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조금 전
스윽,
네 어깨 너머로
뭔가
지나간 것 같다면
그것은
바람의 그림자
저
장미 넝쿨을 헝클어뜨리고 온 바람이
네 이마의 머리카락에
열두 개나 되는 투명한 손가락을
척,
올려놓을 때
어쩐지
네 목덜미가 간지러운 것은
바람의
열두 개나 되는 손가락의 그림자 때문이지
네가
휙, 고개를 돌리면
바람의 열두 개나 되는 손가락들의 그림자들은
벌써
앵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앵두를
기타 줄 퉁기듯
차르르 차르르
흔들어 대지
열두 살이 된다는 건
바람이 연주하는 빨간 앵두의 노래를
온몸으로
따라 부르는 일이지
_「바람의 그림자」 전문
“문신 동시는 아이의 마음과 바람에 자주 머문다.
마음과 바람은 보이지 않고, 떠다니며 움직이고,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아이의 마음은 직접 표출되거나 이미지로 제시되는 대신
바람이 스치듯 기미와 낌새로 연행(演行)된다.
열두 살, 그 좋아하고 설레고 외롭고 두렵고 기대되는 마음들을
어떤 형용사로 표현할 수 있을까.” _송선미(『동시마중』 발행인, 동시인)
| 열두 살이 된다는 건
| 바람이 연주하는 노래를 온몸으로 따라 부르는 일이지
문신 시인의 첫 동시집. 시를 써 왔던 그는 세 아이를 키우며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로 당선되었고 문학동네동시문학상에서는 제5회, 제6회, 제7회 등 무려 세 차례에 걸쳐 최종 본심에 올랐다. 특히 마지막까지 격론의 대상이 되었던 제7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 심사 당시 ‘시적 세련성에서 단연 돋보인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빼어나다/ 어디 거칠거나 어색한 언어의 실밥이 도무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잘 다듬어져 있다’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이후 매무새를 더 가다듬어 아이의 내면세계로 한층 뻗어 나간 동시가 마침내 『바람이 눈을 빛내고 있었어』로 찾아왔다.
청소년이 되기 전 유년기의 마지막 길목에 접어든 초등 고학년 아이들이 만끽할 수 있는 시의 세계가 펼쳐진다. 눈부신 태양보다는 은은한 달에 새삼 마음이 가고, 아직 가 본 적 없는 먼 세상의 이야기가 부쩍 궁금하고, 그곳 어디엔가 있을 “나를 닮은 또 다른 아이”가 문득 그리운 그 또래 아이들의 속내가 시인의 언어에 섬세하게 포착되었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을 나만의 일기장을 처음 마련할 즈음의 아이들이라면 꼭 내 마음을 옮겨 놓은 듯한 시구를 발견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열두 살”로 표상되는 어느 한 시기의 마음들은 멈추지 않고 흐르며 새로운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바람줄기, 그 결 하나하나와 닮았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손가락이 빨간 앵두를 차르르 흔들며 반짝이는 노래를 연주하듯이, 스쳐 지나는 듯 보이는 설렘과 외로움, 두려움과 기대의 순간들은 선연한 빛깔로 차곡차곡 쌓이며 마음의 키를 키운다. 그렇게 아이들의 이마는 조금 더 단단해져 간다.
가을 하늘 올려다보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탁 두드려 주면
가을 하늘이
단단한 이마에 새겨지겠지
또 한 번
가을 하늘 올려다보고
눈 꼭 감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쓰윽 쓰다듬어 주면
가을 하늘 한 장
이마를 덮어 주겠지
해마다
내 이마가 단단해지는 것은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게
이마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겠지
_「가을 하늘과 이마」 전문
| 아무 날도 아닌 날은 없어
| 이 세계에서 자라나고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니까
반짝 빛나는 바람처럼 시인의 눈은 크고 작은 것들 사이를 자유로이 누비며 성장의 낌새를 알아차린다. 그 눈길이 닿는 곳에는 아이의 내면뿐 아니라 아이를 둘러싼 세계, 자연이 있다. “몇 개의 골짜기와/ 그늘 깊은 숲과/ 바위와/ 눈 맑은 산새를 키우는/ 산 하나”를 “통째로” 조망할 만큼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시선은(「등산」) 발밑에 다글다글 모인 키 작은 풀꽃들의 표정 또한 놓치지 않는다(「웃지 마, 꽃!」). 떡갈나무 열매 하나가 쿵, 소리로 땅을 깜짝 놀라게 하고(「가을 저녁」) 달팽이 한 마리가 참꽃마리 잎을 거뜬히 기울이는 광경을 지켜본다(「달팽이와 참꽃마리」). 생명력을 지니고 자라나는 모든 존재는 “비빔밥처럼” 버무려진 사계절을 품고 있기에(「대팻밥」) 거대한 산 못지않게 무겁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운차다.
제비꽃, 산마늘, 복수초, 지치, 개불알풀, 꽃다지…… 다들 피었다
양지쪽에 피었다
앗,
바람꽃만 큰 바위 뒤에 자리 잡았다
거기는
봄 내내 햇빛 한 줄기 안 들이치는 곳
햇빛을 공수해라
곰개미가 바쁘다
네발나비가 허둥댄다
명주바람도 불어 댄다
그걸로는 안 되겠다
호랑거미야 거미줄을 짜라
고운 실로 배게 짜라
아침 이슬 총총 매달리게 꼼꼼히 짜라
마침내
봄 햇살이
호랑거미 거미줄에 맺힌 이슬에 반사되어
바람꽃을 비추니
됐다
됐다
이제 됐다
올봄에도 빠진 것 없이 다 피었다
_「봄 햇빛 공수 대작전」 전문
어느 존재의 성장이 방해받을 위기에 처했을 때 다른 존재들이 합심해 돕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햇빛이 들지 않는 큰 바위 뒤에 자리 잡은 바람꽃 한 송이를 위해 곰개미, 네발나비, 명주바람, 호랑거미가 허둥대며 「봄 햇빛 공수 대작전」을 펼친다. 마침내 호랑거미가 짠 거미줄에 작은 이슬이 맺히고 그 이슬에 햇빛이 반사되어 바람꽃도 햇빛을 쬐는 데 성공하기까지, 경쾌하고도 따스한 소동이 그려져 있다. “됐다, 됐다, 이제 됐다” 하는 말은 바람꽃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함께 무사히 자라나자는 시인의 소망이 담긴 목소리로 읽힌다.
아이들은 밤새 이불 속에서 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먼 나라에 대한 상상을 펼치는 시간이 콩 싹과 앞개울과 직박구리에게도 훌쩍 자라는 시간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비를 듣는다」). 그렇게 “외롭지 않는 법” 한 가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달의 마술사」). 『바람이 눈을 빛내고 있었어』의 세계에서는 매일이 기다려진다. 모든 존재가 자라나며 매 순간 변화하는 이곳에 “아무 날도 아닌 날”이란 없기 때문이다(「2월 30일」).
| 내가 하얀 늑대를 생각할 때마다
| 북적북적 도서관 책꽂이에 하얀 늑대 이야기가 한 권씩 생겨요
시인은 열두 살의 마음속 한편에 늘 자리하고 있는 꿈의 상자를 슬며시 열어 보인다. 그 속에는 “별과/ 별/ 사이를 건너며/ 외롭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 주는 「달의 마술사」가 있고, 먼 나라에서 편지 뭉치를 배달하는 “어떤 우편배달부”가 있고(「가을 저녁」), 하얀 늑대로부터 달아나는 주문을 일러 주는 “북적북적 할머니”가 있다(「늑대와 북적북적 도서관」). 상상 속의 세계, 환상적인 이야기 속의 세계가 꿈처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혼자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죠
(어느 공원이냐고요?)
북적북적 도서관 언덕에 새로 생긴 공원 있잖아요
꼭대기에 미루나무 한 그루가
신비의 칼처럼
언덕에
푹
꽂혀
바람에
웅장하게
휘날리는 공원에서
(믿기지 않겠지만)
늑대를 만났지 뭐예요?
그래요
늑대
큰
눈이
주먹만 해서
(보름달 같은 늑대의 눈을 상상해 보세요)
내 눈도 휘둥그레져서
늑대가 나타났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
없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나는 두 발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도 깜빡 잊고 북적북적 도서관을 향해 쏜살같이 달렸죠 그 순간 언덕 아래에서 북적북적 할머니가 외쳤어요 (오른쪽으로 다섯 발, 왼쪽으로 세 발, 또 오른쪽으로 다섯 발, 또 왼쪽으로 세 발…… 그렇게 달려야 된다나요?)
_「늑대와 북적북적 도서관」 부분
「늑대와 북적북적 도서관」은 “북적북적 도서관 언덕에 새로 생긴 공원”이라는 일상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판타지 서사를 이야기시 형식에 담은 작품으로, 책을 보며 늑대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늑대를 떠올리면 책이 생겨난다는 발상이 눈길을 끈다. 상상으로 구축된 이 세계에서 아이는 이야기의 창조자이자 주인공으로 존재한다. 해설을 쓴 송선미 시인은 한 편의 연극처럼 흘러가는 이 이야기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상상하는 일은 그 자체로 “북적북적 도서관”에 꽂힐 책의 두께를 만드는 놀이가 된다고 하였다. 그 놀이의 과정을 기록해 책 속으로 옮겨 놓는 “북적북적 할머니”의 자리는 전통과 공동체와 어른의 자리, 즉 시인이 선 자리와도 같다. 북적북적 할머니가 있는 든든하게 지키고 서 있기에 아이들은 마음 놓고 “꿈잠”을 꿀 수 있게 된다(「겨울밤」).
열두 살에 나는 바람을 모으는 아이였지.
풀꽃 바람, 개울 바람, 숲 바람, 노을 바람,
눈 오는 날 불었던 바람
내가 속상했던 날 이마를 스치고 갔던 바람
텅 빈 학교 운동장에서
조그맣게 불러 보았던 그 애 이름을 잽싸게 채 갔던 바람이
내 방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어.
(…)
그 후로 나는 바람을 기다리는 시인이 되었어.
공원을 산책하다가도
자전거를 타고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가다가도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하다가도
눈이 별빛처럼 맑고 찰랑거리는 바람을 만나면
나는 오래오래 시를 쓰지.
바람의 시 말이야.
_‘시인의 말’에서
“문신 동시에는 연극을 만드는 관객의 자리이자,
연극을 받아 적는 북적북적 할머니의 자리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그의 동시가 현재를 호흡하면서
미래를 응원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_송선미(『동시마중』 발행인, 동시인)
작가 소개
지은이 : 문신
여수에서 태어나 바다를 바라보며 자랐다.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를 써 오다가 세 아이의 아빠가 된 후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었으며,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시집으로 『물가죽 북』 『곁을 주는 일』이 있다.
그린이 : 임효영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현재 호주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다. 쓰고 그린 책으로 『밤의 숲에서』가 있다.
목 차
제1부 열두 살이 된다는 건
바람의 그림자 | 혼나는 나무 | 2월 30일 | 강가에 굴러떨어지는 돌멩이 |
고래라는 이름의 고양이 | 뒤로 걸으면 | 열한 시 | 가을 하늘과 이마 |
하늘 기둥 | 솜이불 | 달의 마술사
제2부 어디선가 나를 닮은 또 다른 아이도
바람의 눈 | 두꺼비 운동화 | 시험 끝나면 | 불꽃인데 | 막힌 말 | 윤이가 좋다 |
겨울밤 | 유리컵 | 달이 좋아요 | 이사 | 고물 자동차
제3부 큰 목소리로 이름 부르면
대팻밥 | 가을 저녁 | 하늘을 나는 가위 | 봄 햇빛 공수 대작전 | 등산 |
바람이 불어올 때 | 무릎으로 웃는다 | 무서운 가을 | 달팽이와 참꽃마리 |
요기 조기 저기 | 작은 것들 | 콩과 콩새와 별
제4부 흐린 날엔 구름책을 펼친다
웃지 마, 꽃! | 물 그림 | 뿔난 발톱 | 반달 | 비를 듣는다 | 늑대와 북적북적 도서관 |
봄비 내릴 때 구름 위에는 | 달력 | 나무도 안다 | 소나기 지나갈 때 | 연극
해설_송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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