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자유가 자유를 억압하고, 평등이 혐오를 부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촛불 이후 4년, 정의와 공정의 가치가 금세라도 실현될 것 같았던 우리 사회가 정작 마주친 것은 한 치의 타협도 없는 가치들의 싸움이었다. 계급, 세대, 성별 등 저마다 다른 기준으로 나만의 공정을 주장하느라 지금 우리 사회는 호된 몸살을 앓고 있다. 생각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할수록 갈등이 심해지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차이가 존중되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대접받을 권리를 주장한다. 하지만 오늘의 갈등과 혐오는 오히려 평등과 다양성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모두 똑같은데 내 몫만 없다는 인식이 그 몫을 더 배당받은 이에 대한 질시와 혐오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목표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였지만, 결과는 ‘모두가 불행한 사회’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 책 『가치 전쟁』은 민주 사회가 자주 봉착하는 이런 역설적 상황을 우리 현실에 대입해 이해하고자 하는 책이다. 그간 기술철학이나 학문이론 등의 주제에 천착해온 숙명여대 박승억 교수가 이번에는 ‘다양성 사회에서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오래됐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를 살펴본다. 홉스와 로크에서부터 롤스와 샌델에 이르기까지 앞선 사회사상가들의 논의를 통해 우리의 사회적 삶을 설득력 있게 분석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은 현실 사회를 설명하는 데도 적절하다. 좋은 사회는 구성원이 함께 만족감을 누리지만, 불행한 사회는 개개인이 제각기 ‘피해자’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민주 사회일수록 이런 불만의 가능성이 크다. 19세기 미국을 관찰한 토크빌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조건이 신분과 계급 같은 가장 큰 차이를 없애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주 작은 차이에도 첨예한 반응을 하게 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차이에 대한 민감한 인식이 억울함을 낳고, 억울함이 혐오를 부르는 것이다(89쪽).
나아가 모두가 평등하다는 조건은 능력주의의 근거로도 이용된다. 이론적 평등과 달리 현실에 엄존하는 불평등을 설명하는 길은 능력의 차이밖에 없기 때문이다. 능력에 따른 차별을 ‘공정’이라 착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치 전쟁』은 바로 이런 역설들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저자는 현대의 자유주의적 ‘평등’ 사회가 겪는 이런 병리적 상황에 착상하여, 현재 한국 사회가 겪는 문제를 ‘가치의 대립’이라는 구도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 왜 ‘가치 전쟁’인가?-사회적 갈등의 여러 양상들
개개인의 자유가 중요한가, 평등이 중요한가? 출발 조건이 중요한가, 절차가 중요한가? 현 세대의 행복인가, 미래 세대의 희망인가? 우리 사회의 흔한 대립을 보노라면 중요하게 짚이는 지점이 하나 있다. 현실 자체보다는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현실 인식에 갈등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29쪽) 그래서 저자는 “가치 전쟁의 형식은 이론적 갈등이고, 그것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평등하기 때문”(47-48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전례 없는 가치 전쟁이 하필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자는 악셀 호네트(22쪽)와 웬디 브라운(73쪽)의 말을 빌려, 신자유주의적 풍조가 사회 변혁보다는 고립된 개인들 간의 경쟁으로 관심의 초점을 옮겼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자유 대 평등, 개인 대 공동체, 현재 대 미래와 같은 오랜 딜레마가 여전히 문제인데, 이런 상반된 가치들의 균형을 찾기보다는 제로섬 게임으로 대립의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실 분석은 3장 ‘세 가지 딜레마’에서 흥미롭게 제시되고 있다.
■ 반성적 평형-역사의 변주로부터 얻는 지혜
사회적 딜레마라고는 하지만 저자는 그것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개인 대 공동체’ 또는 ‘이기주의 대 이타주의’로 요약하고 있다(187쪽). 개인이 중시되고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는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하게 공동체적 이익과 대립하고 있다. 개인주의는 확실히 시민의 자율성이라는 측면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인주의는 속류 진화론 등의 과학적 주장을 등에 업고(199쪽) ‘본성’이라는 이름으로 이기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한 것도 사실이다. 서로 경쟁하는 개인들의 이기심이 사회를 발전시킨다는 오랜 믿음과, 공동체의 안녕이 개인의 자유도 보장할 것이라는 주장이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존 롤스의 ‘반성적 평형’이라는 개념을 소개함으로써 이러한 대립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오늘의 갈등 상황을 이해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155쪽).
개인의 욕망들을 인정하면서도 상호 배려라는 사회적 윤리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그간 여러 사회이론가들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이 책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대한 믿음을 반박한 로버트 오언의 실험(202쪽)을 비롯하여, 존 롤스, 매킨타이어, 마이클 샌델 등의 주요 이론가들과 아미타이 에치오니, 필립 페팃 등의 새로운 주장까지 낱낱이 소개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그리고 우리만의 친근한 어휘로서 ‘얌체 없는 사회’라는 최소 규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한다(245쪽).
■ ‘바람직한 시민’이란 누구인가?-최소주의적 해법
지금까지의 사회이론들이 개인의 이기심과 공동체 이익 사이의 가치 전쟁에 대하여 만족스런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계산적 합리성’이라는 사고방식에 묶여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247-248쪽). 각자의 이익 추구를 전제하고 공정한 분배 방식을 찾는 사고법으로는 ‘헌신’ ‘양보’ ‘최선의 노력’과 같은 시민적 미덕을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합리성과 구별되는 의미의 ‘직관’을 통해 시민 개인들의 바람직한 특성을 정의해 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얌체’가 되기 싫어하는 사람들, 불공정한 사회에 내가 가담한 게 아닌가 하는 ‘부역자 의식’에 시달리는 사람들, 이타주의를 실천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이기적 행위가 무엇인지는 아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저자는 한 마디로 ‘선량한(착한) 시민’이라 부를 수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자칫 순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런 해법을 저자가 제시하는 근거는 ‘판단중지’와 ‘본질직관’이라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286-287쪽).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이 제시한 이 개념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나 이기심과 같은 가치들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보는 사고능력(판단중지)과, 늘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도 변치 않는 본질을 가려낼 줄 아는 직관능력(본질직관)을 가리킨다. 당연한 것에 대한 회의적 태도와 상식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가치를 직관적으로 가려내는 능력은 시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질이다. 저자는 ‘최대주의’로는 풀리지 않는 사회적 갈등을 ‘최소주의’로 풀 수 있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숙의민주주의’나 ‘민주적 시민의 탄생’도 이로부터 가능하지 않을까?
작가 소개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현상학과 학문이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트리어대학교 박사후연구원과 청주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철학연구회 논문상’과 한국연구재단의 ‘창의연구논문상’ 등을 수상했다. 현실사회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해법, 첨단기술과 인문학의 관계 등에 관심을 두고 연구 중이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이솝 우화로 읽는 철학 이야기』, 『학문의 진화』, 『렌즈와 컴퍼스』 등과 여러 편의 공동저작이 있다.
목 차
머리말
1장 다양성 사회에서 살아가기
그가 갑자기 퇴사한 이유
재스민 혁명에 대한 회상
경쟁하는 가치들
가장 공평한 방법
다양성 사회에서 평등의 대가
2장 가치 전쟁
왜 ‘가치 전쟁’인가?
평등의 역설
관용의 사회에서 갈등의 사회로
분류의 정치학과 혐오
과열된 경쟁, 혐오의 앰프
세대 갈등에 관한 아주 직관적인 오해
세대 갈등의 새로운 양상들
연대의 이중성
부역자 의식이라는 부산물
차라리 무관심, 아니면 혐오?
불안, 무기력증의 원인
3장 세 가지 딜레마
선택할 수 없는 문제들
자유인가 평등인가
개인인가 공동체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
입체적 시선으로 보기
자연 상태와 사회 계약
딜레마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자유의 이중성
대가 없는 해방은 없다
개인주의, 그 오랜 투쟁의 역사
‘자유’라는 이름의 종교
20세기에 대한 회고, 그리고 데자뷔
반성적 평형 - 역사의 변주로부터 얻는 지혜
당면한 위기 - 전체주의의 망령과 이기주의
시민 개인으로부터 시작하기
4장 강요된 본성
개인주의인가, 이기주의인가
강요된 본성
이기주의 대 이타주의 논쟁에 붙여
과학은 답을 주지 않는다
과학 교양서의 잠재적 위험
오언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밀레니얼 세대의 현명함
5장 사잇길을 찾아서
스미스 대 폴라니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잇길은 있는가?
문제는 ‘균형’이다 - 이론적 지식과 정치적 지혜 사이
정치의 회복과 무임승차 문제
‘얌체’를 없애는 합리적 방법은 가능한가?
자율성이라는 이념
성숙한 시민들을 만들 수 있다면
새로운 공동체적 규범을 찾아서
6장 선량한 시민들의 세상
절차적 민주주의보다는 삶으로서의 민주주의
착하기만 해서도 문제
선량한 시민들의 건강한 개인주의
상식적 가치와 직관에 기대어
맺음말: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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