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세상의 세밀화를 포착해가는 작가의 시선
유경숙의 산문을 모은 『세상, 그물코의 비밀』이 푸른사상사에서 출간되었다. 작가는 대뜸 “세상사, 창랑의 물이 맑은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맑고 흐린 세상 탓을 하기보다 자신이 결정한 삶의 방향을 거침없이 탐색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는 세상의 모든 사물과 생물에는 그것만이 지닌 세밀화가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작가만이 포착했을 세밀화의 진경이 궁금하다.
소설가의 산문집이어서일까. 『세상, 그물코의 비밀』은 시간과 공간을 불문하고 자유로이 상상력을 뻗치는 작가 유경숙의 소설처럼, 볼 수 있는 것으로부터 볼 수 없는 것까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작가는 신화 세계든 현실 세계든 일단 호기심이 생기면 놓지 않고 끝까지 추적한다. 그 여정에 작가의 상상력과 경험, 지식이 더해져 종래에는 놀라운 이야기의 결정체를 이뤄낸다. 이 산문집에는, 충청도 깡촌에서 자란 작가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된 동기 외에도 진솔한 개인적 고백이 덤으로 얹혔다.
1부 ‘모정’에는 세상 어미들의 무조건적이고 때론 맹독과도 같은 모성애를 주제로 아홉 편의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늙고 헐렁한 몸피에서 뿜어져 나오는 춤(몸짓)을 보며 ‘生의 방언’을 읽어내는 예지력 깊은 눈길이 인상적인 「방언」, 전쟁 포로로 정체성을 잃고 노예가 되어버린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비극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한 「만쿠르트의 전설」 등이 독자를 끌어당긴다.
2부 ‘세상, 그물코의 비밀’ 「툰드라의 야생화」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경계선도 없이 공존하는 수상쩍은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티베트 성자 밀라레파의 이야기, <세한도>와 추사 김정희의 절대 고독이 세상의 비밀을 속삭인다.
3부 ‘도원을 찾아서’에서 작가는 ‘맹탕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면 동물원에 간다고 했다. 그곳에서 기린의 눈빛에 담긴 서정시를 읽고 신체의 부조화 속에 감춰진 신비, 비운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기에 이른다.
4부 ‘책과 영화의 뒷담화’에서 작가는 니코스 카잔자키스, 홀리오 꼬르따사르, 그 외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읽어냈는가를 신랄하고 품 넓게 그려내고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을 특유의 진솔한 문체로 써나간다.
5부 ‘내가 따를 사표’에서는 작가 자신의 인생 스승으로 삼은 여러 인물이 소개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 토마스 머튼, 니체 등 작가의 생에 무한한 지식과 통찰을 안겨주었을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미 유경숙의 소설에 매료되었던 독자라면 산문집 『세상, 그물코의 비밀』을 통해 ‘실실이 늘어진 수양버들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고, 그 속에서 노니는 쉬리의 지느러미처럼 느리고 유연하게 몸을 풀며’ 걷는 작가의 여유로움에서 나온 졸박한 문체를 한층 농밀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소개
유경숙
탱자나무 울타리가 짱짱했던 집, 충청도 양촌에서 태어났다. 2001년 『농민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오래된 인류의 발자취와 현재형 직립보행 존재들의 삶을 조명하는 일로 소일하고 있다.
창작집 『청어남자』와 e-book 소설집 『당신의 눈썹』 『백수광부의 침묵』이 있으며, 미니픽션 선집 8권을 공저로 펴냈다. 국제 문학단체 “한국 카잔차키스 친구들” 회장을 역임했다.
목 차
책머리에
1. 모정
방언 / 배롱나무 아래에서 / 만쿠르트의 전설 / 탱자나무집 남자 / 아그배꽃 향기 / 어둠 속의 댄서 / 꼬마 천사 은성이와 이별 / 서랍 속 편지 / 굴뚝 낮은 집
2. 세상, 그물코의 비밀
툰드라의 야생화 / 종자의 비밀 / 에덴의 동쪽, 알혼섬 / 기다림이 낳은, 세한도 / 누가 부른 재앙인가? /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멈추다, 그 꽃에서 / 굴뚝 청소부 / 돌아온 꾀꼬리 / 절름발이 염소의 몫
3. 도원을 찾아서
보길도에서 취하다 / 잠향(潛香)이 흐르는 명화 / 탱자나무 가시는 제 살을 찌르지 않는다 / 그이의 무덤가에 조팝나무 한 그루 심어주고 싶다 / 기린에 대한 단상 / 천상의 방 / 되재공소를 찾아서 / 유림(柳林) 속을 걷다 / 문향(文香) / 파에야, 재회의 약속
4. 책과 영화의 뒷담화
유랑의 성자, 니코스 카잔자키스 / 소설은 회의주의자의 문학 / 누군가의 고뇌와 비통으로 태어난 문장들! / 현대인의 정신적 내상을 그린 소설 / 노학자의 깊은 눈길을 따라 겸재와 만나다 / 수상쩍은 경계를 맛보다 / 찬이슬 같은 소설 / 참 다행이었다, 놓칠 뻔했던 『위대한 개츠비』 / 아슬아슬한 감정의 경계를 실핏줄처럼 그려냈다 / 작은 소리지만 울림이 깊다 / 짭조름하게 간이 밴 중국 보고서 / 베르길리우스의 지팡이 / 암컷의 속울음 / <귀래(歸來)>를 보고 / 다문 입 / <간신>, 흥청의 제국
5. 내가 따를 사표
무(無)에의 추구 / 칠층산 / 눈먼 이의 소원 / 줄탁동시의 기적 / 파스카 신비 / 노회한 그물망 / 성 아우구스티누스 / 창공의 새들처럼 / 온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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