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향해
넓고 깊게 열려 있는,
안음과 품음의 시
첫 시집 『여왕코끼리의 힘』으로 매혹적이고 날카로운 시 세계를 보여 준 조명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조명 시인의 이번 시집은 무려 12년 만에 신작 시집인 만큼 한층 깊어지고 단련된 세계를 선보이는 동시에 12년의 시간이 무색하도록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를 발현한다. 삶과 죽음을 넘어서고 식물과 동물을 아우르며 모든 사랑을 품에 안는, 넓고 깊은 시. 그렇게 조명은 시를 통해 모두를 안는다. 시로 인하여 전부를 품는다.
■ 사랑이라는 말이 있기 전, 파린
사랑이라는 말이 있기 전 파린이 있었지
우리는 파린의 계절로부터 왔다네
-「파린의 계절」에서
“파린”은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있기 전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말의 쓰임이 혼용되고 번잡해질 때, 파린은 “비음성적 언어”가 되어 뒤로 물러나 있었다.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에서 조명 시인은 “한번 태어나 볼까요?”라는 부드러운 질문으로 파린을 불러온다. 그것은 섬의 몸 곳곳에 닿는 바다의 살결처럼 상세하고 거대하다. 파린은 작디작고 크나큰 사랑이며 이 사랑은 색과 빛의 씨앗이 된다. “어둠 속 반짝임”이고 “사랑의 핵”이 된다. “오래된 미래”이며 “다시, 첫날”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파린은 결국 생명과 다름 아니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온갖 생명을 부르고 같이 호흡하며 받아 안는다. 식물의 언어로 고래의 몸짓을 포용한다. 이 모든 것은 시인이 파린의 어머니이기에 당연하고 자연스레 가능하다.
■ 삶과 죽음 이후에 본, 사슬나비
나는 사슬나비를 보았다
꽃다발과 꽃다발을 이어 주고 있었다
-「모든 꽃다발 속에는 사슬나비가 산다」에서
생명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끝과 시작, 그것은 시로 화하여 모든 것을 품은 파린에게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끝은 시신의 모습으로 불쑥 나타난다. 앞마당 같은 화장터에서도, 저 멀리 바라나시의 복판에서도 시신은 끝을 선언하듯 나타나 제 몸이 불살라지길 기다린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에서부터 불면식의 타인의 그것까지 목도한 시인은 “한통속의 꿈속에 다른 꿈을 보았”다는 진실과 마주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자유롭게 비행하는 사슬나비를 본 것이다. 사슬나비는 산 자의 에너지와 태어나지 못한 자의 열망과 삶을 다한 자의 시간까지 자유롭게 오간다. 조명의 시는 그 날갯짓의 반짝임이자 비통함이고 환희이자 응답이다. 이윽고 시인은 파린의 세계에서 사슬나비를 만나 신을 잉태한다. 시라는 신이 다시 파린이 되고, 나비가 되는 영겁의 순환으로 시인은 독자를 데려간다. 조용히 그리고 강인하게 내미는 그 손을 마다할 도리가 없다.
작가 소개
대전에서 태어났다. 2003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여왕코끼리의 힘』이 있다. <예버덩문학의집> 대표.
목 차
세족 11
칸나 12
청동 구름을 타고 13
벚꽃 시대 14
마야의 꽃들 16
구근(球根) 17
파린의 계절 18
파린의 쇄빙선 20
애재라, 애저 22
목단꽃 타투 23
그렁그렁 별들아 24
1992QB1-얼음주먹별 26
늙은 등대지기는 무적(霧笛)을 울리지 않는다 28
태양 양육법 29
그류 30
슬픔의 유역에서 32
악어와 악어새의 공놀이 34
화산강이 흐르는 대지의 레퀴엠 36
연(蓮) 38
설해목 39
목단꽃 전사 40
왕오색나비와 애들의 정원 41
아바타 트리 42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44
고마나루 연가 ― 금강시편 45
청벽산을 오르며 ― 금강시편 46
낙화암 서정 ― 금강시편 47
주먹도끼 만드는 사람 ― 금강시편 48
서랍 속 미리내 49
태양은 금시조처럼 50
석유야 석유야 52
고래행 54
자귀꽃나무가 서 있는 정원 56
저물녘, 너도밤나무에게 57
그 사슴소년 이야기 ― 녹야원(鹿野園)에서 58
모든 꽃다발 속에는 사슬나비가 산다 60
람람싸드야헤 62
흑광, 호루겔 피아노에게 66
즐거운 프렉탈 67
소동파의 돌 68
세멜레의 창작 70
주 72
길돌을 놓으며 73
폐선처리반원들 74
모자(母子) ― 마야부인의 마음으로 76
마즐량 해협의 아이 79
하양알 애송송 84
신을 낳는 여인들 85
안개의 페이지 87
뿌리 해변에서 88
작품해설│김영임
생물과 물리의 시어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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