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인은 대체로 ‘화난 표정’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90년대 이후 우리 스스로도 그러한 표정을 자각할 정도가 되었고,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화난 한국인’의 표정을 지적한다는 것이 언론에 심심찮게 거론되었다. 그때의 화난 한국인이란 대체로 오랜 식민통치를 겪어야 했고, 또 6.25라는 엄청난 비극적 상황에 이어 장기 독재체제를 반세기 이상 살아오면서 주눅 들거나 화내거나, 둘 중 하나의 감정이 그렇게 표정으로 굳어지게 된 것으로 진단하였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를 경험하고, 1997년의 IMF로 인한 크나큰 국난을 극복하면서 2000년대 이후로는 ‘화난 한국인’의 이미지는 거의 불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화난 한국인’은 다시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우리 사회의 ‘불공정’을 참지 못하고, 강요된 N포세대로서의 좌절감, 그리고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기후위기’에 빠지고 ‘제대로 된 일자리 없음’의 사회뿐이라는 현실 앞에 “분노”한다. 늙은이들은 늙은이들대로, 오늘날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일구어 온 주역으로서의 자긍심을 채 누리기도 전에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 퇴물로 취급되고, 경제성장의 성과로부터도 소외되어 빈곤으로 내몰리는 상황에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억울해 하고’ ‘분노’로 표출하고 있다.
2.
‘분노’를 표출한다는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만 할 때, 그것은 고질적인 “화병”이 되어 스스로를 좀먹고 그가 포함한 공동체,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사회와 국가에 이르기까지를 파괴하고 말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사실 “화병” 보유국이기도 하다. “화병”은 한국 고질병이(었)고, 고유병이(었)다. 한때 국제질병관련 연감에 Hwa-byung(화병)이라는 우리말 발음 그대로 실릴 만큼 세계적으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전히 한국의 특수한 지역적, 사회적 문화와 관련된 정신의학적 증후군으로 의학적 관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인에게 ‘화병’이라는 고유의 고질병이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문화적, 기질적, 시대적 등등의 여러 조건들이 중첩되고 복합되어 빚어진 일일 터이다.
가장 전형적인(전통적인) 화병은 오랜 가부장제하에 이중, 삼중, 사중(남녀차별, 고부갈등, 살림 책임, 남편외도)의 고통을 견뎌야 했던 며느리(여성)에게서 발견되곤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달라지면서 화병은 ‘신경쇠약’과 같은 현대적인 병명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현대 사회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3.
가장 최근의 전공의나 의대생들의 진료거부, 시험거부 사태에서 가장 극명하게 전면에 드러난 것은 “분노”였다. 그들의 분노가 정당한가 아닌가는 차치하고, 그 분노는 사회 전체를 어려움에 빠뜨린다. 그들의 분노는 여전히 진행 중인 부동산 관련한 분노의 ‘영끌 매입 사태’ 또 그로부터 불과 얼마 전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사태를 둘러싸고 ‘취업준비생’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졌던 “분노”, 광화문 광장을 뒤덮던 태극기부대의 분노의 물결, 나아가 작년 1년 내내 대한민국을 들끓게 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과 자녀 및 검찰총장을 둘러싼 거대한 분노의 촛불의 대립,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 그룹 사이의 치열하고 극악스러운 쟁투 등을 떠올려 보면, 한국 고유의 질병으로서의 “화병”은 오늘날 ‘분노’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 전체를 “불태울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타오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4.
화병은 ‘분노’만이 그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9개월째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최소 1년은 계속될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따른 우리 사회 전체의 ‘우울증’과 그 변형으로서의 ‘분노’ 역시 오늘 우리들 심리 깊숙이 ‘화병의 씨앗’을 심고 있다. 그것은 언제든 폭발적인 형태로, 그리고 파괴적인 양상으로 그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체를 파멸적 상황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 볼 수 있다.
<화병의 인문학>은 한국인과 한국사회에 깊숙이 뿌리 내린 ‘화병’을 “의료문학”이라는, 문학작품에 반영된 ‘화병’의 양상을 살피는 작업으로써 접근한다. 문학작품이 보여주는 친근성, 그리고 문학작품이 당대의 시대 현실을 전형적으로 반영하는 예술작품으로서 ‘화병’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생생하고, 그러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화병의 치유는 (서구)의료적인 접근보다는 사회적인, 관계적인, 문화적인 접근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한 실질적이며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것이다. 우선 거기로 나아가기 전에 ‘화병’이라는, 우리에게 당연하고 친숙한 언어에 대해서 좀 더 낯설게 접근하여, 그 실상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개인이든 사회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삶과 내 주변의 인간 군상의 행태를 밝게 설명해주는 도구를 갖게 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의료문학”과 “의료인문학”이 이렇게 우리 삶으로 다가오고 있다.
작가 소개
박성호
경희대학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동대학원에서 「광무 융희 연간 신문의 ‘사실’ 개념과 소설 위상의 상관성 연구」(2014)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근대 초기 서사를 연구하면서 매체와의 관계 및 서사 인식의 변화상을 폭넓게 조망하는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현재는 근대 초기 서구 의료의 도입과 더불어 발생하는 다양한 변화상에 대해 서사를 통해 접근하는 연구를 수행 중이다.
저서로는 대중교양서인 『예나 지금이나』(2016, 2인 공저) 등이 있고, 주요논문으로 「「소학령」을 통해서 본 이해조 연재소설의 변화와 한계」, 「유학생의 개인 체험 서술을 통한 1920년대 초반 글쓰기의 양상 고찰」, 「신소설 속 여성인물의 정신질환 연구」 등이 있다.
최성민
경희대학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문학평론가.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동대학원에서 「서사 텍스트와 매체의 관계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학의 매체를 확장하여, 게임, 웹툰, 영화, 드라마 등을 폭넓게 연구해 왔다. 현재는 문학과 대중문화콘텐츠를 통해 의료인문학 연구 범위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는 『다매체 시대의 문학이론과 비평』(2017), 『근대서사텍스트와 미디어 테크놀로지』(2012) 등이 있고, 주요논문으로 「판타지의 리얼리티 전략과 서사적 감염」, 「한국 의학드라마 연구 현황과 전망」, 「융합 시대 글쓰기 교육의 과제」, 「현대 신화 스토리텔링의 프로세스」 등이 있다.
목 차
0. 머리말
1. 총론: 우리는 왜 ‘화병’을 이야기하는가?
2. 근대를 만난 화병, 고난을 만난 여성 ─ 신소설 속 화병의 재구성
울화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 유행병 아닌 유행병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병 / 그들은 과연 어떻게 치유되었을까?
3. 욕망에 눈을 뜬 여성과 신‘ 경쇠약’ ─ 번안된 화병
다이아몬드가 낳은 병, 신경쇠약 / 욕망을 좇는 여성은 질병을 만난다
왜 하필 신경쇠약이었을까? / 번안된 소설, 번안된 질병
4. “나는 신경쇠약을 앓고 있소” ─ 여성에서 남성으로, 이야기에서 문학으로
누군가에게는 중2병, 누군가에게는 신경쇠약
여성에게서 남성으로, 오점에서 자랑거리로
번안된 질병의 재번안, 혹은 받아쓰기 / 신경쇠약이 쏘아올린 작은 공
5. 전쟁의 소용돌이와 화병 ─ 상처받은 심신(心身)
전쟁이라는 화(禍), 그리고 화병(火病) / 전쟁의 후유증으로서의 ‘화병’
베트남전쟁 용병의 상흔(傷痕)
6. 난장이 가족의 화병 ─ 산업화와 소외된 인간
한강의 기적 / 경제 성장의 이면들
도시인들의 중압감과 분노 / 목소리를 잃은 난장이의 선택
7. 젊어도 늙어도 화가 나는 사회 ─ 사회적 갈등과 화병
가정 폭력과 화병 / 정치적 사건들과 화병
나이와 화병(1) - 젊어서 화병 / 나이와 화병(2) - 늙어서 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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