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이제야 사는 것 같았다.
숨 쉬는 것 같았다.
다시 스무 살이 나에게 왔다.
아무 구속 없이 사람을 사랑하는 충분한 선택
200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황지운이 12년 만에 첫 소설집 『올해의 선택』(문학과지성사, 2021)을 출간했다. 데뷔작 「안녕, 피터」는 세 청년이 자살한 친구의 흔적을 찾아 자동차 여행을 떠나지만 결국 강원도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폭설에 갇히는 여정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보여주어 청년 세대가 당면한 어려운 현실을 의미화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을 포함해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올해의 선택』에서는 성별과 성 정체성을 넘어 인간이 인간을 깊이 사랑하는 순간, 그 빛나는 아름다움을 담아낸다. 인물들이 나누고 교감하는 이 섬세한 마음들은 성애적 사랑의 영역 또한 초월하여 친구나 동료 사이에 서로 아끼고 염려하는 깊은 우정을 포함한다. 낯선 도시에서 빈손으로 부지런히 꿈을 좇으며 사랑하고 갈등하는 젊은이들. 『올해의 선택』은 거창한 포부나 야망은 없을지라도 매해, 매달, 매일에 정직하고 충실했던 당신에게 깊은 위로로 다가갈 것이다.
퀴어Queer: 무지개로 빛나는 우리의 사랑
나는 10년간 함께 살면서 살림을 꾸려간 내 아내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몰라. 내가 멍청이니? 아내가 아닌 거 모른 거 아냐. 결혼식을 올리면서도 그게 결혼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었어. 그래도 나는 아내라고 생각하고 살았어. 저 집도 아내 이름으로 사서 난 이렇게 쫓겨났어. 혼인신고도 하지 못하는 나는 남이니까. 평생 남이었으니까. _「Sofie to Dorothy」
민경의 아버지가 하는 모든 말이 틀렸다. 민경이 사귀는 것은 남자가 아니고 당신 눈앞에 있는 나이며, 룸메이트는 대학생이 아니라 직장인들도 많이 구하면서 지내고, 일단 우리는 룸메이트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빌라, 낡기는 했지만 안은 따뜻하고 넓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집을 천박하고 궁색하다고 말하다니. 저 턱을 하늘까지 올리고 우리를 한껏 내려다보는 민경의 아버지에게 화가 났고, 자존심이 상했다. _「너의 결혼식」
수록작 대부분에서 인물들의 성별은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중성적인 이름을 사용하며,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 말투도 전형성에서 대체로 벗어나 있어 독자가 생물학적 성별을 손쉽게 파악하지 못하도록 소설적으로 의도되었다. 이 책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그럴수록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인물들의 생물학적 성별에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를 통해 “작가가 그들의 사랑을 이성애와 의도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황지운의 소설에서 사랑은 개인적이라 저마다의 사연과 깊이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로 범주화되기 어려운 사건들이다. 「Sofie to Dorothy」에서 묘사되는 1980년대 레즈비언들의 삶과 사랑이, 「너의 결혼식」에서 민경과 선우가 나누는 사랑과 사회적 억압의 맥락을 공유하는 동시에 무척이나 다른 문화와 사정을 가지고 있듯 말이다. 「안녕, 피터」에서 특전사 출신 게이 유진과 그를 남몰래 사랑하는 영수의 감정, 「사라왓부인모임」에서 서로를 가족처럼 염려하며 다투고 화해하는 마음들, 「운동은 몸에 좋아요」에서 외로이 상경하여 서로에게 의지해온 주현과 영진의 애틋함까지…… 소설마다의 다채로운 사랑이 모여 한 권의 무지갯빛 사랑이 떠오른다.
빈곤: 이촌향도 + 비정규직 + 무일푼의 비극
선우는 이 침묵이 뭔지 잘 알았다. 지금 둘 다 너무 피곤하다는 걸, 기념일이 아니었으면 애써 만나는 시간을 내지 못했을 거라는 걸, 너무 피곤하면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다는 걸, 그럼에도 서로 만난다는 건 어쨌든 서로를 아끼고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_「올해의 선택」
필라델피아는 어떤 곳일까, 매일매일 편의점에 도착하는 치즈처럼, 엄청나게 큰 치즈 공장이 있는 걸까. 캘리포니아는 오렌지가 많을까, 거긴 사시사철 덥다는데, 1년 내내 늘 따뜻한 건, 크리스마스에 반바지를 입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_「운동은 몸에 좋아요」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가난이다. 특히 위에서 인용된 두 소설은 도시로 이주해 택배 상하차 작업이나 편의점, PC방 점원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가난한 날의 행복”은 안정된 삶을 찾은 사람만의 낭만일 뿐, 당장 내일조차 확신할 수 없는 도시 빈곤 청년의 일상에서 행복은 먼 이야기이다. 잘 조직된 서사와 풍부한 감정으로 이야기 속 유머와 재미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작가 황지운의 미덕이지만, 마냥 웃으며 책장을 넘길 수 없는 이유는 가혹한 조건 속에 분투하던 인물들이 결국 실패에 부딪치는 순간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그 서늘한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쫓겨나는 이들과 삭제되는 사랑: 회복의 연대는 가능할까?
“알죠? 여기 건물 헐고 클럽 짓는 거.”
“네? 지금도 클럽이잖아요. 아니, 그리고 이렇게 낡은 건물을 누가 사요?”
은수는 클럽을 헐고 클럽을 세운다는 것도, 이 낡은 건물을 누군가가 산다는 것도 놀라웠다.
“여기 건물값 엄청 뛴 거 알아요? 몇 달 사이에 근처 월세가 다섯 배 뛰었다는데.”_「로큰롤에 있어 중요한 것」
“당신의 국민 속에, 성소수자는 없는 겁니까?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여성이며 성소수자인 나는 그럼 여성이며 성소수자인 채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사는 당신의 국민이 될 수 없다는 겁니까?”
민주는 큰 소리로 외쳤다. 울먹였다. 울고 있었다. 경찰이 달려들었다. 민주는 그대로 붙잡혔다._「운동은 몸에 좋아요」
실적 압박 속에서 자살하는 콜센터 노동자, 끝없이 치솟는 월세에 허덕이다 결국 밀려나는 세입자, 이성애가 아니라는 이유로 법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 “가벼우면 안 되는데, 사람의 죽음은 너무 가벼웠다”(「운동은 몸에 좋아요」)는 그 무거운 말처럼, 황지운은 언제나 “(강하고 부유한) 사람이 먼저”였던 사회의 냉정한 면면을 짚어내며, 쫓겨나고 죽어간 약한 이들 또한 소중한 생이었음을 이야기한다. 「작가의 말」에서 그간 떠나간 친구와 동지 들을 떠올리며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사회에서 내쳐지지 않기를, 우리의 삶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고 그가 아프게 적었듯, 황지운의 소설은 차별에서 벗어나 삶을 회복해나갈 연대를 바라고 꿈꾼다. 거대한 전망보다는 오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이 책이 당신에게 후회 없는 “올해의 선택”이 될 것이라 확신해본다.
작가 소개
200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안녕, 피터」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나는 에디터다』(공저)와 동화 『정정당당 해치의 그렇지 정치』가 있다. 서울과 제주에서 살다가 2021년 지금은 영식이, 복희 두 고양이와 함께 광주에서 살고 있다.
목 차
사랑니 덕에 구사일생
올해의 선택
너의 결혼식
사라왓부인모임
운동은 몸에 좋아요
안녕, 피터
로큰롤에 있어 중요한 것
해설 | 네, 운동이 몸에 제일 좋아요 - 김형중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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