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결핍의 시대를 건너는 고독, 그리움 그리고 풍자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자인 박성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어쩌자고 그대는 먼 곳에 떠 있는가』가 시인동네 시인선 141로 출간되었다. ‘현대시조의 미래’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박성민의 시는 평시조와 사설시조 양자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정형율의 평시조와 정형율을 일탈한 사설시조라는 외적인 특징뿐만 아니라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내적인 특징, 곧 평시조의 정형적인 세계관과 사설시조의 현실풍자의 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
■ 해설 엿보기
사설시조의 현실풍자로써 한국사회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평시조의 화자가 꿈꾸며 그리는 세계가 초월적이자 보편적 가치의 세계라는 점에서 박성민의 시조는 단지 전통적 장르로서 시조의 현재화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초상으로써 동시대성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결핍의 시대에 고독한 인간의 초상화를 노래하면서 상실의 시대인 현대에서 꿈꾸는 자아의 그리움으로 평시조의 절제미를 그려낼 뿐만 아니라, 결핍과 상실로 인한 문제적 현대에 대한 풍자로 사설시조의 특징을 동시대화하고 있다.
내 영혼의 빈 뜰에
울고 있는 새 한 마리
얼어붙은 날갯죽지
눈 쌓인 나무처럼
오늘은
울음도 잊은
깊은 눈의 새 한 마리
- 「백 년 동안의 고독」 전문
시집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이 시는 평시조의 정형을 잘 지키고 있다. 외적인 정형뿐만 아니라 절제미로서 내적인 시조의 정형 또한 잘 견지한다. 초장에서 “내 영혼의 빈 뜰에/울고 있는 새 한 마리”라고, 고독한 자화상을 백 년 동안이나 고독한 역사에 비유하여 일괄하고 있다. 초장이 주제를 압축하고 있고, 중장과 종장에서 초장에서 일괄한 주제를 각각 풀어내고 있다. “내 영혼의 빈 뜰”은 중장의 “얼어붙은 날갯죽지/눈 쌓인 나무처럼”에 비유되어 만물이 얼어붙은 겨울처럼 고독한 자화상을 상징한다. “울고 있는 새 한 마리”를 종장에서 “오늘은/울음도 잊은/깊은 눈의 새 한 마리”에 비유하여 울고 있던 새가 울음조차 울지 못하는 깊은 슬픔 혹은 깊은 고독에 침잠하였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때 박성민이 백 년 동안이나 고독한 까닭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할 일이다. 시가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과 무관할 수 없다면, 그리고 이 소설이 현대문명에 압도당한 마콘도 마을의 설립과 쇠퇴라는 대립구도로 인류의 문명사를 상징적으로 그렸다면, 박성민이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말하는 고독의 원인도 현대문명사에 압도당한 휴머니즘과 무관할 수 없다.
현대의 우리가 고독한 까닭이야 ‘신이 죽어버린 시대로서 동시대성’에도 있겠고, 실존주의적 단독자로서의 고독에서도 찾을 수 있겠다. 그럼에도 단지 고독한 현대의 주체가 아니라 ‘백 년 동안’이나 고독한 주체이므로 거기에는 인류의 역사가 내재한다. 역사적 전개에서 비롯된 개인의 고독은 그 까닭을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함이 보다 타당하다. 때문에 현대에 와서도 시조문학이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까닭 또한 담지하고 있다. 결핍의 시대인 현대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환기를 위해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고 역설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의 내시경이 내 몸속을 지나간다
그녀의 집 앞에서 흘리던 눈물인가 불 켜진 창을 향해 몰려들던 눈송이들, 그 처마에 두고 온 시퍼런 내 청춘이 시린 사랑 한 방울로 목덜미에 떨어진다 그렁그렁 외로움에 밤새 떨다 입술 깨문 밤, 사내의 쓸쓸함이 태어나던 그 골목, 기다림의 몸속에선 오래된 피가 고였다
아직도 송곳이 되어 내 가슴을 찌르는
- 「고드름」 전문
화자의 내면을 압도하는 것은 슬픔 같은 고독 그리고 외로움에 따르는 지속되는 울음이다. “눈물의 내시경이 내 몸속을 지나간다”고 하듯이 눈물에 비유된 슬픔, 고독, 외로움 등은 화자를 울게 하는 원천이며 구체적으로 보면, 고독했던 청춘의 시간들이다. “그녀의 집 앞에서 흘리던 눈물”이 “사내의 쓸쓸함”으로, “아직도 송곳이 되어 내 가슴을 찌르는” ‘고드름’으로 화자의 몸속을 통과한다. 고드름에 비유된 고독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화자의 개인적 차원에 있는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까닭이 무엇일까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청춘을 헐벗은 채 보낸 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사회적·국가적·시대적 차원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화자의 고독은 청춘들이 고독한 사회상 및 시대상으로 확장된다.
- 진순애(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쌍봉낙타의 꿈』 『숲을 金으로 읽다』가 있다.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등을 수상했으며, 2020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목 차
제1부
데자뷔 • 13
고드름 • 14
드라이플라워 • 15
숲을 金으로 읽다 • 16
목도장 파는 골목 • 17
동승(童僧)이 되어 • 18
七七 • 20
결승문자(結繩文字)를 읽다 • 21
격렬비열도 • 22
청사과 깎는 여자 • 23
겁(劫) • 24
사랑니 • 25
촛농 • 26
김광석 • 27
점집 골목 • 28
제2부
시인의 말 • 31
살아男子 • 32
사랑 • 33
당신이라는 접속사 • 34
월하정인 • 35
시인보호구역 • 36
지문 • 37
道를 아십니까? • 38
묵독(默讀)의 시간 • 39
혀 2 • 40
말을 타다 • 41
숟가락 • 42
최불암 • 43
적란운 • 44
제3부
두부는 반듯하다 • 47
흑묘백묘(黑猫白猫) • 48
비대면의 가을 • 49
3인칭 전지현적 작가시점 • 50
돈 세상 • 51
괄호 안에 갇힌 사람들 • 52
헬조선왕조실록 • 54
두부 • 55
사물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음 • 56
불 또는 뿔 • 57
귀신이 산다 • 58
최미진은 왜 나를 • 59
호모 텔레포니쿠스 • 60
오늘의 교통정보 • 61
좋아요 33, 싫어요 18 • 62
제4부
거북 • 65
죽은 책 • 66
코끼리 • 67
벌교 거시기 꼬막 • 68
이사금 • 69
달의 슬라이더 • 70
혀 • 72
손금 • 73
윤슬 • 74
손 없는 날 • 75
느시 • 76
고양이는 그레코로만형으로 • 77
유목의 시간 • 78
팽목항에 내리는 비 • 79
보름달 • 80
제5부
빙폭(氷瀑) • 83
안경 • 84
네안데르탈인 • 85
서늘한 족보 • 86
스프레이 • 88
곤달걀 • 89
가을날의 몽타주 • 90
두껍아 두껍아 • 91
오늘의 운세 • 92
계백(階伯) • 94
배꼽 • 95
소녀 • 96
뼈 • 97
백 년 동안의 고독 • 98
해설
결핍의 시대를 건너는 고독, 그리움 그리고 풍자 • 99
진순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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