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역마살이 끼었다는 표현은 아마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1970년대 초에 고향을 떠나면서 비롯된 이 역마살은 지금까지 나를 쫓아다니고 있다.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여섯 해 동안, 밤에는 울산에서 자고, 낮에는 부산에서 일하고, 주말은 서울에서 가족과 함꼐 보내는 세 도시의 생활을 지속함으로써, 나는 국내 이산가족의 선구자가 되었따. 1980년 서울로 자리를 옮긴 다음에도, 안산으로 출퇴근하기에 왕복 2백여 리의 일정을 어느새 10년째 되풀이하고 있다. 울산에서 부산 가는 길이나, 서울에서 안산 가는 길이나, 모두 교통 사고의 빈도로 전국에서 손꼽는 산업도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역마살이 16년에 아직도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흔들리는 찻간에서 책을 읽느라고 눈을 많이 버렸다. 다음에는 차를 타면 졸거나 잠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깐이지, 몇 시간씩 계속해서 낮잠을 즐기는 재능이 내게는 없다. 결국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거나, 시선을 차단하고 부질없는 상념에 머리를 맡겨버리는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재빠르게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돈을 벌고, 이권을 붙잡고, 명성을 날리는 삼십대 중반에서 사십대 후반에 이르는 인생의 황금기를 나는 대부분 교통 체증으 심한 산업도로의 버스 속에서 멍청하게 보낸 셈이다. 본의 아니게 혼자서 멀거니 보낸 이러한 시간이 역설적으로 나의 삶과 문학에서 차지한 몫도 없지는 않다. 독문학 연구에 전념할 실제의 시간을 빼앗아간 대신 몇 줄의 시를 갈고 다듬을 상상의 여유를 주었다고나 할까.
작가 소개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에서 수학했다.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한 이후 19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으로 녹원문학상을, 1983년 두번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김수영문학상을, 1990년 다섯번째 시집 『아니리』로 편운문학상을, 2003년 여덟번째 시집 『처음 만나던 때』로 대산문학상을, 2007년 아홉번째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으로 이산문학상을, 2011년 열번째 시집 『하루 또 하루』로 시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시집 『크낙산의 마음』『좀팽이처럼』『물길』『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누군가를 위하여』, 산문집 『육성과 가성』『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학술 연구서 『권터 아이히 연구』 등을 펴냈다. 그리고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인리히 하이네 시선 『로렐라이』 등을 번역 소개하는 한편, 영역 시집 Faint Shadows of Love(런던, 1991), The Depths of A Clam(버팔로, 2005), 독역 시집 Die Tiefe der Muschel(빌레펠트, 1999), Botschaften vom grunen Planeten(괴팅엔, 2010), 불역 시집 La douce main du temps(파리, 2013), 중역 시집 『模糊的旧愛之影』(북경, 2009) 등을 간행했다. 독일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 상(2006)과 한독협회의 이미륵 상(2008)을 수상했으며 2016년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독문학)이다.
목 차
1. 어떤 개인 날
2. 짬뽕이나 짜장면
3. 느티나무 지붕
4. 오솔길
5. 진양조
6.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해설ㅣ평범과 비범의 표리 조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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