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가장 깊은 환상을 길어낸 동화
임순옥의 첫 창작집입니다. 여섯 편의 동화가 실려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빛깔의 개성 있고 독특한 작품들이죠. 한 편을 제외하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들입니다. 그의 동화에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그 무엇이 있습니다. 어떤 절실한 필연성이 주인공에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게 하는데, 그가 보여주는 방식은 관습적으로 장르를 구분하고 안주하던 우리 동화에서 보기 힘든 새로운 시도입니다. 작품 속에서 아이들은 엄마나 할머니 또는 아빠하고만 사는 외로운 처지입니다. 밤길에 목격한 길고양이의 조용한 죽음, 어른들의 위선과 허위의식, 아빠의 실업으로 집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 등을 혼자서 감당합니다. 이때 아이들이 펼쳐가는 환상은 이런 마음의 풍경들입니다. 하지만 마음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일부가 아니던가요. 임순옥의 작품들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릿합니다. 아니, 어쩌면 이 작가는 현실과 환상이 서로에게 비치는 관계를 다르게 만들고 있는 듯합니다. 잔잔하고 쓸쓸한 이야기인데도 따스한 여운이 길게 이어집니다. 아이들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작가의 발걸음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리면서도 풋풋한 아이들 목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시길요.
현실과 환상의 경계
환상을 동화라는 문학 장르의 주된 특징으로 여기는 주장을 자주 만납니다. 동화에서 이런 특징을 빼놓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이런 관점 또한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닐까요? 1980~90년대에는 우리 현실의 모습을 엄밀하게 담으려는 사실주의가 동화에 요구되는 진지한 자세였습니다. 2000년대 이후 과감한 상상력과 환상을 강조하는 판타지 동화가 우리 아동문학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을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환경의 변화가 주된 배경이겠지만, 보다 다양한 형식을 선보이고 싶은 작가들의 실험 정신도 작용했을 겁니다.
동화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그리고 그 고민은 우리 동화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요? 사전적 의미로, 판타지는 가공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거나 초현실적인 존재 또는 사건을 다루는 장르입니다. 소설로 널리 읽히고 화려한 영화로도 눈길을 끈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발걸음을 뗀 한국 현대문학이 일본을 거친 서구문학의 이식이라는 상처를 안게 된 것처럼, 2000년대 이후 팽창한 판타지 동화도 어쩌면 깊은 숙성을 거치지 않고 서구에서 유행한 장르와 기법을 그대로 좇은 게 아닐까요? 문학과 예술에서 새롭고 참신한 시도는 마땅히 반길 일입니다. 그러나 환상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솟아날 때 더 튼튼한 골격을 갖추게 되지 않을까요?
현실과 환상을 엮는 새로운 시선
1. <귓속 모래바람>은 이 창작집의 전체적인 방향과 특징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같습니다. 바로는 아침부터 머리가 아픕니다. 학교 가는 일도 영 내키지 않습니다. 하필 황사가 최악인 날입니다. 교실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청소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가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장 패거리가 바로의 가방을 화장실에 숨기는 장난질을 한 겁니다. 왜 그 일이 생각나지 않았을까요? 사건의 매듭 하나가 툭, 떨어져 나가듯 기억의 어느 부분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이겠죠. 바로가 이들의 따돌림의 대상이 된 이유는 단순합니다. 아버지도 없는 주제에 공부를 잘한다는 시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죠. 바로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날리게 됩니다. “백지같이 맑은 목소리로” 꾸짖는 선생님에게 반성문을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모래바람만 가득한 낯선 풍경입니다. 그런데 사방이 모래만 가득한 사막 같은 곳에서 바로는 등이 볼록한 동물을 만납니다. 커튼을 내린 듯 눈꺼풀을 내리고, 긴 눈썹이 얼굴을 덮고, 귓구멍의 털로 귀와 콧구멍까지 막아 버린 낙타입니다. “그냥 참으라고? 소리도 내지 말고? 싫어.” 바로의 항변에 뒤이어 귓속에서 낙타의 말이 울립니다. “무서워 마. 빠져나가려고 서두르면 모래바람에 갇히게 돼. 집중하고 걸어. 몸 안에서 혹이 만들어질 때까지. 천천히.” 현실인 듯 아닌 듯 부연 환상 속에서 바로는 답을 얻고 위안을 받습니다. 낙타가 해 준 말이라지만, 실은 바로가 자기 안에서 힘들게 찾아낸 답일 겁니다. 그렇다면 현실과 환상의 관계를 칼로 무 자른 듯 정확하게 가를 수 있을까요?
2. <깜빡이는 날>에서 정이는 할머니와 사는 아이입니다. 학부모 참관수업이 있는 날이지만, 할머니는 학교에 올 수 없습니다. 병원에서 청소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차례가 되어 정이는 엄마들 앞에서 어제 쓴 편지글을 읽어야 하지만, 입안에서만 맴맴 돌 뿐 소리가 나오질 않습니다. 갑자기 눈꺼풀이 움직이며 눈을 깜빡거리기 시작합니다. 혹시 틱장애일까요? 아닐 겁니다. 슬퍼도 억울해도 자신을 드러낼 줄 모르는 정이의 외로운 마음이 몸을 통해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이겠죠. 친구들에겐 무시하고 흉볼 거리만 늘어난 셈이겠지만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작은 소동이 일어납니다. 금붕어 밥 당번인 정이의 허락을 받고 사료를 뿌리던 선주가 눈을 깜빡이기 시작하고 이어서 친구들 모두가 차례대로, 나중엔 선생님까지도 눈을 깜빡입니다.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빠르게 반 전체에 퍼져 나갑니다. 서먹하던 눈빛들에는 어느새 장난기가 가득하고 제작기 마음속 얘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습니다. 이런 소동은 현실일까요, 아니면 상상일까요? 정이가 맨 처음 눈을 깜빡이기 시작한 건 학부모들 앞에서 진땀을 빼다가 어항 속 금붕어와 눈을 마주친 순간입니다. 늘 움추리기만 하는 정이가 누군가와 유일하게 신호를 주고받은 순간일 겁니다. 쓸쓸하지만, 이것도 마법이라면 마법이겠죠.
3. <꽃잎 속으로>는 분위기가 앞의 두 작품과 사뭇 다릅니다. 문방구에 다녀오던 희지가 차도 중앙에서 밤처럼 까만 고양이를 발견합니다. 비틀거리며 안간힘을 다해 길을 건너려는 모습을 보고 쏟아지는 자동차 불빛 앞으로 발을 내딛는데, 교복을 입은 어떤 언니가 희지를 잡아챕니다. 언니가 고양이를 구해 오고 119까지 부르지만, 구조대 아저씨는 고양이가 이미 죽었다고 알려 줍니다. 고양이가 죽으면 영혼은 어디로 갈까요? “희지가 손을 흔들자 까만 고양이가 날아올랐다. 훌쩍, 꽃잎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이제 안녕! 하얀 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떨어지는 어느 봄날 밤의 안타깝고 여운이 짙은 이야기입니다.
4. <수수꽃다리를 위해>는 이 창작집에서 유일하게 생활동화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조금 어두워 보이는 이야기들 사이에 삽입된 경쾌한 간주곡 같은 느낌의 동화입니다. 그래도 주제는 만만치 않습니다. 사소한 보험금을 놓고 벌이는 어른들의 위선과 이에 대비되는 아이들의 마음이 잘 그려졌습니다. “엄마, 자꾸 이래도 돼?”라는 질문처럼, 정말로 걱정스러운 건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일 겁니다. 크리스마스 전구를 휘휘 감아놓은 수수꽃다리를 보면서 지혜가 하는 말이 가슴에 스며듭니다. “나무가 어떤 마음일지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 나도 저 나무랑 같아. 반짝이는 걸로 칭칭 감고 있어.” 어느새 마음의 키가 훌쩍 자란 지혜에게 감탄하면서도 짐짓 눙치는 ‘나’의 묘한 감정이 유쾌합니다.
5. 표제작인 <강철 변신>에는 작가가 어린 시절에 보고 들은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 경험을 새롭게 보여주는 인물은 변신 카드에 흠뻑 빠져 있는 지호입니다. 지호는 자신이 안전하고 완벽한 환상의 성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있죠. 하지만 그 세계도 수시로 적들의 침입을 겪습니다. 일차 침입자인 잔소리꾼 엄마의 지팡이 공격은 보호막을 쳐서 막아내지만, 본격적인 위험은 이제부터입니다. 희망퇴직이니 뭐니 하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니, 점퍼를 걸치는 엄마의 눈이 토끼처럼 빨개집니다. 그리고 지호는 노동자 집회 장면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게 됩니다. 척척척. 쇠 마스크를 한 철갑 부대가 작업복 아저씨들에게 다가갑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고개를 드는데,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는 모습이 아빠입니다. 위험에 빠진 아빠를 구해야 합니다. 지호는 카드를 꺼내 들고 주문을 외워 레인보우 고양이를 불러냅니다. 무지개 회오리를 만들며 고양이를 타고 날아가서 작업복 아저씨들을 돕던 지호는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한 주문을 외칩니다. “아빠, 강철 변신!” 실업과 파업 같은 어른들의 현실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변신 카드가 만들어 주는 환상의 세계는 지호 같은 아이들이 현실에서 받을 상처를 막아 주는 보호막 같은 것이 아닐까요? 현장의 분위기를 모르고선 쓸 수 없는 작품입니다. 그야말로 구체적인 현실에서 가장 실감 나는 환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6. <리코더 연습>은 이 창작집에 실린 동화들 가운데 가장 무겁고 어두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 떠난 엄마 옆에서 이틀을 보냈다는 아이 이야기입니다. 자동차 회사에서 해고당한 아빠가 새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의 일입니다. 작가는 이 소재를 신문에서 읽고 알았다고 합니다. 이 동화는 마치 <강철 변신>의 후일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호네 가족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을 품고 바로 이 작품을 읽게 되기 때문일까요. 비극적인 현실이라서 그런지 아이의 환상이 서늘합니다. 작가는 상처 난 마음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갑니다. 이 아이가 무의식에서도 두려워하던 바로 그 지점까지. 엄마의 죽음을… 아직 아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작가는 아이에게 따뜻한 기억을 마련해 주고 싶었나 봅니다. 아이가 상상 속에서 엄마와 함께 리코더 연습을 하는 장면을 보면요. 아이는 엄마가 별이 되어 올라간 뒤에도 밤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리코더 연습을 합니다. 이 아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꼭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임순옥
어떤 것, 어떤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 가며 오래 글을 쓰는 작가이고 싶습니다. 울산에서 자랐고,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월간 《어린이와 문학》에 〈수수꽃다리를 위해〉를 포함해 세 작품을 실으며 추천받았습니다.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 창작기금 수혜 작가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린이 : 이상권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습니다. 여러 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으며, 다양하면서도 개성 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어린이》 《박선욱 선생님이 들려주는 백석》 《고정욱 선생님과 함께 읽는 금수회의록》 《몽양 여운형》 《우리 형》 《삼국지 이야기》 《까매서 안 더워》 《트럭 속 파란눈이》 등의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렸으며, 그림책으로 《눈 속 아이》 《구렁덩덩 새선비》를 펴냈습니다.
목 차
귓속 모래바람 4
깜빡이는 날 22
꽃잎 속으로 40
수수꽃다리를 위해 56
강철 변신 76
리코더 연습 90
작가의 말
어떤 것, 어떤 아이들의 이야기를 이어 가며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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