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이 책 『인문적 인간』은 한 편의 글(「성장 신화의 붕괴, 절망의 꽃말들」)을 제외하고는 2009년 이후 쓴 글들 중에서 시와 예술의 힘에 관한 글들을 모은 산문집이다. 지난 십 년 동안 나는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의지와 열정보다는 ‘무엇인가를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고자 했고, 기존의 타율적인 리듬과는 다른 자율적인 ‘리듬’을 형성하며 살고자 했던 것 같다. 혁명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revolution’이 행성의 궤도를 뜻하는 ‘volution’에 ‘re’를 붙인 단어라는 점을 한참 후에 알게 된 것은 내 생각과 행위에 대한 자기합리화의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좀 더 합리화하자면 ‘인문적 인간’이란 ‘나의 문화정책’을 세우고, 거기에 맞추어 내 인생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문화) 정책이라고 하면 언제나 항상 ‘추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_「사람의 줄무늬는 몸 안에 있다」(‘책머리에’), 중에서
서로 기대며 살 수 있는 힘을 위한 시와 예술
문학평론가이지만 문학을 넘어 인문학교육과 예술운동의 영역에까지 걸쳐 활동을 하고 있는 고영직의 첫 번째 저서가 출간되었다. 제목은 ‘인문적 인간’. 제목만 보면 인문학 일반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저자는 언제나 ‘문학’을 자기토대로 하면서 삶의 의미와 가치, 더불어 사는 일의 실천적 함의를 착착 쌓아나간다. 그래서 부제는 어쩔 수 없이(?) ‘시와 예술의 힘에 대하여’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줄곧 강조하는 것은 그의 조크(joke)인 ‘비빌리힐스’에 잘 나타나 있다. ‘비빌리힐스’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동네인 베벌리힐스에 대한 풍자인 것 같지만 그 의미는 단순한 풍자를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삶을 기대는 즉 서로 의지하는 언덕이 되어주자는 능동적인 실천성을 갖는다. 시종일관 저자는 이 점을 강조하며, 시와 예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저자는 우리가 서로 기대며 사는 상태를 ‘새로운 커뮤니티’라고 부른다.
어떻게 하면 나와 우리는 당신과 더불어 밥을 함께 먹고 볼링을 함께 칠 것인가. 그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이기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뿐만 아니라,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 의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언제까지 한 나라의 복지를 ‘김밥 할머니’의 헌신에 기대야 할 것인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상상력과 시민들의 연대가 필요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_「새로운 커뮤니티를 향하여」 중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상상력과 시민들의 연대가” 가능할까? 이 문제식으로 이 책은 단단히 뭉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저자의 주 종목인 문학, 무엇보다도 ‘시’를 통해 그 가능성을 부단히 두드린다.
쓸모없음으로써 갖게 되는 힘
‘1부 ‘시詩의 힘’을 신뢰하자’에서는 특히 그것이 두드러지는데, 천상병 시인의 시와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diaspora 지식인 서경식이” 지난 2015년에 출간된 『시의 힘』에 기대어 시가 우리의 삶과 현실에서 갖는 의미와 힘을 확인해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목적의식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쓸모없음의 가치”를 통해서 진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쓸모없음”이 시의 무기력을 가리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천상병의 시를 ‘육체성’과 ‘장소’ 그리고 ‘삶의 시화詩化’라는 키워드로 읽어내면서 천상병의 시가 “효율성과 실용성이 숭배되는 사회에서 ‘쓸모없음의 쓸모’의 시학과 윤리학을 추구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천상병의 시를 발판 삼아 저자는 오늘날 시의 상황을 비판하는 데에까지 나아가는데 그 질문은 어느새 근원적인 곳에 이르고 만다. “저는 지금의 문학은 어쩌면 문학의 문학성 자체가 문제이고, 지금의 예술은 예술의 예술성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고 봅니다.”(39) 이 주장은 구체적 삶과 유리된 작금의 문학을 겨냥하면서 선험적인 “문학성”이나 “예술성”이란 허상이 아니겠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린다.
이런 질문을 하는 저자의 문학적, 윤리적 자세는 서경식의 『시의 힘』을 읽으면서도 두드러진다.
서경식이 말하는 시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문형의 희망’이다. 다시 말해 국가의 힘과 자본의 논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 서경식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무력한 “패배로 끝난 저항이 시가 되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시대, 또 다른 장소의 ‘저항’을 격려한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의 힘이란 지금 당장의 효용성을 넘어서는 차원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_「‘시(詩)의 힘’을 신뢰하자」 중
‘시의 힘’이란 결국 현존하는 가치를 의문의 처형대 위에 올려놓고 그것이 가진 의미를 다시 질문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질문은 결국 삶의 지형을 재편성하면서 직접적으로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하는 것이 된다. 저자가 안드레 블첵의 이런 말을 인용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시들은 강철로 쓰여진다.”
어쩌면 저자가 다른 인문학교육과 예술운동의 영역으로까지 나아가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은, ‘시의 힘’을 확장하려는 기획인지도 모른다. 인문학교육으로서의 ‘문학/글쓰기 교육’이 “자기와의 소통, 타인과의 소통, 사회를 포함한 더 큰 공동체와의 소통을 통하여 이른바 ‘마음의 사회화’ 과정을 스스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치열한 학습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등장한다. “탈공동체 혹은 반공동체적인 관점과 태도를 마치 ‘쿨한’ 것으로 착각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미끄럼틀 사회와 평화인문학」)
“모든 인간이 노동력으로 평가되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실존적 불안과 우울인데, 이것은 “시대”가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대”는 “긍정의 심리학과 힐링 그리고 멘토 열풍” 같은 “현대판 주술”을 동시에 처방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명료해 보이지 않지만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서도 예술의 역할이 있을 수 있는데, 소극적인 의미의 창작 활동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예술의 ‘활동’이 있다. 저자는 “북유럽 덴마크 코펜하겐에 소재한 ‘자유도시’ 크리스티아니아”의 사례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동체 형성 과정에서 극단 솔보아이엔을 비롯한 예술가들의 빼어난 활약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1974년 겨울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분장한 한 무리가 코펜하겐의 백화점을 찾아가 선반의 물건들을 ‘재분배’한 퍼포먼스는 이들에 대한 덴마크인들의 호감 어린 시선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_「시대의 우울과 예술」 중
‘비빌 언덕’을 위하여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비빌리힐스’에 대해 말한다. “우리 사는 삶터가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비빌 언덕’이 되고,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오랜 믿음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유구한 에토스가 아닐까.”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비빌 언덕’이” 되려면 구체적인 ‘터전’이 있어야 한다. ‘시의 힘’을 강조했지만, 그 ‘시의 힘’이 추상적인 것이 되지 않으려면 시가 ‘터전’에 대한 상상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자인 고영직이 이 책에서 핵심 키워드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구체적인 삶의 ‘터전’과 ‘시의 힘’이다. 이 두 가지가 종합된 것이 “터 무늬”일 것이다. 즉 ‘터전’에도 ‘시’가 있어야 하고 ‘시’에게도 ‘터전’(에 대한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더 많은 민주주의는 경제적 가치만 강조되는 체제에서 탈출해 다른 장소와 다른 삶을 구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에 저자인 고영직은 ‘시의 힘’을 믿으며 나아가 ‘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시가 터전을 만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인문(人文/人紋)적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작가 소개
문학평론가. 사람은 이야기로 구성된다고 믿는 인문주의자.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대표 와 경희대 학교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을 지냈고, 문학 웹진 <비유> 편집위원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천상병 평론』(편저) , 『행복한 인문학』, 『자치와 상상력』, 『노년 예술 수업』,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이상 공저) 등을 쓰고 엮었다.
목 차
책머리에 사람의 줄무늬는 몸 안에 있다 ◆ 5
프롤로그 새로운 커뮤니티를 향하여! ◆ 14
1부 ‘시詩의 힘’을 신뢰하자
천상병 시와 자발적 가난의 윤리학 ◆ 19
‘시詩의 힘’을 신뢰하자 ◆ 45
성장 신화의 붕괴, 절망의 꽃말들 ◆ 53
현장의 시, 시의 현장 ◆ 71
시인은 국익을 말하지 않는다 ◆ 87
아픈 십 대와 소통하는 문학의 힘 ◆ 97
칠곡에는 ‘문학 할매’들이 산다 ◆ 111
2부 시대의 우울과 실천인문학
너와 나의 안녕한 마음생태학을 위하여 ◆ 133
시대의 우울과 예술 ◆ 140
미끄럼틀 사회와 평화인문학 ◆ 150
먹고사는 문제와 인문학 ◆ 168
실천인문학과 문학/글쓰기 교육 ◆ 186
3부 나우토피아를 위하여
우리는 미적 공화국의 시민들이다 ◆ 205
빅 브라더 ‘e나라도움’ ◆ 210
한국 생활 매뉴얼을 넘어, 기쁨의 정치학으로 ◆ 214
어린 미적 인간을 위하여 ◆ 222
문학장 바깥에서 이우(異友)를 만나다 ◆ 234
노년의 양식에 관하여 ◆ 248
꿈꾸는 책들의 나우토피아를 위하여 ◆ 269
나를 위한 시간 ◆ 288
덴마크어 ‘휘게’를 아십니까? ◆ 296
언어의 감옥에서, 해방의 언어를 꿈꾸다 ◆ 304
나는 4월 16일을 살고 있다 ◆ 312
에필로그 터 무늬 있는 ‘비빌리힐스’를 꿈꾸며 ◆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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