배웠다. 또 피렌체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전신마비인 아내와 함께 여행하고 있는 남자로부터 진정한 행복에 대해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여행 중에 얻은 가장 빛나는 경험은 평소에는 마주할 수 없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대면할 수 있던 것이다. 처음엔 마치 남에게 민낯을 보인 것처럼 자신의 새로운 모습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점차 그로부터 기존에 익숙했던 자신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채워줄 수 있었다.
모두가 크놀프와 같이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살아가기엔 넘치는 용기와 벅찬 부담이 뒤따른다. 대신 오늘이 너무 익숙해지고, 다가올 내일이 너무 버거운 우리들을 위로한다. 그녀도 언젠가 떠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의 자신을 버티고 있다고 말이다. 가끔은 우리에게 여행이라는 이름의 내일이 찾아올 테니.
작가 소개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느린 여행 애호가. 틈날 때마다 글도 쓴다. 어린 시절, 공간에 대한 감정이 유독 깊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이사를 했고, 자신의 방이 생긴 일이 기억 속에서 또렷하다. 어느 날인가 연습장에 네모를 그리고 이런저런 사각 입체 모양들을 채워 넣었는데, 그게 첫 번째 평면도였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이 설계자인지, 인테리어 디자이너인지 몰랐다. 이런 끄적거림이 재미있어서 꿈이 되고, 직업이 되었다. 독립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할 정도가 되자, 도리어 직업을 써넣는 곳에 ‘디자이너’라고 쓰는 것이 망설여진다. 죽는 날까지 괜찮은 디자이너로 사는 게 꿈이라서 스스로의 기대치가 더 높아졌다.
디자이너는 많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핑계로 여행을 하기 시작했지만, 평소 일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 여행을 하며 느끼는 해방감에 중독된 듯하다. 여행을 시작하며 동아리에 들어가 카메라도 배웠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일상의 행복과 여행의 용기가 어우러진 삶을 더 동경하고 있다.
목 차
오늘이 너무 익숙해서
그곳에는 특별한 내가 있었다
나의 내일에도 당신이 있으면 좋겠다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런 날들이 이어져 여행이 된다
나는 여전히 느리게 걷는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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