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어른 그림책이라는 새로운 장르
느림보는 그림책 전문 출판사이다. 지난 17년간 고독, 자유, 소통, 아름다움, 환경, 폭력, 죽음, 장애, 욕망 등 자칫 유아동이 접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담은 그림책을 출판해 왔다. 처음부터 0세부터 99세까지 그림책을 보는 세상을 목표로 창립한 출판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봇물처럼 터지는 정치·사회적 이슈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른만의 시대적 담론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장르의 그림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왜 어른에게 그림책을 권하는가?
그림책은 그림을 중심으로 함축적인 텍스트를 얹은 독특한 양식의 책이다. 소설이 긴 텍스트로 승부한다면, 그림책은 임팩트 있는 그림과 암시적인 텍스트로 단번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소설이나 시보다 전달력이 강해서 운동성도 뛰어나다.
이런 특징으로 외국에서는 어른도 그림책을 즐기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당연히 시장도 활성화되어 있다. 반면 우리에게는 '어른 그림책'이라는 장르가 낯설다. 온·오프라인 서점에도 카테고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른 그림책인 『새 옷』을 출판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혼란한 변화의 시대, 우리도 어른 그림책 장르가 가진 힘에 주목해야 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왜 지금『새 옷』인가?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더니, 오랜 시간 침묵하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목소리는 거칠고 격렬해서 누군가에게는 생경하고 낯설게 들렸다. 하지만 그만큼 여성 폭압의 역사가 길고 깊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먼지 속에서 잠자던 페미니즘이 거리로 뛰쳐나오고, 여혐이니 남혐이니 하는 극단적인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어느 새 남녀는 각을 세우고 대치하게 되었다. 집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논란은 계속되는 중이다.
이러한 혼란기에 페미니즘 그림책 『새 옷』이 태어났다. 『새 옷』은 신예 조예슬 작가의 첫 번째 작품집으로 여성의 각성과 성장, 연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그림 위에 간결하고 명징한 텍스트를 얹었다. 특히 『새 옷』은 그림책 고유의 특징인 상징적 일러스트레이션이 빛나는 책이다.
조예슬은 여성 억압의 도구를 ‘옷’으로 상징하고, 옷 속에 갇혀 고통 받는 여성의 정체성을 자연의 순수한 동물로 형상화한다. 옷에서 해방된 여성들은 자유롭고 건강한 자연으로 회귀하며 자연이 된 여성들은 그들을 억압해 온 견고한 장벽인간을 무너뜨리기 위해 힘차게 돌진한다.
작가는 여성들이 각성하고 함께 연대하는 일련의 과정을 『새 옷』의 중심부까지 빠른 속도로 이끌고 간다. 여성이 세대와 세대를 넘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어 ‘우리’가 되어가는 과정에 집중한 것이다.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거대한 동물의 무리는 오로지 한 곳을 향하고 있다. 억압의 주체인 장벽인간을 향하는 것이다. 화면 밖으로 거친 호흡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땀 냄새가 물씬 배어나온다.
숨차게 쇄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도도한 자연의 흐름을 보여준다. 마치 막혔던 강물이 이윽고 제 길을 찾아 순리대로 흐르는 모습이다. 인간이 초래한 재앙을 자연이 바로 잡는 모습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조예슬의 시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강렬한 장면이다.
네 옷은 여자야!
장벽인간은 수진에게 여자를 입힌다. 자유로운 새, 수진의 날개가 꺾인다. 더는 훨훨 날 수 없다. 곧 이름도 빼앗기고 목소리도 잃어버린다. 밤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수진.
다음 세대인 민주가 수진이 쓴 책을 발견한다. 그 책은 민주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민주의 삶도 수진의 세대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진의 책을 읽고 각성한 민주는 수진의 이야기를 품에 안고 세상 밖으로 뛰어오른다. 이제 민주는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민주는 빠르고 날렵한 치타이다.
수진과 민주의 에너지를 가득 품고 세상으로 퍼져나간 이야기는 다음 세대인 슬기에게로 향한다. 슬기 역시 옷 속에 갇혀 있었지만, 수진과 민주의 힘을 얻은 슬기는 스스로 옷을 찢고 나온다. 본성을 되찾은 슬기는 강하고 자유롭다. 슬기는 주변의 다른 이들을 각성시키며, 그들과 연대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해방시킨다. 그리고 오랜 세월 그들에게 억지 옷을 강요했던 견고한 존재를 무너뜨리기 위해 달려간다.
장벽인간의 실체는 무엇일까?
장벽인간은 남성에게서 생명을 얻은 존재지만, 이젠 남성의 힘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지녔다. 그는 인간에게 ‘여자’를, 또는 ‘남자’를 입혀 억압한다. 여성은 물론 남성도 억압하는 것이다.
장벽인간이 우리에게 새 옷을 입히는 순간, 우리는 본성을 빼앗기고 획일화된 구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누구에게나 각자 맞는 옷이 있는 법인데, 장벽인간은 기계적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옷을 입히고, 그 안에 갇혀 굴종하라고 강요한다.
장벽인간의 실체는 무엇일까? 남성도 피해자로 만드는 그것은 이미 남성이 아니다. 그것은 기형적으로 변이된 시스템에 불과하다. 인류사 이래 인간의 피와 땀과 눈물을 먹으며 끝없이 몸집을 불려오다가 스스로 통제 불능에 빠진 낡은 시스템일 뿐이다. 남성이 만들었지만, 남성도 파괴하는 불온하고 기형적인 시스템이다.
‘남자’를 입고 있던 지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정체가 보다 명확해진다. 지훈은 자신의 옷이 찢기는 순간에야 비로소 잃어버렸던 감각을 회복하고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해낸다. ‘남자’라는 갑옷이 너무 두꺼워 그동안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을 뿐이다. 섬세한 본성을 타고 난 그에게 강제로 입혀졌던 남자라는 갑옷!
각성한 지훈은 낡은 시스템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성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여성연대를 넘어 남녀 연대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이 지점에 『새 옷』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작가 소개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영국 Cambridge School Of Art에서 Children's Book Illustration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관심 주제는 여성, 외로움, 연대, 성장 등으로 『새 옷』은 그의 도전적인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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