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가장 고귀했던 감각은 어떻게 가장 타락한 감각이 되었나
n번방, 웰컴투비디오, 딥페이크물, 웹하드 카르텔 ……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보는 기술’이 빛을 발할수록 ‘보는 폭력’의 그늘은 깊어간다. 불법 촬영과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에게 말 그대로 ‘영원한 고통’을 안기지만 단속과 처벌이 따라잡지 못하면서 이 폭력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악이 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까?
이 책이 쥔 무기는 철학이다. 디지털 기기와 통신 기술의 발달로 등장한 듯 보이는 이 ‘새로운 폭력’은, 사실 플라톤부터 데카르트와 하이데거에 이르는 시각중심주의 철학에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폭력’이다. 시각을 다른 감각들보다 특권화하고 ‘관조’를 중시함으로써 대상이 품은 시간성을 배제하는 서구의 철학적 전통은 근대의 시각중심주의로 이어졌고, 오늘날 온갖 시각의 폭력은 이러한 토양에서 자라났다는 것이다. 저자는 근대의 시각중심주의를 ‘근대의 광기’라고 본다. 이는 관음증적 욕망, 렌즈의 발달, 여성혐오와 결합해 점차 힘을 키웠고,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디지털 공간에서 증폭되었다.
출구는 없을까? 이 책은 ‘광기’에 맞서는 또 다른 ‘광기’를 제시한다.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히스테리 환자’의 굴레가 씌워진 근대의 여성들부터 ‘렌즈를 부수는 송곳’을 든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스트들까지 ‘여성 광인’의 역사는 짧지 않다. 또한 촉각이라는 대안을 통해 시각 중심으로 치우친 우리의 감각 체계를 돌아본다.
고전적 관음증부터 디지털 성폭력까지
철학으로 추적한 ‘보는 폭력’의 뿌리
디지털 시대에 ‘이미지’를 만들고 전달하는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할수록,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성범죄는 ‘진화’를 거듭한다. 버닝썬과 정준영 일당의 집단 성폭력과 단톡방 유포 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켰고, 웹하드 카르텔은 디지털 성착취가 산업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피해 영상이 지금도 계속 퍼지면서 끝나지 않고 있다. 성착취물은 한 번이라도 유포가 되면 가해자가 무한 증식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고통은 끝이 없다. 피해 경험이 없는 여성들도 공중 화장실 벽에 구멍이 있으면 불법 촬영을 의심하는 노이로제에 걸린 지 오래다.
물론 제대로 된 단속과 수사, 처벌이 가장 시급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바로 디지털 기술은 진화의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딥페이크 성착취물의 경우, 사용되는 기술은 나날이 교묘해지는데, 법은 여전히 제작자만 처벌하는 데 그치는 등 ‘사후 대책’의 속도는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좀 더 다른 방향의 접근도 필요한 게 아닐까? “대상화되고 객체화된 이미지들이 난립하는 시각의 폭력에 물든 이 사회에서 근본적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디지털 성폭력이 근절되기 힘들 것”이라고 보는 저자가, ‘보는 폭력’과 이를 둘러싼 사회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짚어보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철학이다.
이 책은 21세기에 새로 등장한 범죄처럼 보이는 디지털 성폭력의 저변에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져온 시각 중심의 철학 전통이 깔려 있다고 본다. 따라서 여성의 시각적 대상화와 시각중심주의라는 아주 오래된 ‘전통’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의 시각중심주의는 여성을 비롯한 타자와 소수자를 시각적으로 대상화하고 통제하려는 ‘이성’에 근거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각의 특권화, 그리고 대상의 시간성 맥락을 제거하는 ‘현전성’이라는 서구의 형이상학 전통이 있다. 저자는 시각중심주의가 관음증의 역사, 망원경·카메라·영화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렌즈의 발달, 그리고 여성혐오와 결합되어 어떻게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광기’로 나아가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광기는 “인기척이 없고 수치심도 사라진” 디지털 시대의 ‘모니터 앞’ 공간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테크네’, 즉 기술이라는 낱말은 플라톤 시대에 이르기까지 ‘에피스테메’, 즉 앎이라는 말과 같이 사용되어왔다. 이 두 낱말은 넓은 의미에서 인식을 지칭한다. 그것들은 무엇에 정통하거나 통달해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시작된 앎과 기술의 공모관계는, 근대적 인식이론에 기반을 둔 현대 과학기술 문명에서 그 극단에 이른다. 무사심하게 여겨지는 고대 그리스의 관조적 시선에서 비롯된 근대적 인식이론이 가장한 객관적·가치중립적 시선의 배후에는, 내 눈앞에 현전하는 “존재자를 확실하게 알아내어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구사하려는 의지가 꿈틀대고” 있다.”(69쪽)
“디지털 시대의 남성들은 더 이상 신비화된 팜므 파탈적인 여성 스타에게 열광하지 않는 듯하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페티시가 필요하지 않아서, 아름답게 치장한 젊은 여성들이 속옷을 내리고 변기에 앉을 때 드러나는 혐오스러운 ‘상처’를 화장실 몰카로 보며 희열과 쾌감을 느낀다. 정작 여성 자신에게는 상처도 뭣도 아닌 그저 존재하는 그러한 생식기를 바라보며, 그토록 아름답게 꾸며봤자 너희들은 여신이 아니라 그저 갈라진 생식기로 존재하는 혐오스러운 존재이자 조롱당하고 능욕당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처럼 도처에서 관음증적 시선에 노출된 디지털 시대의 여성은 자신의 갈라진 생식기로 인해, 혹은 자신이 지닌 섹슈얼리티에 의해 여전히 사디즘적으로 처벌받고 단죄받으며 상징적인 사형선고를 받는다.”(144쪽)
‘보는 것’은 왜 그토록 중요한가?
견고한 시각 중심의 세계에 던지는 질문
그렇다면 시각의 폭력은 몇몇 범죄, 일부 가해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오늘날 우리는 SNS에서 습관적으로 타인의 일상을 엿보고, 나의 일상도 습관적으로 노출한다. 저자는 “관음증과 노출증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분석한 프로이트를 인용해 SNS 속 보여주기를 관음증이 일상화된 사례로 들며, SNS 속의 멋진 이미지들이 “21세기의 새로운 페티시”라고 본다.
또한 사람들이 다른 어떤 감각 기관보다 눈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확인하는 감각을 넘어 ‘아는 감각’, ‘통제하는 감각’이기도 해서다. 저자는 360도로 펼쳐보는 ‘파노라마’의 발명과 수감자들에게 시선의 감시를 내재화하는 ‘파놉티콘’의 예를 통해, ‘그저 보는 것’이 어떻게 그 자체로 권력이 되는지 설명한다. 이렇듯 신처럼 모든 것을 한눈에 보려는 경향에 대해 “모든 것을 객체화해 통제할 수 있으며 시선의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타자의 움직임이 보이면 시각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깃들어 있다고도 진단한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공포는 ‘보는 권력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할 것이다.
누구나 사진을 찍고 찍히며 공유하는 것에 익숙해진 이 시대는, 이처럼 언제라도 권력이 되고 폭력이 될 수 있는 시각의 메커니즘에 익숙해진 시대다. 즉, 대상을 “거리를 두면서 직접 개입하지 않고, 눈앞에 고정되어 시간의 흐름이 제거된 무시간적 존재”로 바라보는 방식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모든 것’을 보려 할수록, 중요한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할 뿐이라고 단언한다.
아울러 시각이 오랫동안 ‘으뜸 감각’의 지위에 있는 동안 촉각, 후각, 미각 등 다른 놀라운 감각들이 얼마나 폄하되어왔는지 설명한다. 이러한 시각 중심의 감각 체계, 나아가 시각 중심의 세계를 넘어설 대안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촉각적 시각’이다. 수평적 평등을 기반으로 한 이러한 ‘시각’이 “새로운 형태의 관계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이리가레를 비롯한 연구자들의 분석과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관음증적인 남근적 시각은 ‘(여성의) 모든 것을 응시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타나엘의 ‘망원경’을 통한 여성 훔쳐보기는 어둠 속 비밀스러운 실체가 드러났을 때, 즉 올림피아가 실은 자동기계 인형이었다는 비밀에 직면했을 때 파열되고, 관음증적인 남근적 시각은 산산조각이 난다. 결국 나타나엘은 망원경을 통한 남근적 시각이 포착해낼 수 없었던 과잉적인 실체 앞에서 광기로 미쳐간다. 이런 광기는 근대 시각중심주의가 내포한 관음증적 주체가 귀결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100쪽)
“철학은 평면거울을 통해 세계의 빛을 비추고, 그러한 시각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는 남성 주체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반사하고 시각적으로 나르시시즘적인 자기동일성을 재확인하며 구축한 남근시각중심적인 세계이다. 여기서 여성은 자기 자신을 시각적으로 재현할 도구가 없기 때문에 나르시시즘적인 남성 주체와 자기를 동일시하며, 그러한 ‘남성적 반사구조’ 속에 갇히게 된다.”(207쪽)
작가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공부는 안 하고 하루종일 문학 서적만 읽는 학창 시절을 보내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글 쓰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됐다. 대학 시절 접한 철학책들은 어린 시절 고민했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주는 것 같아서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고, 내친김에 대학원까지 가게 됐다. 이후 파리 4대학 철학사과 데으아(DEA) 학위를 취득한 뒤, 파리 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지만, 철학에 대한 재능은 거기까지인지 박사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여성주의 미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으로도 활동 중이다. 영상을 업으로 하는 주변 지인들 덕에 우연히 접한 다큐멘터리의 세계는 삶의 소소한 기쁨과 활력을 주고 있다. 작품으로는 <여자의 몸으로 글쓰기-허난설헌>(2015), <당신의 나이는 몇 살입니까?>(제작 중)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의 《20세기 서양 철학의 흐름》(2006, 공역)과 피렛트 사모이로프의 《고양이 십자수》(2014) 등이 있다. 현재 전통철학의 영역에서 배제된 공포, 상흔, 슬픔, 광기의 문제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여력이 닿으면 철학적 다큐멘터리를 한 편 만드는 것이 작은 소망이다.
목 차
들어가는 말: 이 시대 가장 낯익은 폭력
제1장 보는 폭력에 대하여
새로운 여성살해
디지털 시대의 성폭력
n번방과 시각의 광기
제2장 시각이라는 특권
가장 고귀한 감각의 타락
정신의 눈, 고대 그리스의 전통
빛의 은유에 물든 서양 철학
‘지금, 여기’만을 향한 눈길
시각은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
제3장 관음증의 탄생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광기
관음증과 망원경
전부를 보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제4장 카메라가 가져온 것들
원근법, 카메라 시각의 근원
‘어두운 방’부터 카메라 발명까지
사진과 관음증, 그리고 페티시
영화의 탄생
관음증에서 사디즘으로
제5장 디지털 시대의 남성들
지금, 여기, 시간이 사라진 몸
인기척이 사라지고 수치심도 사라졌다
남성의 우정과 연대의 방식
제6장 렌즈를 깨는 여성 광인
나는 미쳤다, 나는 존재한다
히스테리, 보이는 자의 광기
선지자이자 광인이었던 여성들
송곳을 쥐고 나타나다
제7장 새로운 시각은 가능한가
평면거울을 깨부수고 오목거울로 보기
문턱, 통로, 입술로서의 촉각
비대면 시대에 필요한 감각
촉각적 빛, 촉각적 시각을 향하여
당신이 나를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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