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코로나19로 대표되는 바이러스가 근대를 넘어 진정한 ‘현대’로의 진입을 재촉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코로나의 등장을 역사 발전 과정 안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현장인 지역문화가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예측하기 위해 더 정교하게 현 단계를 진단하고자 했습니다. 한 해가 지나는 시점에서 철 지난 얘기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이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지역문화원은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고, 어떤 형식으로든 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어야 합니다.
문화원은 과거를 다룹니다. 과거를 표현하는 향토, 전통, 역사는 지역문화원이 사용하고 있는 친숙한 주제어들입니다. 이제 향토는 ‘마을’이라는 말로, 전통은 ‘지역문화’라는 말로, 역사는 ‘일상’이라는 말로 전환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는 세계화, 국제화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체제의 한계를 노정했고, 로컬 문화의 가능성이 전면적으로 부각되는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문화를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담론이 아닌 로컬 문화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다.(‘책머리에’ 중에서)
다시 지역문화를 생각한다
코로나19 이후에 대한 ‘큰’ 이야기들의 설왕설래는 있었지만, 지역을 바꾸자는, 그것도 문화를 바꾸자는 담론은 흔치 않았다. 이 책은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시간이 우리의 일상에 끼친 영향을 성찰하면서, 그 일상이 이루어지는 지역의 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인 제언들로 꾸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추상적인 ‘운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글들은 역사적 관점에 서 있기도 하지만 전체의 결론이랄까, 또는 방향은 지역문화의 ‘전환’을 말하고 있다. 얘를 들어 황민호 『옥천신문』 상임이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너지, 물, 식량 등 모든 부문에서 자립의 관점이 필요하다.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자치와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인식되고 있지만, 자립의 가장 큰 부문인 ‘자급’과 관련해서는 요원하다. 아직까지도 중앙 집중의 방식, 대량의 방식에 익숙하다. 이는 효율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근대의 기업 방식을 답습화한 결과인데, 집중보다 분산이 필요하다. ‘효율’과 ‘전문성’을 강조하며 ‘더 크게’를 강조한 결과 가장 중요한 ‘감수성’과 ‘자기제어’를 잃어버렸다. 국가의 식량 자급이 실현되려면 각 지역의 식량 자급이 되어야 한다. 식량뿐 아니라 에너지, 수자원에도 이를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49)
지역 간 문턱을 무시한 국가주의, 나아가 세계화나 도시적 삶의 비대화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사회적, 물질적 조건이 된 사실을 떠올려 보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자립’이 기후위기로 인해 예상되는 팬데믹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대응 방식이 됨은 명약관화하다. 사회적, 물질적 거리두기가 단지 은유가 아니라 팬데믹에 대한 완곡하지만 실질적인 대응 방식인데,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바로 ‘지역화’, ‘자립’이 된다. 무엇이든 균질화, 동일화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한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우리의 삶이 지역 단위에서 구체적으로 변할 때만이 우리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양진호가 말하듯이 우리의 삶이 지역화 되었을 때만이, “인간(人間)은 물론이고 물간(物間)을 재고”할 수 있으며 “인간과 물질 사이를”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지역화 된다는 것은 구체적인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물의 관계가 재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거리두기”라는 것은 관계의 절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이 강제한 수탈적인 ‘거리’에서 사람과 사물이 서로 모시는 ‘거리’로 전환함을 의미한다. 이동준이 ‘마더 텅(mother tongue)’을 말하는 것도 국가와 자본이 강제한 ‘거리’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거리’로 전환하자는 말과 같다.
처음에는 시골말이었던 독일어와 불어, 앵글로 색슨어가 국가 언어가 되면서 이들 언어는 또다시 라틴어의 지위를 차지하고는 무수한 지역 언어, 사투리 속에 새겨진 지역의 문화를 박해하고 획일화시켜서 국가의 통제 속에 가두려고 했던 것이다. 마더 텅은 영어 사전의 번역처럼 ‘모국어’가 아니라 어머니의 젖을 빨며 어머니의 혀에서 울리는 소리로 느끼는 엄마의 말이기에 ‘모어(母語)’라고 번역해야 한다.(75)
‘지역화’, ‘자립의 관점’에 대한 문제의식이 물질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고 이렇게 언어적 층위까지 뻗어 나가는 것은 이 책의 특징이기도 한데, 고영직에게는 “말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말무덤의 부활 같은 예술적 퍼포먼스가 필요하다. 문화예술적 의례(ritual)의 힘은 협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와 같은 언술로 나타난다. 이런 관심의 확장은 3부에서 집중적으로 펼쳐지는데 ‘아카이브의 인문적 가치’라든가 ‘기록 주권’이라는 개념은 그런 맥락에서 제시된다.
‘기록 주권’과 ‘기록 민주주의’
이는 근대성에서 지역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1부의 주제와 같은 연속선상에 있다. 다시 이동준은 서구의 자본주의 문명이 강제한 근대성을 ‘내가 사는 지역’의 관점에서 다시 성찰하자고 제안한다. “피와 살이 느껴지는 생활 현장의 발견”에서 “자기다움의 발견”이 가능한데, “지역을 발견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요, 더 나은 지역의 미래 모습을 함께 꿈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역 아카이브’는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운동인 셈이다.
아키비스트는 현장을 바라보며 그 현장성을 살려내는 방식의 기록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료를 바라보는 관점, 그 자료에 다가가는 접근 방식, 그리고 그 자료를 어떻게 분류하고 정보로 조직하고 지식으로 재구성할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이제 아카이브는 단순히 자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인식의 범위가 확장된다. 오늘날 아카이브 개념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은 아카이브가 그 지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양한 삶을 보여주는, 우리들 자신의 삶에 대한 관점임을 말해주고 있다.(168)
‘국가 아카이브’에서 ‘지역 아카이브’로의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기록 주권’을 지역민이 회수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히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경래는 “2004년에 시작된 호주 빅토리아주(Victoria州)의 주립 아카이브와 원주민 부족 쿠리(Koorie)의 공동체, 그리고 모나시 대학(Monash University)의 학제 간 프로젝트인 ‘신뢰와 기술 프로제트(Trust and Technology project)’”를 소개하면서 ‘기록 민주주의’가 가능함을 역설한다. 즉 국가나 중앙정부가 예산 지원을 했다고 하더라도 지역민과 기록물을 공동으로 ‘소유’ 함으로써 “원주민의 기록 소유권 회복 즉 백인 관료나 저작자뿐만 아니라 원주민을 원주민 관련 기록의 소유권자로 인정하는 기록의 ‘공동소유권’ 체계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안 제시가 외국의 사례로서만 끝나서는 안 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기록 민주주의’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인 모색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역 문화원의 역할이 부상하며 이는 공허한 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사례가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지역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시민기록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지역적 특성은 자발적 창의적 주민들의 참여에 의해 만들어지며, 지속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적 운영에 기초한 참여가 필수적 요소입니다. 의정부문화원의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지역 주민 인프라 중심의 마을 기록 활동의 일환으로 의정부 마을 기억 찾기 프로젝트 <義記to合(의기투합)>이라는 사업이 그것입니다.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다양한 시각의 이야기로 기록하는 10년 장기 프로젝트입니다.(195)
코로나19의 팬데믹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해, 지역과 지역문화의 의의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로 나아가지만, 선언에 그치지 않고 ‘지금-여기’서 직접 실천할 수 있는 대응을 모색하고 있는 이 책은 풀뿌리 활동가들이나 문화운동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줄 것이다. 단순하게 ‘지역 아카이브’가 중요하다는 획일적인 결론이 아니라, 지역화와 지역문화가 어떻게 팬데믹 상황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모색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전개 양상만 살펴봐도 명확한 일이다.
저자 소개
고길섶 문화비평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소종민 문학평론가
손경년 前부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양진호 철학자/인문학교육연구소
윤한택 동국대 연구교수
이경래 한신대 기록관리대학원 교수
이동준 이천문화원 사무국장
이영남 한신대 한국사학과 조교수
이용원 월간 『토마토』 발행·편집인
최서영 (주)더페이퍼 대표
최영주 경기도문화원연합회 사무처장
황민호 <옥천신문> 상임이사
작가 소개
목 차
[책머리에]
코로나19 이후의 지역문화원 … 4
1부 코로나19 시대 ‘전환’을 생각한다
우리 집에 ‘SSG’이 쓱 들어왔다(최서영) … 15
포스트 코로나 또는 위드 코로나 시대와 역사 전환(윤한택) … 23
사회적, 아니 물질적 거리에 관하여―‘삥땅 사건’을 돌아보며(양진호) … 31
코뮌으로 만나자(황민호) … 42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이영남) … 54
맞잡은 손의 따뜻함과 평등의 발견(김풍기) … 69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성찰(이동준) … 63
2부 회복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말무덤[言塚]’ 퍼포먼스를 상상한다(고영직) … 81
삶의 회복을 위한 정책은 가능한가(고길섶) … 92
문화도시와 시민의 자발성(손경년) … 104
그날이 오면, 우리는 다시 춤출 수 있을까(이동준) … 114
안전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확장하자(김찬호) … 135
산골 마을을 바꾸는 ‘군겐도(群言堂)’ 정신을 배우다(최서영) … 142
3부 아카이브의 인문학
아카이브의 인문학(이동준) … 153
공동체 아카이브의 거버넌스와 기록 주권(이경래) … 170
단편적인 일상, 주름진 이야기들(소종민) … 179
지역문화원이 지역을 아카이빙한다는 것(최영주) … 188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다는 것(이용원) … 198
환대하는 마을 환대하는 마음(고영직) …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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