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 읽는 조선 - 공간을 통해 본 우리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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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규장각한국연구원 엮음
출판사항글항아리, 발행일:2019/03/22
형태사항p.264 국판:22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67356057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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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격동의 조선, ‘도시’에 녹아들다
 조선의 향기가 가득 담긴 ‘도시’의 변모 과정을
 풍부하고 철저한 사료에 입각해 재현해내다

 한양, 하늘의 명을 받아 새 나라의 도읍으로
 개성, 망국의 백성 고려 유민들은 어디로 가오리까
 제주, 살아 있는 신화의 땅
 평양, 탐관오리의 대명사 평안감사의 명과 암
 원산, 화려했던 식민지 도시의 어두운 그림자
 경성, 수탈과 근대화를 품은 모순의 도시

『도시로 읽는 조선』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펴내는 총서의 열네 번째 권이다. 이 책은 역사 흐름이 새겨지는 장소로서의 공간을 이야기한다. 특정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 ‘공간’은 시간이 흘러 ‘장소’로 변모하고, 사는 이들의 애정이 스며든다. 이 책은 시간의 상흔과 삶의 족적이 각인된 도시를 탐구하여 읽는 이가 딛고 서 있는 현재의 공간에서 생생한 역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특히 한반도라는 지리 공간을 분할하고 있는 지역 또는 도시들이 어떻게 역사 속의 특별한 장소가 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 역사에서 언제나 첫손에 꼽히는 한양을 시작으로 전통문화의 ‘보고’인 전주, 천혜의 자연을 품고 조선의 학자들을 키워낸 변산, 살아 있는 신화를 보유한 제주,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조선이 처한 상황을 절절히 증언하는 인천, 일본인 거류지로 조성되었다가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변모한 원산, 식민지의 수부이자 근대화의 중심지가 된 경성 그리고 현재 북한의 심장부인 평양을 다룬다.
여기서 소개하는 아홉 곳의 공간에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북한 지역 세 곳이 포함되어 있다. 도시 공간을 거닐며 역사의 흔적을 느끼고 역사적인 장소들의 현재를 확인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도시를 여행하는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다른 여섯 곳은 물론이고 평양과 개성, 원산까지도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경험과 기억의 장소가 될 날을 기다리며, 이 책이 그날의 기쁨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 나라 조선의 도읍지 한양, 국가 갈등의 현안이 되다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즉위하며 조선이 건국되었다. 태조는 정도전을 비롯한 측근 관료들에게 국정 운영의 상당 부분을 위임했는데, 그 와중에도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바로 ‘한양 천도’였다. 왜 태조는 천도를 서둘러 추진했을까? 그 까닭은 고려 왕조가 500년 가까이 뿌리내렸던 개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면모를 일신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배극렴 등은 여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천도를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하륜은 송나라 학자 호순신의 지리 이론을 들어 계룡산 지역이 흉화凶禍를 초래하는 곳이라며 오히려 무악(현재의 신촌, 연희동 일대)을 추천했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서·북면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계룡산의 땅은 산이 건방乾方에서 나오고 물은 손방巽方으로 흘러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이 이른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치 못합니다.”

당시 관료 대부분은 한양이 아닌 개경 일대가 도읍지로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을 냈다. 태조는 관료들이 천도에 반대 입장을 취하자 크게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1394년 8월, 한양이 조선의 도읍지로 확정되면서 수도 건설 사업은 본격화되었다. 물론 1398년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2대 국왕으로 즉위한 정종이 잠시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1404년 10월 태종 즉위 이후 한양으로의 재천도를 추진했다.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한양이 새 나라의 수도가 되면서 개성은 ‘망국의 도읍’이 되었다. 고려의 충신들 또한 운명을 같이 하며 슬픔을 되새겼는데, 이들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두문동 72현’이다. 특히 조선 왕조가 두문동 충신들을 ‘충성의 화신’으로 부활시킨 이유는 정치적 함의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이들의 행위가 새로운 왕조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위험한 태도일 수 있지만, 사회가 안정된 후에는 망해가는 나라에 대해서도 충성을 다했던 태도를 부각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영조 16년 9월 1일자 기사에서 처음으로 두문동 일화가 언급된다.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주서 이회원이 아뢰었다.
“태종께서 과거를 베푸셨는데, 이 고을의 대족大族 50여 가家가 과거에 응하려 하지 않은 까닭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므로, 그 동리를 두문동이라고 했습니다.”
임금이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를 멈추도록 명하고, 근신들에게 말씀하셨다.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진다. 이제 부조현이라 명명한 뜻을 들으니, 비록 수백 년 뒤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 보는 것처럼 엄숙하게 하는구나.”
이에 승지에게 명하여 ‘고려 충신 대대로 계승하기를 힘쓰네勝國忠臣勉繼世’라는 칠언 1구를 쓰게 하고, 어가를 따르던 옥당과 승지, 사관으로 하여금 그 뒤를 이어 지어 올리게 했다.

영조가 신하들과 함께 이 시를 지은 것은 고려 충신의 태도를 본받아 충성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조가 신하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지 의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영조는 그 후에도 개성 두문동의 후손들을 등용할 방법을 찾거나 두문동 충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는 등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는 영조 이후의 국왕과 사대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두문동은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희대의 풍운아를 품은 천혜의 작은 반도 ‘변산’

전라북도 부안에 자리한 작은 반도인 변산은 아담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자연 풍광이 뛰어나 조선시대에도 사람 살기에 참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이 땅이는 학자를 키워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듯하다. 풍광이 좋은 곳에서 고요히 지내려는 사대부도 있었지만, 대부분 변산을 삶의 터전으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7세기에 학계의 문제적 인물이 이곳에 스며들었다.
세상사를 등지고 변산을 찾은 이는 허균이었다. 이 무렵 허균은 관료, 유자儒者들과 갈등을 빚으며 배척받고 있었다. 감정에 충실하며 불교와 도교를 넘나드는 등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여온 허균을 시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들을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 백성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하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은 태평스러운 듯 두려워할 줄 모르니 우리나라에는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견훤·궁예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백성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두려워할 만한 형세를 명확히 알아서 전철前轍을 고친다면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성소부부고』 「호민론」)

현재의 정치에 대한 준열한 경고를 담은 「호민론豪民論」과 조선의 지배질서를 비판하는 『홍길동전』은 이 시기에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비록 반년이 못 되어 변산반도를 떠났지만 이곳에는 17세기 반항아였던 허균의 숨결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낙원에 펼쳐진 성스러운 이야기, 신화의 섬 ‘제주’

사회에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유입되면서 신화는 미신으로 치부되어 우리의 삶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제주도에는 토착 종교의 신화들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이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문화도 남아 있다. 그중 대표적인 무속 신화는 ‘본풀이’다.
제주에는 마을 및 가정 단위 의례를 집전하는 무속인 ‘심방’이 있다. 이들은 제주 토착 종교 의례 때 신화를 수공하는데 이를 ‘본풀이’라고 한다. ‘본풀이’는 대개 신화의 주인공인 신이 모셔진 내력을 풀어낸 이야기이지만 결과적으로 신들을 통해 우주가 생성된 과정, 삶과 죽음의 문제, 세상과 인간의 속성 등 사람들이 오랜 세월 궁금하게 여겨왔던 주제를 포괄한다.
‘본풀이’는 제주 토착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제주 사람들에 의해, 제주 사람들을 위해, 제주에서 사용되는 말로 전해진 신화다. 이 때문에 특정한 지역의 신화라는 인상이 지배적이지만 큰 관점에서 보면 제주의 신화는 곧 한국의 신화다. 많은 학자가 제주 신화에는 한반도 육지에서 온 내용이 주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오히려 제주는 문화 변동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와 유교가 사람들의 종교생활을 압도했던 육지에 비해 무속 신화의 의례 형태가 더 잘 유지되었다.
끊임없는 변화의 산물인 제주 신화는 고려부터 조선 말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불교, 유교, 도교 등 여러 종교의 요소가 담겼고 중국, 일본 등 주변 국가의 신화 또한 수용되었다. 이 글의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빌려 신화를 ‘브리콜뢰르의 브리콜라주’라고 표현한다. 즉, 신화는 ‘치밀한 계획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손쉽게 사용 가능한 재료로 뚝딱뚝딱 물건을 만들어내거나 수선하는 잡역부(손재주꾼, 브리콜뢰르)의 손재주 작업 결과물(브리콜라주)에 가깝다는 것’이다.
제주도가 신화의 땅으로 불리는 이유는 제주 사람들이 신화를 ‘참’으로 믿고 삶의 지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한 해를 살아내면서 신화를 통해 신들과 교류하고 삶으로 재현한다. 예를 들어 제주에 존재하는 돼지고기 금기의 신화 또한 주민들의 삶의 지침이 되곤 한다.
최근 들어 신화를 삶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주민의 수가 줄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주에서도 신화가 약화되는 현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신화에는 ‘인간과 자연’, ‘영혼과 죽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역사적 시각이 생생히 담겨 있으며 더 늦기 전에 이 ‘살아 있는 신화’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절실하다.

“군사적 준비에 이해가 걸려 있으니 반드시 개항할 것”

이 책 후반부는 조선이 쇠퇴하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나타나는 공간적 변화들을 탐색한다. 그중 원산은 19세기 후반 인천과 더불어 개항장이자 일본인 거류지로 조성된 도시다. 원산은 1880년 5월 20일, 일본영사관 직원과 상인 등 200여 명이 도착하면서 원산항 시가지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1876년 2월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부산 다음의 개항지로 영흥만 부근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이곳에 왕릉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1877년 제1차 협상, 1879년 제2차 협상을 거쳐 일본은 마지막으로 문천군 송전리 아래에 있는 원산진을 개항지로 요구했다.

“일본 해군은 1878년 5월 영흥만 일대를 상세히 측량하고 원산진을 문천에 버금가는 개항지로 지목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이곳이 “무역에 긴요할 뿐만 아니라 근린국의 군사적 준비에 양국의 이해가 걸려 있다”고 하며 협상단에게 원산을 반드시 개항시키라고 지시했다. ‘근린국의 군사적 준비’란 곧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뜻했다. 이처럼 일본이 원산을 개항지로 고집한 것은 가상의 적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1879년 7월, 조선은 원산항 개항을 허가하고 일본인 거류지를 설치했다. 초기에는 다른 외국인은 거주할 수 없었으나, 1884년 조선과 영국이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최혜국 조항’에 따라 각국의 외국인이 개항장에 거류할 수 있게 되었다. 청국인은 1888년 4월 청국인 거류지가 따로 설치될 때까지 일본인 거류지에 함께 거주했다.
원산항이 발달하면서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해 유입되는 인구가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원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적전천을 기준으로 위쪽에는 일본인 거류지, 아래쪽에는 조선인 마을이 정착되었다. 공간의 민족적 분리가 이뤄진 것이다. 개항 초기에는 조선인 마을의 시장이 발달하면서 경제가 활성화되고 호황 산업이 등장했다. 그러나 강제 병합 뒤 시가지가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상대적으로 조선인 마을은 일본인 거류지에 종속되어 더욱 궁핍해졌다. 이렇듯 원산은 개항 이후 식민지 도시로 화려하게 성장했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조선인의 삶은 경제적 불평등과 가난 속에서 비참하게 쪼그라들었다. 이는 조선인에게 일본인에 대한 민족적·계급적 갈등을 부추기는 계기로 작용하여 훗날 항일운동의 배경이 된다.

‘바로 지금 이곳’ 모던 도시, 환락과 모순의 ‘경성’에 살다

 경성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 조선 왕조의 도읍지 한양을 대체하여 부른 이름이다. 식민지의 수부이자 근대화의 중심이 된 경성에는 오랜 도읍지의 흔적과 새로운 근대의 모습들이 섞여들었으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번잡한 서울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한 줄기와 근대화, 현대성의 구축이라는 또 한 줄기가 맞물리면서 경성은 모순의 공간으로 치환되었다. 경성은 과연 어떤 도시였을까?

“무엇보다 이 도시를 강하게 속박한 것은 자본주의의 물결, 상업화와 소비문화의 확산이며 빈부 계층 구조가 형성되면서 도시적 삶의 불균등과 불평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경성은 단순히 상층 일본인들과 하층 조선인들로 이분화할 수 없는, 복잡한 계층 구조를 형성한다. 조선인 가운데도 도시 중상류층과 빈민이 나뉘었고 이는 일본인도 마찬가지였다. (…) 경성은 급격히 ‘모던’해졌고, 이전의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와 ‘신인류’가 그 공간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한반도의 사람들은 근대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자본주의의 질서와 원리, 가치관의 충돌 속에서 당대인들은 ‘모던’이라는 말로 경성을 표현했다. 저자는 ‘모던’이라는 말이 현대적이라는 뜻의 보통명사가 아닌 ‘바로 지금 이곳’의 순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라 지적한다. 근대 또는 현대라는 말로 다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새로움에 대한 동경과 자본주의에 대한 당대인의 비판은 ‘경성’이라는 공간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다.
서울 출신 작가 박태원은 1936년, 소설 『천변풍경』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는 청계천의 사계절과 경성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다. 그런데 화려한 ‘모던’ 도시 경성의 이미지와는 달리 애달픈 삶들이 연달아 등장한다.

“그러나 넓은 서울 장안에서도, 그와 두 어린 것을 용납하여주도록 관대한 집은 드물었다. 수소문을 하여 사람 구한다는 집을 차례로 다녀보았으나,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이었다. 행랑것으로는, 서방이 없는 것이 흠이었고, 안잠자기로는 또 어린것이 둘씩이나 있는 것이 탈이었다. 그래, 만돌 어미가 기진역진한 끝에, 또다시 모진 마음을 먹으로 들었을 때, 그것은 또 무슨 생각으로선지, 그렇게 구박을 하여 내쫓아놓고, 지금쯤은 새로 얻은 계집과 재미나게 살고 있어야 옳을 만돌 아비가, 제 계집의 뒤를 쫓아 서울에 나타났다.”(4절 불행한 여인)

저자는 ‘기형적으로 재편된 식민지의 도시 공간들 안에는 저마다 다른 삶의 속도가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경성이라는 도시를 단순히 화려한 ‘모던’ 도시, 자본주의 근대 도시 혹은 제국주의 식민 도시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
이 책은 그 외에도 한반도를 가로지르며 여러 도시를 탐색해나간다. 전통문화의 ‘보고’라 칭하는 전주는 전라도의 감영 소재지이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행정도시다. 당시 이 지역을 순행했던 관찰사들의 기록을 통해 감영의 시설, 인적 구성, 문화 그리고 경제 규모 등 지방 행정의 전반을 파악할 수 있다.
1914년 일제가 추진한 강제 병합 이후 인천은 조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극락과 지옥이 혼재된 도시로 변모했다. 이는 조선인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고조시켰다. 19세기 말 조선이 제국주의 질서에 편입되면서 벌어진 사태는 인천이라는 공간에 축적되어 있다.
현재 북한의 수도인 평양은 조선시대 대청 무역의 거점이었던 데다 전란 이후 군량미가 비축되고 청 사신의 왕래도 줄어들면서 당시 재원 모두 고스란히 관의 밑천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풍족한 재정 상태에도 불구하고 환곡 등과 관련해 거주민을 수탈하면서 평안감사의 이미지는 점차 나락으로 떨어졌다. 평안감사가 탐관오리의 대명사가 된 까닭은 거주민의 마음속에 싹트는 적개심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지은이

 강문식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관. 저서 『권근의 경학사상 연구』, 공저 『종묘와 사직』 『왕과 아들』, 논문 「권근의 경학과 경세관」 외 다수.

김경숙
 서울대 국사학과 부교수. 저서 『조선의 묘지 소송』, 공저 『조선의 일상, 법정에 서다』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 논문 「16세기 전라도 관찰사의 순행길」 외 다수.

김미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저서 『언어의 놀이, 서사의 실험』 『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 공저 『박태원 문학 연구의 재인식』, 논문 「박태원 소설의 담론 구성방식과 수사학 연구」 외 다수.

박준형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역서 『중화세계 붕괴사』, 논문 「'租界'에서 '府'로 : 1914년, 한반도 공간의 식민지적 재편」 「개항을 바라보는 시선의 (불)연속」 「청일전쟁 이후 雜居地 漢城의 공간재편논의와 한청통상조약」 외 다수.

유요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저서 『우리 시대의 신화』 『종교, 상징, 인간』, 역서 『엘리아데의 신화와 종교』, 논문 「제주 토착종교와 외래종교의 충돌과 질서 형성 과정에 관한 연구」 외 다수.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저서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21세기 한·중·일 역사전쟁』, 논문 「임시정부법통론의 역사적 연원과 의미」 「1910년 병합 칙유의 문서상의 결함과 불법성」 외 다수.

이은주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공저 『하루한시』, 역해서 『관서악부』, 역서 『평양을 담다』, 논문 「만들어진 유적, 평양의 로컬리티」 외 다수.

정호훈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저서 『조선후기 정치사상 연구』, 공역 『朱書百選』 『朱子封事』, 논문 「16·7세기 《소학집주》의 성립과 간행」 외 다수.

황재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저서 『안중근평전』, 역서 『만국사물기원역사』, 논문 「두문동 72현 일화 연구」 「전통적 지식인의 망국 인식」 외 다수.

작가 소개

엮은이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은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만들어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 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이후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여 년을 지탱해왔다.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창설 230년이 되는 지난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의 통합을 통해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 『규장각』,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규장각 자료총서> <한국문화연구총서> <한국학 공동연구총서> <한국학 모노그래프> <한국학 연구총서> <한국학 자료총서> 등 900여 책을 펴냈다.


 

 

목 차

규장각 교양총서를 발간하며
머리글|공간을 거닐며 역사를 읽다

1장 천명天命을 받은 새 나라의 새 도읍, 한양__강문식
2장 옛 도읍 개성에 남은 두문동 고려 유민들의 이야기__황재문
3장 고을을 누빈 관찰사, 전주 감영에 깃든 역사__김경숙
4장 변산, 조선의 혁신 사상이 자라난 땅_정호훈
5장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힘, 신화의 땅 제주_유요한
6장 평양이란 도시에서 감사는 어떻게 탐관오리의 대명사가 되었나_이은주
7장 세계사 속에서 인천이 밟아온 명과 암의 역사_박준형
8장 화려한 도시 원산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삶들_윤대원
9장 모순과 갈등의 씨앗을 품은 도시, 경성_김미지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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