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한국 최초 장편 SF 《완전사회》의 작가 문윤성,
사후 20년 만의 첫 SF 소설집
인류의 멸종 후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의 모험 활극 <낙원의 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에 대한 복수를 다룬 <소련공습>, 월드컵 결승전에서 만난 한국과 프랑스의 국가적 대결을 다룬 <월드컵 특공작전>을 비롯, 문윤성 작가가 평생에 걸쳐 쓴 수십 편의 작품 중 한국 고전 SF의 진수를 보여줄 8편의 중단편 SF를 모았다.
“하여간 이것을 쓴 사람은 굉장한 천재가 아니면 엄청난 도적일 것”
- 한운사, 극작가
새로운 거울 조각에 비친 의미들
문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러한 것들을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작가가 살아낸 시대의 의미들이 작가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다가 작품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보았을 때 근대 과학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변화의 양상들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작가들에게 삼투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요소들에 기민하게 반응해 온 SF 역시 사회를 반영한 거울로 작용한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되어온 사실인데, 냉전 시기 경쟁체제에서 무기에 적용된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을 통한 다양한 첩보전의 상상력들은 과학기술이 시대의 문제들에 미치는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1957년 ‘스푸크니트 쇼크’ 이후에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 우주 경쟁에서 과학기술은 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이후로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표상들은 꿈과 환상을 넘어서 현실의 문제들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것이었고, SF 작품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현실을 조명하는 문학 형식이었다. 1960년대의 ‘뉴웨이브’나 1980년대의 ‘사이버펑크’와 같은 새로운 갈래들은 SF가 변화하는 당대의 현실과 긴밀하게 조응한 대표적인 결과들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그러한 모습들이 좀처럼 나타나지 못했다. 한국의 SF는 도입될 당시부터 서구의 과학기술에 대한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기능해 왔고, 이후로는 냉전 이데올로기 대립의 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는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특수한 상황이자 아픔이다. 현대사의 상당 부분 동안 거대 담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근대 국가로의 이상이 좌절된 식민지 시기를 지나 독립을 지향하면서 사회의 변화를 고찰하는 담론을 자리를 잡기 어려웠고, 이후로 전쟁과 분단까지 이어지던 이데올로기의 견제를 벗어나고 나서는 민주화를 위한 거대담론들이 문화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서 산업화와 급격한 사회구조의 변화에서 불거진 노동자와 계층의 문제에 대한 통찰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들은 그것을 추앙하여 국력을 증대하는 이상향과 인간성을 저해하는 지양점으로 극명하게 나뉘어 인식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두 요소가 상호연관을 갖는 의미들은 그동안 한국에서 거울의 깨진 부분에 비치는, 확인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런데 문윤성의 《월드컵 특공작전》에 실려있는 8편의 중단편 소설들이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모양들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 실린 소설들은 기본적으로는 추리소설의 문법들을 토대로 구성되지만, 문제가 발생하고 해결되는 과정에서는 철저하게 근대 과학기술에 의한 사유가 적용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과학기술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연관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해결 역시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한다고 여기고 있다. 문윤성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과 얽혀있는 지점들에 대해 통찰하고 있다. 게다가 과학기술로 인한 이상향의 구현을 마냥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현실에서의 한계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들을 사고실험할 가능성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는 그가 《완전사회》의 세계관을 설정하면서부터 줄곧 견지해 왔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월드컵 특공작전》에 실린 소설들을 통해 우리는 1970~80년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이슈들에 대한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통찰과 가능성을 재고해 볼 수 있다. 소설에서 이러한 의미들이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적인 지점들은 문윤성 개인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당대의 사회적 인식을 SF의 장르적 관습(convention)으로 능숙하게 구현한 결과이기도 하다. 특히 ① 과학자들의 영향력이 강화된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 ② 국가와 민족의 경계가 해체되고 세계인 혹은 세계시민에 대한 담론의 강조, ③ 전쟁이나 폭력은 문명화되지 못한 것이며, 구시대적인 악습이라는 인식들은 SF의 하위장르인 유토피아(Utopia) 담론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SF라는 장르가 현실을 반영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변방이라고 불렸던 한국이 세계사회의 중심에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거나 선도하는 부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당시의 한국 사회가 열망하던 이상향이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열망이 반영되어,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을 능가하는 기술을 한국이 가지고 있다는 상상력들은 작품 전체에서 나타나는 것 역시 특징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러한 기술들이 국제사회에서의 패권 등을 차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인도적인 일에 사용되어야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는 메시지를 반복한다. <덴버에서 생긴 일>에서 물질에서 기억을 추출하는 기술을 통해 미국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한국인을 구해주는 모습이나, <소련 공습>에서 아직은 현실화되지 않았던 스텔스 기술을 활용해 KAL기 폭파 사고에 대한 문제 해결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은 이전까지 과학기술의 지향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폐수처리장의 조화>나 <작은 마라섬의 큰 경사>, <아름다운 다도해>와 같은 작품들에서도 발달된 과학기술로 인해 이전까지는 세계 어디에서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이를 국가적인 헤게모니의 형태로 구현하지 않고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문제의 해결들로 구현하고 있는 것은 특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일종의 알레고리로 당대의 현실에 대한 비판지점들 역시 발견된다. 이는 로즈메리 잭슨(Rosemary Jackson)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환상적인 세계를 그리면서 구현되는 지점이자, SF가 가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덴버에서 생긴 일>에서 추측에 의한 혐의만으로 인신구속을 하거나 고문을 가하는 것이나 연구실에 도청 장치가 있을 것이라 당연하게 여기는 것, 학자를 노예로 여기고 있는 나라 등에 관한 서술들은 그 당시 한국이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폐해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상상력으로 구현된 사회상을 통해 나타나는 ‘자유’와 ‘과학기술’,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상호연관성을 기반에 둔 통찰은 당대 한국 문학 작품들에서 쉬이 발견할 수 없는 귀중한 지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1980년대에 발표된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시대적인 한계 등도 존재한다. <월드컵 특공작전>에서 보여주는 로봇 기술의 경이로움의 결론에서 상대적 우위를 주장하면서 ‘자연인’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나, 프로스포츠에 적용되는 자본의 논리를 부정적으로 보고 이상적인 스포츠맨십만을 주장하는 것, <소련 공습>에서 환경에 대한 지배에서 벗어나 환경을 지배하는 인류사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담론 등은 20세기 이후에 이미 새로운 의미들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지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가치들에 대한 사고실험이나 가치 너머의 진보적인 지향점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사회가 변화해왔던 새로운 궤도들을 마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는 거울의 깨진 부분에 비추고 있어 확인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거대 담론이 아니라 과학기술에 의한 사회의 변화 양상과 기술의 일상화가 진행되면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나타났던,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의 그 시대의 다양한 의미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하게 변해온 궤도들을 토대로 우리는 우리 사회의 더 나은 지향점들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인 외삽(extrapolation)을 할 수 있다. 이전 시대의 SF 작품들을 우리가 현재에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지용, 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본명은 김종안(金鐘安). 1916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시절 지금의 경복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제2고보에 재학 중 일본인 교사에게 반항하다 퇴학당하고,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공사장, 광산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소설과 시를 썼다. 독학으로 설계와 배관을 익혀 뒤에 ‘대승기업사’라는 공조회사를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1946년 단편 <뺨>을 <신천지>에 발표하였으나 문단 활동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51세가 되던 1965년 <주간한국>의 제1회 추리소설 공모전에 《완전사회》로 당선, 1967년 같은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완전사회》는 한국 최초의 본격 SF 장편소설로 평가받으며, 당시 기성 문단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작가는 한국추리작가협회의 초창기 멤버로도 활발히 참여하며 ‘추리소설의 과학화’를 늘 주장했고 탄탄한 과학적 설계를 바탕으로 많은 중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장편소설로 《완전사회》, 《일본심판》, 《사슬을 끊고》가 있으며, 희곡 《상속자》와 장편 서사시《박꽃》을 내기도 했다. 80년대와 90년대에 발표한 중단편을 묶어 소설집 《월드컵 특공작전》을 출간했다. 2000년 8월 24일 수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5세.
목 차
02_월드컵 특공작전_45
03_소련공습_97
04_폐수처리장의 조화_171
05_작은 마라섬의 큰 경사_193
06_히말라야 여단_209
07_아름다운 다도해_273
08_낙원의 별_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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