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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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문화권에서 문화文化란,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하는 천지만물의 운행원리道를 사람人이 읽어내고 그 원리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천지만물과 더불어 수신修身(자기학습)하며 생장하고 변화하는 과정 자체로서의 삶과 그런 삶을 통해 드러나는 길과 흔적들(文), 그리고 다시 이것들을 거듭 익히며 생장하고 변화하는 삶의 과정(化)’이라는 유장하고 순환적인 함의를 가진다. 이처럼 ‘문화文化하는’ 삶이 윤리적倫理的 삶이고 좋은 삶으로 여겨졌다. 서유럽문명권에서 문화culture라는 말 역시 식물이나 동물을 돌보고 기르는 ‘과정’에 그 기원을 둔다. 하지만 17~18세기 근대계몽기에 문화를 (그 어원적 함의가 지닌 잠재성을 배제하고) 전 세계에 대한 자신(서유럽-백인-남성-엘리트)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재정의함으로써, 폭력적 세계 지배를 합리화했다. 그들이 발명한 ‘문화’는 그들 지역 문명의 특수한 생산물인데도, 세계 식민화와 시장화를 통해 지구의 다른 모든 지역에까지 과잉보편화되었다. 그 결과 문화는 원래 고급하고 우월하며 특권적인 삶의 스타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까지 강력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고급, 엘리트, 순수, 상위, 비싼 문화와 저급, 대중, 지저분한, 하위, 싸구려 문화를 나눈다. 이것이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이다. 우리는 이런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위계로부터 이탈해서, 문화의 새로운 지대를 탐색하고 새로운 형식을 모색해야 한다.
19세기부터 21세기 현재까지 한국 농촌은, 근대 이전의 오랜 농경공동체 전통과 단절되고 근대 도시문명의 중심으로부터도 배제되는 이중의 결핍 속에서 문화적 표류를 거듭해왔다. 1970년대 산업화 드라이브 정책에 의해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노인만 남은 농촌의 대부분 마을은 고령화와 공동화로 인해 소멸 위기에 처해있다. 텅 빈 농촌에서 삶의 활기를 찾아보기란 어려워졌다. 도시중심 자본주의에 종속되지 않는, 농촌의 ‘땅’으로부터 비롯되는 토속적이고 자생적인 생활 문화를 생산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에 의한 양극화와 불평등,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에 내몰린 도시의 젊은 세대를 비롯해서 해외 이주여성과 노동자 등 다양한 계급·세대·지역·종교·인종의 사람들이 농촌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서 농촌 마을은 갈수록 치열한 문화의 격전장으로 변모하며 대립과 분화가 깊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팬데믹과 기후위기가 엄습하고, 이 재난과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라며 시장과 국가가 제시하는, ‘스마트’로 수식되는 갖가지 첨단기술과 인공지능 시스템이 상품화되어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기술금융자본주의는 더욱 맹렬하게 심화되고, 국가는 기술금융시장에 더욱 종속되고 있다. 이처럼 복잡하고 역동적인 21세기 사회 현실은, 이 시대 조건에 걸맞은 농촌 마을 문화의 재구성을 절실히 요청한다.
21세기라는 시대성, 농촌이라는 지역성, 마을이라는 장소성과 공동체성 등의 중층적 조건이 주어질 때, 과연 문화의 재구성을 위한 어떤 방향성과 기준을 우리는 모색해야 할까? 아마도 21세기 농촌 마을 문화를 재구성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확보가 아닐까 싶다. 공통적인 것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말대로) 우선 ‘부정적으로’ 정의될 필요가 있다. 공통적인 것은 사적인 것도 공적인 것도 아니다. 공통적인 것은 자본의 사적 소유와 지배 및 신자유주의적 전략들에 대립하는 동시에 공적 소유권을 지배하는 국가의 통제와 규제에 대립한다. 자본과 국가 모두, 우리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내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도와 결정권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점은,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길들이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위계적 문화를 구성한다. 사적 자본과 공적 국가 중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를 동시에 부정하면서 열리는,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간극이 공통적인 것에 바탕한 문화가 생성될 수 있는 가능지대다. 공통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자율과 자치를 촉구한다. 유무형의 자원에 대한 접근을 개방하고 그 자원들을 자율적으로 돌보고 관리하는 자치의 새로운 형식을 재구성할 때, 공통적인 것에 바탕한 문화의 가능지대가 활성화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의 확보와 확장으로부터, 21세기 농촌 마을 문화 재구성의 세부 방향들인 자율·자생성, 개방·다양성, 생태·적정성 등도 더불어 활성화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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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는 ‘21세기 농촌 마을 문화의 재구성’이라는 대주제를 공통성과 자율·자생성, 개방·다양성, 생태·적정성의 방향에서 다각도로 검토하고 새롭게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모든 기고문은 이런 의도에 부응하는, 유장하고 면밀한 통찰과 날카로운 질문과 참신한 제안, 그리고 농촌 현장의 세부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모색들을 담고 있다.
트임에서 함성호는, 약 260만 년이라는 장구한 인류사적 맥락을 통찰하면서 우리가 21세기의 4차 산업혁명까지를 겪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농경이라는 가치와 농촌이라는 장소를 얘기해야 하는 이유를 추적한다. 안승택은, 농촌 마을이 단일·불변하며 반드시 지켜가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생각과 전통·유산·보존에 집착하는 행정·복지·학술·문화 활동들이 ‘(엉뚱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하고, 전통·민속·향토·장소와 같은 주요 개념들을 면밀히 재검토하면서 개인의 문화적 전유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진명숙은, 농촌의 정체성이 시대적 요인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역동적이고 다원적인 것임을 밝히고, ‘우리’와 ‘타자’를 나누는 이분법에 바탕한 자국민·남성중심주의에 젖어있는 농촌의 문제점을 검토하며 농촌다움을 재구성할 조건들을 제시한다. 유상균은, 팬데믹과 기후위기에 의해 환기된 자연-인간-사회의 동적 공진화 관계를 이해·예측하기 위한 패러다임으로 복잡계 과학을 제시하고, 이미 관계적·복잡계적 사고와 실천을 바탕으로 축적된 농촌의 토속 지혜들과 복잡계 과학의 만남을 통한 적정기술의 활성화를 제안한다. 정영환은, 비닐하우스에서 친환경농사를 지으면서 경험한 농사 기술과 농기계에 관한 문제들을 세밀하게 짚으면서 기후위기와 농사의 관계를 농민의 감각과 관점에서 성찰하고, 적정기술을 함께 만들어가는 마을 문화를 제안한다. 권병준은, 사용자들을 ‘시스템의 노예’로 살아가게 하는 글로벌 거대기업의 윈도우즈나 맥 같은 상용 운영체제의 대안으로서 사용자가 자유롭게 접근해서 자신이 원하는 운영체제를 만들어갈 수 있는 ‘리눅스’를 제안하고, 리눅스 운영체제를 바탕으로 국악 음원을 분석해 새로운 소리를 생성하는 머신러닝 작업을 소개한다. 김학량은 언제나 권력자의 것이었던 미술의 역사가 은폐하는 문화적 위계를 드러내고, 농사짓는 나날의 삶 속에서 ‘그리기’와 ‘만들기’를 통해 만물중생을 섬기고 제 몸과 마음을 가꾸는 수신修身 과정이자 적정기술이기도 한 자생하는 농촌 미술의 윤곽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이어서, 2000년 전후 논산시로 편입되고 개발사업이 이어지면서 사라지고 바뀌어가는 고향 강경의 장소들을 사진과 연보로 기록한 유현민의 포토에세이, 코로나19 이후 농촌에서의 문화 활동에 대한 조대성의 경험담, 농사를 지어보려고 농촌으로 들어오는 도시 청년들의 학습과 마을의 삶을 연결하는 새로운 형식의 마을학습체계인 ‘평민마을학교’의 형성사와 운영원리를 담은 정민철의 연재, 기후위기 시대에 탄소를 땅속으로 되밀어넣을 수 있는 친환경농사의 형식과 그 주체의 재구성에 대해 숙고하는 강마야·금창영·김정섭·정민철의 좌담, 공통적인 것에 바탕한 농촌 마을살이를 위해 재정의되어야 할 용어들을 그 어원과 사상적 맥락에서 입체적으로 조감하는 유대칠의 새로운 연재, 사적 자본과 공적 국가의 통치로부터 이탈하는 아나키스트적 감성과 실천을 권력의 맥락에서 새롭게 조망하는 장정일의 서평, 인간의 손과 머리를 분리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의 노동형식에 가려 잊혀진 장인이 일하는 태도로부터 농민의 장인성을 발굴하는 정기황의 서평까지, 이 모든 기고문들이 우리가 21세기 농촌 마을 문화를 재구성해갈 방향을 모색하는 데에 흥미롭고도 귀한 실마리를 던져줄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 망설임 없이 일독을 권한다.
작가 소개
근대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의 폐해를 넘어서 21세기가 요청하는 공동의 자율적 삶에 바탕한 마을문명을 농촌에서 상상하고 실험하기 위해 충남 홍성군의 한 농촌 마을에서 만들었다. 농민·시민·활동가·행정가·학자·예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인 새로운 형식의 초학제적 학회다. 멸실되어 가는 농경 공동체 문명의 파편들과 기억을 다각적인 맥락에서 재구성하고 21세기의 농촌 현실에서 현장화함으로써, 극한 경쟁에 내몰리는 도시문명의 심대한 위기를 완화할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함께 공부하고 일한다. 다양한 실천 형식과 내용을 농촌 마을의 삶과 앎 속에서 통합적으로 실험중이다. 반연간지 『마을』과 월간 웹진 『일소공도』를 발행하고 있다.
목 차
열며│공통적인 것과 문화하는 삶│박영선
트임│21세기 농촌 마을 문화의 재구성
마지막 혁명│함성호
21세기 농촌에서 전통과 민속, 향토와 장소는 무엇인가│안승택
농촌의 다원적 정체성과 바람직한 농촌다움│진명숙
농촌을 위한 과학, 농촌에 의한 과학│정기황
모두를 위한 농사, 탄소를 줄일 적정기술 함께 찾기│정영환
리눅스 운영체제로 가꾼 소리텃밭│권병준
나날의 살림살이 되짚으며 스스로 성찰하게 도와줄 새로운 미술의 모습을 찾아서│김학량
포토에세이│한국 근현대 마을 공간 변천기 5
세기말 풍경, 강경江景 1998~2000│유현민
스밈│농촌으로부터
엔택트 공연, 아마추어 기획자에게 1000만 원이 주어진다면│조대성
협동조합젊은협업농장 실험보고서 4│협업농장과 학습│정민철
벼림│농업·농촌·농민 연속좌담 6
기후위기와 농사│강마야, 금창영, 김정섭, 정민철
연재│마을살이를 위한 개념어사전 1│커먼즈, 코뮌, 커뮤니티
콤무니스communis의 존재들│유대칠
서평│책 너머 삶을 읽다
세계사의 또 다른 쪽: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장정일
농민, 잃어버린 20년과 앞으로의 20년:『장인─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정기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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