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데뷔와 동시에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우뚝 선 스가 아쓰코
그녀가 유년과 청년 시절을 통과하며 만난 책과 사람들 이야기
스가 아쓰코는 61세에 첫 책 『밀라노, 안개의 풍경』을 내고 여류문학상과 고단샤 에세이상을 동시에 수상했으며 “이미 완성된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뒤늦게 에세이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해 활발히 글을 썼으나 미처 다 펼쳐 보이지 못하고 69세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먼 아침의 책들』은 작가가 마지막까지 병상에서 퇴고했던 작품으로, 유년과 청년 시절을 통과하면서 스가 아쓰코가 읽어온 책들, 친구와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세월의 힘으로 은근한 위로를 전하는 스가 아쓰코의 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스가 아쓰코는 일본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손꼽히며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스가 아쓰코의 글은 어찌 보면 모순된 면을 안고 있다. 거리를 두는 줄 알았는데 친밀함이 느껴지고, 건조한 듯 보여도 어느새 촉촉함이 묻어난다. 파편으로 여겼다가 사실은 모두 촘촘히 엮여 있음을 알아채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만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끝없이 읽고, 쓰고, 만나고, 부딪쳐온 육십여 년 세월의 힘일 터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각자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글에서 한없는 위로를 받는다.
『먼 아침의 책들』에서 스가 아쓰코의 추억은 모두 책과 관련되어 있다. 어쩌면 책에 의해 그녀의 인생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과 떼어놓을 수 없는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추억, 책을 매개로 한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기억, 하물며 엄혹한 전쟁조차 책 앞에서는 배경으로 물러나고 만다. 전쟁 중인 어두운 시대도, 전후의 혼돈스러운 시대도 그녀는 책과 함께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인생은 무척 풍요로워 보인다. (옮긴이 송태욱)
_ “나는 널 믿어.” 시게짱의 추억
『먼 아침의 책들』은 작가가 친구 시게짱을 마지막으로 만난 장면에서 시작하여, 훗날 기차를 타고 가며 시게짱을 떠올리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어린 시절 문학을 향한 열정을 공유하고, 장래를 이야기하며 마음 한편을 지탱해주었던 친구가 바로 시게짱이다. 같은 학교를 졸업한 뒤 작가는 유럽으로 먼 길을 떠나고 시게짱은 계율이 엄격한 수녀원으로 간다.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저 멀리 이어져 있던 친구를 회상하는 가운데 생의 용기를 주었던 시게짱의 말이 떠오른다.
왜 그렇게 반항만 하는 거야,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도 몰라, 하지만 이것저것 다 싫어, 하고 대답하자 시게짱이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나는 널 믿어. 마음이 좀 흔들리는 것 같아 걱정이지만 결국은 잘될 거야, 뭐든지. 그녀의 진지한 표정과 환한 목소리와 좀 마음에 걸렸던 그 말을 1년 후 다른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고 나서도, 이탈리아에서 결혼을 하고 나서도 수없이 떠올렸다. (26쪽)
_ “오가이는 읽었어?” 불화했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
스가 아쓰코에게 아버지는 다층적인 존재였다. 책에 관한한 큰 영향을 끼친 아버지를 존경하는 한편, 원망의 마음도 컸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저항하는 마음도 강하여 둘은 평생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스가 아쓰코가 드디어 ‘작가’로서 길을 걷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고백한다. 글을 쓰는 힘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길러준 것이었다고.
최근 들어 내가 번역이나 글을 발표하게 되자, 아버지를 알았던 사람들은 입을 모아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고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글이라는 것은 제대로 써야 하는 것이라 그렇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문학을 좋아하는 큰딸을 자신의 생각대로 키우려고 한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나름의 길을 개척하고 싶었던 나, 어느 쪽도 피할 수 없었던 타는 듯한 불화에 우리는 괴로움을 느꼈다. (45쪽)
_ “너는 곧 책에 읽히고 말 거야.“ 유년기를 채워준 책들
“책만 읽으면 여자는 변변한 일이 없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스가 아쓰코는 독서를 멈출 수 없었다. 작가는 어린 시절의 독서가 “음식물을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읽은 것은 책뿐이 아니었다. 입담 좋은 외사촌 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제사 때 부르던 찬불가, 고모를 따라 가서 보았던 영화 등을 통해 이야기의 세계를 즐겼다. 그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 한 사람의 작가가 탄생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 여자아이에게는 책 몇 권이 인생의 선택을 좌우하는 일이 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런 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빨려들 듯이 책을 읽고 있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자신이 없는 만큼 책에 빠져든다. 그 아이 안에는 책의 세계가 여름 하늘의 구름처럼 몇 층으로 겹쳐 솟아나고, 아이 자신이 거의 책이 되어버린다. (103쪽)
_ “비행기와 함께 우리는 직선을 알았다.” 인생을 가르쳐준 작가들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스가 아쓰코였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뭐 대학까지 갈 필요는 없겠지.”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부모의 반대를 물리치고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한 뒤에 스가 아쓰코는 기운 넘치는 소처럼 책을 읽어나간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에서는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철저하게 추구”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고, 클로드 모르강의 소설을 읽고는 사랑과 자유에 대해 친구들과 끝없는 토론을 나누었다. 또 하늘에서 지구를 본 작가 생텍쥐페리의 작품은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해주었다.
역시 이 책에서 읽은,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문장이 또 하나 있다. 인생의 몇몇 장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을 때 그 문장은 나를 떠받쳐주었다. 아니, 좀 더 자신을 속여 넘겨도 좋을 때 그 문장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쓸데없게 보였을 고생을 한 적도 있을지 모른다.
"다 지어진 가람 안의 당지기나 의자 대여 담당자를 하려는 사람은 이미 그 순간부터 패배자다. 그에 반해 어떤 사람이든 가슴속에 건조해야 할 가람을 안고 있는 자는 이미 승리자인 것이다." (146쪽)
작가 소개
지은이 : 스가 아쓰코
1929년 효고현에서 기업가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세이신 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게이오대학 대학원을 다니던 중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2년 뒤 일본에 돌아왔다가 1958년 이탈리아로 다시 유학을 떠나고, 1961년에 주세페 리카와 결혼했다. 남편을 비롯한 동료들과 코르시아 서점에서 일하는 한편, 일본 문학작품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1971년 일본으로 귀국, 강의와 번역을 이어갔다. 1985년에 잡지에 에세이를 기고하면서 에세이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61세가 되던 1990년에 낸 첫 책 『밀라노, 안개의 풍경』으로 여류문학상과 고단샤 에세이상을 수상했다. 이후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베네치아의 종소리』, 『트리에스테의 언덕길』, 『유르스나르의 신발』 등을 잇따라 출간했다. 『먼 아침의 책들』은 작가가 1998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병상에서 퇴고했던 작품이다.
그의 번역 업적을 기려 스가 아쓰코 번역상이 2014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옮긴이 : 송태욱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대학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대학에서 강의하며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환상의 빛』,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밀라노, 안개의 풍경』, 『황야의 헌책방』, 『서점, 시작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등이 있다. 한국출판문화상(번역부문)을 수상했다.
목 차
그 아버지에 그 딸
침대 안의 베스트셀러
책 밖의 ‘이야기’
『사프란의 노래』 무렵
길모퉁이의 책
갈대숲 속의 목소리
별과 지구 사이에서
팔랑팔랑 7월의 나비
시에나의 언덕길
소녀 파데트
아버지의 오가이
클레르라는 여자
알키비아데스의 피리
대퍼딜은 황금빛으로 너울거리고……
빨간 표지의 작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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