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혜안을 가진 열 명을 포함한 천 명의 학자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한 명의 천재, 한 명의 발명가, 한 명의 창조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을 가진 사람은 몇 천 명이나 됩니다.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훌륭한 사람과 앞으로 훌륭하게 될 사람 들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듭니다."
-에곤 실레 <페슈카에게 보낸 편지,1910>
독자들로부터 은근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열두 개의 달 시화집이, 에곤 실레의 그림이 실린 에곤 실레 편을 끝으로 완간되었다. 2월편이자 시리즈의 완성본인 2월편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에는 겨울 끝자락의 감성이 묻어나는 에곤 실레의 그림 44점과 윤동주, 백석, 노천명 등의 시 29편이 실렸다.
28세에 요절한 오스트리아의 천재 화가, 에곤 실레
에곤 실레의 그림과 시로 만나는 내면의 세밀한 감성!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생을 사랑한다. 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심층으로 가라앉기를 원한다." -에곤 실레
에곤 실레는 1890년에 태어나 1918년에,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표현주의 화가이다. 도나우 강이 흐르는 작은 시골마을 툴른에서 태어났으며, 철도역장이었던 아버지 덕에 유복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실레가 15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병과 죽음으로 집안은 일순간에 무너져내렸고, 매독에 걸린 아버지가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며 죽어가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했다. 그래서인지 ‘성(性)’은 그의 인생에 각인되었고, 실레의 그림에는 자신의 뜨거운 성적 욕망, 삶과 죽음에 대한 열망과 공포가 드러나 있다.
실레는 오스트리아 최고의 미술학교를 다니다 고리타분하다는 이유로 자퇴했다. 열여섯 살, 역대 최연소 학생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영예롭게 입학했는데 말이다. 그 학교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다녔던 학교이기도 했는데, 이후 실레는 클림트를 직접 차이후 실레는 로운 입학이었으며, 겨우 열여섯 살이었는데 말이다. 학교를 그만둔 실레는 1907년 클림트를 만나게 되었고, 클림트는 젊은 화가에게 친절한 멘토가 되어 주었다.
. 오스트리아 최고의 미술학교였고 역대 최연소라는 영예로운 입학이었으며, 겨우 열여섯 살이었는데 말이다. 학교를 그만둔 실레가 당대 예술가 중 유일하게 존경한 인물은 클림트(Gustav?Klimt, 1862~1918년)였다. 그는 전통미술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며 ‘빈 분리파’를 창립한 수장으로 당시 빈 미술계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반골 성향으로 똘똘 뭉친 둘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으리라. 클림트는 선뜻 실레의 스승을 자처한다.
실레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져서, 그림을 사주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기도 하고, 모델을 주선해주기도 하였으며, 후원을 해줄만한 사람에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또 실레를 분리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비엔나 워크샵에도 소개하였다. 실레는 클림트를 스승 삼아 실력을 쌓아 나갔다. 하지만 곧 스무 살에 자기만의 그림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어린 소녀들을 그린 누드화가 문제가 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내 그림과 드로잉이 에로틱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에로틱한 그림도 언제나 예술이었다. 이제껏 에로틱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나 한 명인가?”?
죽어서까지 끊임없이 논란을 몰고다닌 그의 작품 세계를 '비틀림의 미학'이라 부르기도 한다.?에로틱한 누드화를 주로 그리기는 했으나, 그는 풍경화에도 재능이 뛰어났고,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15살에 그렸다는 그의 풍경화는 놀라움을 자아낸다.
열두 개의 달 시화집의 2월 편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는 에곤 실레의 그림과 시를 엄선하여 조화롭게 엮은 시화집이다. 노천명의 <고독>, 윤동주의 <길>, 변영로의 <이월 햇발> 등 겨울 끝자락을 노래하는 시와, 고독과 외로움을 표현한 실레의 그림이 감상의 격을 높인다. 매일 한 편의 시와 한 점의 그림을 느끼는 여유를 선사하는 시화집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윤동주
어둠에 별이 있다. 시인 윤동주의 세상은 어둠이었고 별이었다. 감수성이 남다른 그는 작은 바람에도 일렁인다. 윤동주는 시를 통해 상처입은 마음을 치료하게 한다. 현대인들이 잊고 사는 자신은 물론 삶을 돌아보게 하며 스스로의 회개와 반성의 시간을 만나게 한다. 어둠을 보면 우린 빛낼 줄 안다고 말했다. 윤동주는 바로 그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의 색을 짚어보게 한다. 나를 있게 한 오늘과 내일을 연계하며 삶을 승화시키는 바람 그리고 기원이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을 모이게 한다. 손에 손을 들던 그 바람을 아는 동주는 그대로 꽃을 만들고 별을 만들고 바다로 넘치게 했다. 오늘을 기억하고 아픔을 함께하며 모두의 내일을 만나게 할 “별 헤이는 시간”을 찾아 나서게 한다.
지은이 : 백석
1912년 7월 1일(음력 추정)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호에서 부친 백시박(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시인 백석(白石)의 외모는 한눈에도 두드러진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사진을 봐도 그의 모습은 매우 모던하다. 서구적 외모에 곱슬곱슬한 고수머리.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 그의 머리 모양은 참 특이하다. 1930년대에 그런 머리를 할 수 있는 감각이란 얼마나 현대적인가? 옛사람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는 시쳇말로 외모와 문학을 새롭게 디자인한 모던 보이이자 우리말의 감각을 최대치로 보여 준 시인이다. 본명은 기행(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백석(白石)으로 활동했다.
1918년(7세), 백석은 오산소학교에 입학했다. 동문들의 회고에 따르면 재학 시절 오산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929년 오산 고등보통학교(오산학교의 바뀐 이름)를 졸업하고 1930년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을 응모, 당선되어 소설가로서 문단에 데뷔한다. 이해 3월에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 선발에 뽑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한다.
1934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해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경성 생활을 시작한다. 출판부 일을 보면서 계열잡지인 ≪여성(女性)≫의 편집을 맡았고 ≪조선일보≫ 지면에 외국 문학 작품과 논문을 번역해서 싣기도 했다. 1935년 8월 30일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창작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 잡지 ≪조광(朝光)≫ 편집부에서 일한다.
1936년 1월 20일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한다. 1월29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발기인은 안석영, 함대훈, 홍기문, 김규택, 이원조, 이갑섭, 문동표, 김해균, 신현중, 허준, 김기림 등 11인이었다. 1936년 4월,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옮겨 간다.
1940년 1월 백석은 친구 허준과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라는 다짐을 하고 만주로 향한다. 1940년도에 들어와 백석은 한국 현대시 최고의 명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힌다. 시적 반경도 역사적·지리적·정신적으로 대단히 깊고 넓어지기 시작한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해 신의주에서 잠시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가 남의 집 과수원에서 일한다. 1946년 고당 조만식 선생의 요청으로 평양으로 나와 고당 선생의 통역 비서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김일성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강의했다고 전해진다. 그해 10월 ≪학풍≫ 창간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을 발표한 것을 끝으로 남한 정부가 월북 문인 해금 조치를 취한 1988년까지 그의 모든 문학적 성과와 활동이 완전히 매몰되고 만다.
한국전쟁 직후 백석은 평양 동대원 구역에 거주하면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외국 문학 번역 창작실’에 소속되어 러시아 소설과 시 등의 번역과 창작에 몰두한다. 1962년 10월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어 일체의 창작 활동을 중단한다. 1996년 1월 7일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지은이 : 김소월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
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
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지은이 : 한용운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0년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고, 그것을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1914년 4월에는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1919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불교계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3.1운동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석방된 뒤에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했다.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뜻으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지은이 : 홍사용
1900년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본관은 남양. 아호로는 노작, 소아, 백우 등이 있지만, 주로 '노작'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는 생후 100일만에 통정대부 육군헌병 부위를 지낸 아버지의 근무처를 따라 서울 재동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8세까지 살다가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그가 태어난 용인군 농서리에서 멀지 않은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 492번지로 이사하여 휘문의숙에 입학할 때까지 그곳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홍사용은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구금되기도 했다. 그 해 6월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수필「청산백운」과 시「푸른 언덕가으로」를 썼다. 수필「청산백운」은 휘문 교우 정백과 함께 쓴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홍사용의 최초의 작품이 되고 있다.
박종화, 정백 등 휘문 교우들과 함께 유인물 <피는 꽃>과 서광사에 <문우>를 발행한 것을 비롯하여, 재종형 홍사중을 설득하여 문화사를 설립,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를 기획했으나, <백조>만 3호까지 간행되었다. 그의 문단활동은 <백조> 창간과 함께 본격화되어 <개벽> <동명> <여시> <불교> <삼천리문학> 등과 같은 월간지와 일간신문에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30년을 전후하여 홍사용은 전국을 방랑하다 돌아와 자하문 밖에서 한방의학을 공부하여 만년의 생계를 삼았다고 한다. 8.15 해방이 되자 그는 곧바로 <근국청년단>을 조직하여 청년운동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지병인 폐환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7년 짧은 생애를 마쳤다.
지은이 : 권환
경남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에서 태어났다. 서울중앙중학과 휘문중학을 거쳐 제일고보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의 야마가타 고교에서 수학하고 교토제국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교토대학 재학 시절인 1927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지만 1929년 필화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피검되었다. 이때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경도되어 자신의 문학적 경향을 내재했다. 그리고 그해 조선으로 귀국해 카프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카프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된 그는 당시 카프의 예술대중화론에 입각한 혁명적 노동 의식을 전면적으로 주창했다. 그사이에 1931년 11월 20일 조성남(趙聖南)과 결혼을 했다. 이후 카프 1차 검거 시기 불기소 처분을 받으면서 폐결핵을 얻었다.
1946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조직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남북한이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 분단이 현실화하면서 좌익 문단의 분열과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문학가동맹의 문인들은 대부분 월북을 선택했다. 그러나 1948년 그는 마침 부친이 사망하고 자신의 병세도 악화되어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월북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산 완월동 작은 판잣집에서 폐결핵과 싸우던 시인은 마침내 1954년 7월 7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좌와 우, 그 대립의 근현대사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삶 자체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시인 권환은 이제 불우한 우리 근대 문학사의 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지은이 : 변영로
1898년 5월 9일(음력)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재동·계동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체육 교사와의 마찰로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가 평창 이씨 흥순과 결혼했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에 입학해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20대 때 중앙고보 영어 교사와 이화여전 강사를 했다. 1918년, ≪청춘(靑春)≫지에 영시 <Cosmos>를 발표해 천재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3·1 운동 때 독립 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1920년에 ≪폐허(廢墟)≫ 동인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장미촌(薔薇村)≫ 발행에 참여했다. 24세 때 ≪신민공론≫의 주필이 되었다. 25세 때인 1922년에 ≪신생활(新生活)≫ 4월호에 <달밤>과 <논개>를 발표했다. 1924년(27세)에 첫 시집 ≪조선(朝鮮)의 마음≫을 평문관에서 간행했다.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대학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동아일보사에 입사했으며 월간 ≪신가정(新家庭)≫의 주간이 되었다. 광복 이듬해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49세)로 부임했다. 1948년에 영문 시집 ≪Grove of Azalea≫를 간행했으며 서울시문화상(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해에 진해 해군사관학교 영어 교관으로 부임했다.
1953년에 ≪대한공론(大韓公論)≫사 이사장에 취임하고 영문 일간지 ≪Korean Republic≫을 주재·발간했다. 같은 해에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 초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20대 초반부터 시와 수필을 쓰기 시작한 변영로는 서울신문사 출판부에서 1953년에 수필집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을, 1954년에 ≪수주수상록(樹州隨想錄)≫을 간행했다. ≪명정사십년≫에 수록된 수필은 대부분 1949∼1950년에 걸쳐서 ≪신천지≫에 연재된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 무류실태기(無類失態記)>와 한국 전쟁 때 부산 피난 시절 ≪민주신보≫에 연재된 <남표>를 중심으로 해서 엮은 것이다. 대주가(大酒家)라는 별명으로 불린 수주가 40년간 술에 취해서 살아온 경험담을 풀어 놓은 수필은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며 기지 넘치는 필치에 힘입어 연재 중 큰 인기를 끌었다. 이어 나온 ≪수주수상록≫은 자화상, 신변잡기, 인물 인상기, 세상 이야기, 문단 비화 등을 모은 수필집이다.
195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제27차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59년에 제2시집 ≪수주 시문선(樹州詩文選)≫을 경문사에서 간행했다.
수주는 1961년 3월 14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51의 2 자택에서 지병인 인후암으로 작고했다. 선산인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313번지 묘소에 묻혔다. 묘소 앞 시비에 <생시에 못 뵈올 임>이 새겨졌다.
지은이 : 윤곤강
1911년 9월 24일에 충남 서산군 서산읍 동문리 777번지에서 부친 윤병규(尹炳奎)와 모친 김안수(金安洙)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아호 ‘곤강(崑崗)’은 천자문의 “금생려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崑崗)”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930년에 일본 센슈(專修)대학에 입학해 ≪시인춘추(詩人春秋)≫로 활동하던 그는 1931년 11월에 종합지인 ≪비판(批判)≫(7호)에 <녯 성터에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이 ≪비판≫을 비롯해서 ≪조선일보≫, ≪우리들≫, ≪중앙≫, ≪조선중앙일보≫ 등에 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1933년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신계단(新階段)≫(8호)에 평론 <반종교문학의 기본적 문제>를 발표해 시뿐만 아니라 비평 활동도 같이 한다. 1934년 2월 10일 현실 비판적인 작품 활동을 해 오던 윤곤강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인 ‘카프(KAPF)’에 가입한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7월에 전북 경찰부로 송환되었다가 장수(長水)에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12월에 석방된다. 당시 수감 생활의 모습은 그의 시 <향수 1>, <향수 2>, <향수 3>, <창공>, <일기초>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처음으로 소설 <이순신>을 ≪형상≫(1호)에 발표한다. 이후 그는 충남 당진읍 유곡리로 낙향했다가 1936년에 상경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다.
1937년에 서울의 사립학교인 화산(華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그의 첫 시집 ≪대지(大地)≫(풍림사)를 발간하게 된다. 이듬해에 제2시집 ≪만가(輓歌)≫(동광당서점)를 펴낸다. 그리고 1939년에는 제3시집 ≪동물 시집≫(한성도서주식회사)을 발간하게 되고, 다음해에 제4시집 ≪빙화(氷華)≫를 출간하는 등 4년에 걸쳐 시집 네 권을 펴내는 왕성한 모습을 보여 준다. 1943년에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학교 전신)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그는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 시부회(詩部會) 간사로 임명되기도 한다. 1944년 동거하던 김원자와 사별하게 된 그는 충남 당진읍 읍내리 368번지로 낙향한다. 이 시기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면 서기로 근무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상경한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카프에 가담해 식민지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출하던 작품 세계가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모교인 보성고보 교사로 근무하게 되고, 이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을 탈퇴한다. 이 시기 문우들과 함께 해방 기념 시집인 ≪횃불≫을 발간한다. 1947년 그는 성균관대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편주서인 ≪근고조선가요찬주(近古朝鮮歌謠撰註)≫(생활사)를 펴낸다. 1948년에 중앙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고독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 준다. 제5시집 ≪피리≫(정음사)와 제6시집 ≪살어리≫(정음사)를 펴냈으며, 김기림의 ≪시론≫에 이어 두 번째로 시론집 ≪시와 진실≫(정음사)과 찬주서 ≪고산가집(孤山歌集)≫(정음사)을 발간한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50년 1월 7일 서울 종로구 화동 138-113번지에서 작고하게 되고, 충남 당진군 순성면 갈산리에 안장된다. 제주 조각공원과 보성고교, 그리고 충남 서산시 서산문화회관과 그의 묘소 입구 등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지은이 : 노천명
1911년 9월 1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전택면(專澤面) 비석리(碑石里)에서 출생한다. 본래 이름은 항렬자를 따른 기선(基善)이었으나,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소생한 후 하늘의 명(天命)으로 살았다는 의미로 이름을 고쳐 올렸다고 한다. 아버지 노계일(盧啓一)은 무역업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은 소지주였으며, 어머니 김홍기(金鴻基)는 서울 태생의 양반 가문 규수로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1917년 일곱 살 때 장연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친정인 서울로 이주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낯선 환경으로의 변화는 이후 노천명 문학에서 드러나는 ‘향수’의 근원이 된다. 1920년에 비로소 서울 생활의 근거지(창신동 81번지 2호)를 정하고 진명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해 1926년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4년간의 여고보 생활 동안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이미 이 시절부터 시작(詩作)에 능했으며, 몸이 약한데도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다. 성격은 예민한 편으로 특히 자존심이 강했으나, 평생 지우 이용희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겨울 모친이 57세로 죽는다. 이화여전 재학 중에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의 가르침 속에 시작(詩作)에 집중해 교지를 비롯해서 ≪신동아≫ 등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노천명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시원≫ 창간호(1935. 2. 10)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1937년 조선 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연길 등을 여행했으며, 1938년 49편의 시를 수록한 ≪산호림(珊瑚林)≫을 자비 출판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한다. 이화여전 은사들인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과 남산의 경성 호텔에서 화려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으며, 진달래빛 옷을 곱게 입고 참석한 노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 ‘앨리스 메이넬’로 불린다. 이후, 다시 조선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여성≫지의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1942년부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시를 창작하고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한다. 1945년 29편의 시를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이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간행된다.
해방 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이어지면서 노천명은 문화부에 근무한다. 1947년 노천명의 형부 최두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이어 극진히 사랑하던 조카딸 최용자마저 맹장 수술 후 스물두 살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 특히 각별한 사이였던 최용자의 죽음은 깊은 슬픔과 허망함을 주는 사건이 된다. 이러한 면면들은 여러 편의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48년 10월 38편의 수필이 수록된 첫 번째 수필집 ≪산딸기≫가 정음사에서 간행된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 시인 전집≫ 제2권에 55편의 <노천명집>이 수록된다.
한국 전쟁기는 노천명에게 큰 시련이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노천명의 부역 행위는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이 선고되어 노천명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부산으로 이감된다. 김광섭 등의 구출 운동으로 1951년 4월 출옥하게 되며, 가톨릭에 귀의하고 공보실 중앙 방송국 촉탁으로 일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은 노천명에게 일생의 굴욕으로 다가왔으며 옥중의 심정은 여러 시편으로 형상화된다. 1953년 3월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간행된다.
1954년 7월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를 출간하고, 1955년 12월 ≪여성 서간문 독본≫을 출간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1956년 5월 ≪이화 70년사≫를 간행하는데, 이 일에 몰두했던 노천명은 건강에 무리가 온다. 결국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거리에서 쓰러진 노천명은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한다. 재생 불능성 뇌빈혈 판정을 받고, 요양과 입원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종로구 누하동 225번지의 1호 자택에서 운명을 다한다. 노천명의 장례는 6월 18일 천주교 문화회관에서 최초의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이헌구가 식사를, 오상순, 박종화, 이은상, 김말봉이 조사를, 최정희가 약력을 소개하고, 전숙희는 유작을 낭독했으며,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에 천주교 묘지 이전으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으로 이장되었는데, 묘비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고, 서예가 김충현이 시 <고별>의 일부를 새겼다.
사후 1년에 42편이 수록된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가 한림사에서 간행되고, 1960년 12월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 등의 발행으로 노천명의 3주기를 기념한 ≪노천명 전집 시편≫이 간행된다. 또한 1973년 3월 시인의 유족이 주선하고 박화성이 서문을 쓴 수필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서문당에서 간행되며, 1997년 7월 이화여자대학교 문인 동창회와 시인의 유족, 솔 출판사가 힘을 합해 노천명의 시와 산문(유고 포함)을 수록한 ≪노천명 전집≫1, 2권이 간행된다.
지은이 : 장정심
시인. 1927년경부터 시작을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잡지 《청년(靑年)》에 발표하면서부터 등단했다.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맑고 고운 서정성의 종교 시를 씀으로써 선구자적 소임을 다한 여류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지은이 : 정지용
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으로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시단 활동은 김영랑과 박용철을 만나 시문학 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搖籃同人)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유학 시절 『학조』, 『조선지광』, 『문예시대』 등과 교토의 도시샤대학 내 동인지 『가(街)』와 일본시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런 작품 활동이 박용철과 김영랑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시문학동인을 결성하게 되었다. 첫 시집이 간행되자 문단의 반향은 대단했고, 정지용을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아 ‘지용의 에피고넨(아류자)’이 형성되어 그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이런 시적 재능과 활발한 시작 활동을 기반으로 상허 이태준과 함께 『문장(文章)』 지의 시부문의 고선위원이 되어 많은 역량 있는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유작으로는 『정지용시집』(1935), 『백록담(白鹿潭)』(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文學讀本)』(1948), 『산문(散文)』(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지은이 : 조명희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는 1894년 8월10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선비이며 학자인 아버지 조병행과 연일 정씨 어머니 사이에서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경덕(景德), 호적명은 명희(明熙), 애칭은 칠석이었다.
네 살 때 부친인 조병행이 죽고 난 후, 조명희는 둘째 형 조경희 집에 머물며 어머니로부터 한글을 배우고, 서당에서 한자를 배우기도 했다. 진천소학교에 다니며 열네 살에 충북 서산에 사는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인 민식(閔植)과 혼인을 하게 된다. 1914년 한여름,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었던 조명희는 북경사관학교로 떠나려다가 평양에서 둘째형 경희에게 잡혀 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 시기에 다양한 신소설을 읽었고, <홍루몽>, <삼국지> 등 많은 중국 소설도 접하게 된다. 특히 ≪매일신보≫에 연재되던 민우보 역의 ≪희무정(噫無情, 레미제라블)≫에 빠져 지냈으며, 이광수의 ≪무정≫ 등 근대 소설과 ≪태서문예신보≫, ≪창조≫, ≪삼광(三光)≫ 등 근대 잡지를 접하게 되면서 ‘문예’에 눈뜨게 된다.
1919년 3월 초, 3·1 만세 운동을 하다가 유치장에 갇히고 난 후, 조명희는 5년간의 고향 생활에서 벗어나 일본 도쿄로 가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입학한다. 경제적 사정과 언어 소통, 문화 차이의 어려움을 겪으며, 학비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괴테를 읽고 타고르와 하이네를 읊었다. 친하게 지내던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1920년 봄 도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근대극 연극 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창설한다. 1921년 여름에는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의 전국 순회 연극단의 공연 작품으로 조명희가 쓴 <김영일의 사>가 채택되어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 연극 대본은 한국 근대 문학 최초의 창작 희곡으로 가난한 도쿄 유학생의 비극적 삶을 그린 조명희 자신의 자전적 작품이다.
친구들과 연극 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명희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3년 반 만에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 다음 해에 상경해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고, 노적(蘆笛)이라는 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출간하게 된다. 일본에 가기 전 고향집에서 썼던 시들과 도쿄 유학 시절의 시들을 모은 이 시집은 근대 문학 사상 개인 창작 근대 시집으로서는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 이학인의 ≪무궁화≫에 이어 세 번째에 해당한다.
1925년 8월에 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서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조명희는 ≪개벽≫에 <땅속으로>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문인 생활을 시작하고 1927년 7월 ≪조선지광≫에 단편 <낙동강>을 발표하면서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선구적 작가가 된다. <낙동강>은 낙동강 어부의 손자이며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성운(농업학교 졸업, 군청 농업 조수)이 3·1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에 갇히더니, 출옥한 이후에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로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조명희의 경성 생활은 일제 식민 통치 속의 숨 막히는 압박감과 불안감, 헤어날 길 없는 가난으로 점철되었다.
1928년 8월 조명희는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이전의 서정시와는 다른 분위기의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조생’이란 필명으로 세상에 발표하게 된다. 이 시는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 의지를 담고 민족 해방과 계급 투쟁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후 조명희는 조선인 육성촌에서 조선어 교사로 있으면서 문예를 지도하며, 동화극 <봄 나라>, 동요 <눈싸움>, <샘물>과 같은 작품들을 쓰게 된다. 1930년 동료 교사인 황명희와 재혼하고, 우수리스크로 이사해 조선사범전문학교에서 조선어문학을 강의하게 된다. 당시에 그가 쓴 시, 소설, 정론, 평론 등의 작품들은 소비에트 조선 문학의 방향성을 보여 주었다.
1934년에는 작가 파제예프 추천으로 소련작가동맹 맹원으로 가입했으며, 연해주의 한국신문 ≪선봉≫의 문예면 편집을 자문하게 된다. 이듬해 하바롭스크로 이사한 후 조선사범대학의 교수로 재직한다. ≪선봉≫ 신문에 문예란을 만들고, 자신의 한글 및 문학 교육을 받아 창작된 한글 문학 작품들을 모은 ≪로력자의 조국≫을 출간하기도 했다. 당시 조명희는 블라디보스토크나 우수리스크 인근 연해주 또는 빨치산스크 등지에서 많은 제자들을 문학가로 길러 냈다.
1937년 장편소설 ≪만주 빨치산≫ 집필 도중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기관원에 연행되고, 가족은 스탈린의 ‘고려인 시베리아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만주 빨치산≫의 내용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조국(조선)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애국지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듬해에 소련 당국으로부터 일제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하바롭스크 현지 주르사 감옥에서 처형당한다.
1956년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정권 때,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회의는 1938년 4월 15일의 결정을 파기, 무혐의로 처리하고 조명희를 복권시켰다. 1959년 12월 10일에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에서 편찬한 ≪조명희 선집≫이 소련과학원 동방도서출판사에서 양장본으로 출간되었다.
1988년 한국 정부가 월북납북작가 작품을 해금 조치함으로써, 조명희에 대한 문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은이 : 크리스티나 G. 로세티
1830년 12월 5일 영국 런던의 샬럿 가 38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탈리아 중부 지방인 아브루초에서 런던으로 정치 망명한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레 로세티였고 모친은 바이런과 셸리의 친구이며 내과 의사이자 작가인 존 윌리엄 폴리도리의 여동생 프랜시스 폴리도리였다. 막내딸인 그녀에게는 두 명의 오빠와 한 명의 언니가 있었는데, 오빠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는 빅토리아조 후기 예술가들의 문예 운동인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를 결성하고 이를 주도적으로 이끈 화가이자 시인이었고, 또 다른 오빠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와 언니 마리아 프란체스카 로세티는 작가였다.
주로 낭만적인 시, 종교적인 시, 동시를 쓴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조숙한 감상력을 나타냈으며, 오빠처럼 시인 기질을 타고 났는데, 열두 살인 1842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빠 단테는 일찍이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해 시를 발표하도록 권고했는데, 열여덟 살인 1848년에 그녀는 ≪아테나 신전(Athenaeum)≫에 첫 번째 시를 발표했고, 그 후에는 “엘렌 앨런”(Ellen Alleyne)이라는 필명으로 라파엘 전파가 간행하고 오빠 윌리엄이 편집을 맡은 문학잡지 ≪기원(The Germ)≫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서른한 살 때인 1862년에는 그녀의 첫 시집이자 가장 유명한 시집인 ≪고블린 시장과 기타 시들(Goblin Market and Other Poems)≫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많은 비평적 찬사를 받았으며 그녀를 당대 주요 여류 시인으로 확고히 서게 해 주었는데, 1861년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 죽고 그 이듬해에 나온 이 시집은 곧바로 그녀를 엘리자베스의 계승자로 열렬한 환호를 받도록 했다. 또한 환상적인 시, 동시, 종교시, 설교문, 논설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그녀에게 홉킨스, 스윈번, 테니슨 등도 찬사를 보냈으며, 후에 암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테니슨의 뒤를 이을 계관시인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1870년대 초부터 그녀는 고통스럽고 보기 흉한 그레이브스병(안구가 돌출되는 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걸려 고생했다. 그리고 1893년에는 유방암에 걸려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그 이듬해에 재발해 결국 1894년 12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생전에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 동물을 실험에 이용함으로써 학대하는 것, 미성년자를 창녀로 이용해 노동 착취하는 것 등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지은이 : 다이구 료칸
1758~1831. 에도시대의 승려이자 시인. 무욕의 화신, 거지 성자로 불리는 일본의 시승이다. 시승이란 문학에 밝아, 특히 시 창작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불교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섯 줌의 식량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말이 뜻하듯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무욕과 무소유의 최고 경지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료칸은 살아가는 방도로 탁발, 곧 걸식유행(乞食遊行)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일본 곳곳에 세워진 그의 동상 역시 대개 탁발을 하는 형상이다. 료칸은 떠돌이 생활
을 하면서도 시를 써가며 내면의 행복을 유지하며 청빈을 실천했고, 그의 철학관은 시에 그대로 담겨 있다.
지은이 : 고바야시 잇사
일본 에도 시대 활약했던 하이카이시(俳諧師, 일본 고유의 시형식인 하이카이, 즉 유머러스한 내용의 시를 짓던 사람)이다. 15세 때 고향 시나노를 떠나 에도를 향해 유랑 길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소바야시 지쿠아로부터 하이쿠(俳句) 등의 하이카이를 배웠다. 잇사는 39세에 아버지를 여윈 뒤, 계모와 유산을 놓고 다투는 등 어려서부터 역경을 겪은 탓에 속어와 방언을 섞어 생활감정을 표현한 구절을 많이 남겼다.
지은이 : 가가노 지요니
加賀千代尼. 1703~1775. 여성 시인. 원래 이름은 ‘지요조(千代女)’이나 불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지요니’라고 불린다. 나팔꽃 하이쿠로 친숙하다. 바쇼의 제자 시코가 어린 지요니의 재능을 발견하고 문단에 소개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그림 : 에곤 실레
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 빈 근교 툴룬에서 태어나 1918년 10월 31일 2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어릴 때부터 회화에 두각을 드러내어 16세 때 빈 미술학교에 조기 입학허가를 받아 미술을 배우지만 보수적인 학풍과 교수들과의 갈등으로 3년 만에 중퇴한다. 이후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향을 받아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극적인 양식의 그림을 그렸고, 클림트의 영향에서 벗어나 죽기 전까지 새로운 형태의 표현법을 마련하며 표현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의 주요 주제는 ‘인간의 실존을 둘러싼 모든 것들’ 혹은 ‘나 자신을 찾아가는 투쟁’이었다. 실레는 회화가 사람이 가진, 생이 가진 진실만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1914년 발발된 1차 세계대전 중 에디트 실레와 결혼한다. 그녀의 도움으로 첫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그녀가 독감으로 인해 임신한 채 세상을 떠나고 곧 그도 사망한다. 대표작에는 ‘자화상Self-Portrait’(1910), ‘죽음과 소녀 Death and the Maiden’(1915), ‘가족 The Family’(1918) 등이 있다.
목 차
2일.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_윤동주
3일. 숨ㅅ기 내기 _정지용
4일. 노래 - 내가 죽거든 _크리스티나 로세티
5일. 이월 햇발 _변영로
6일. 못 잊어 _김소월
7일. 잠 놓친 밤 _변영로
8일. 사랑하는 까닭 _한용운
9일. 슬픈 족속(族屬) _윤동주
10일. 하이쿠 _료칸
11일. 모란봉에서 _윤동주
12일. 여우난골족 _백석
13일. 비로봉 _윤동주
14일. 하이쿠 _고바야시 잇사
15일. 두보나 이백같이 _백석
16일. 십자가 _윤동주
17일. 산협(山峽)의 오후 _윤동주
18일. 목구(木具) _백석
19일. 하이쿠 _가가노 지요니
20일.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_홍사용
21일. 시계 _권환
22일.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_백석
23일. 기다리는 봄 _윤곤강
24일. 새벽이 올 때까지 _윤동주
25일. 팔복(八福) _윤동주
26일. 달 좇아 _조명희
27일. 이별 _윤동주
28일. 묻지 마오 _장정심
29일. 고독 _노천명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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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부담이 아닙니다. |
진행 상태 | 결제완료 | 상품준비중 | 배송지시/배송중/배송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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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태 | 주문 내역 확인 전 | 상품 발송 준비 중 | 상품이 택배사로 이미 발송 됨 |
환불 | 즉시환불 | 구매취소 의사전달 → 발송중지 → 환불 | 반품회수 → 반품상품 확인 → 환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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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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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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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잡화/수입명품 |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
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가전/설치상품 |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
자동차용품 |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
CD/DVD/GAME/BOOK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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