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길거리 대신 책상에서, 깃발 대신 펜으로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가 좋은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 모순투성이인 사회주의의 본질을 모른다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알고도 추종한다면 거짓말쟁이다.” (『지식인의 아편』에서)
좌파의 본질을 이처럼 명쾌하게 꿰뚫은 말이 다시 있을까. 마르크스주의를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일축한 레이몽 아롱이 무려 1955년에 한 말이다.
평생 동안 강단에서는 철학자, 역사가, 사회학자로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상을 정교화하고, 밖에서는 언론인으로서 전체주의에 대항하며 필봉을 휘두른 레이몽 아롱(Raymond Aron, 1905~1983)은 ‘참여하는 방관자(Le spectateur engag?)’를 자처한다. 지식인으로서 빗나간 현실에 눈감지 않되, 그 참여의 방식은 깃발이나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가는 방식과는 달라야 한다는 그의 실천은 해방정국, 4·19, 6·10, 그리고 최근에는 ‘촛불’을 목도한 우리에게도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프랑스 ‘앙텐 2TV’ 방송은 1980년 12월, 75세의 레이몽 아롱과 ‘68 세대’인 30대 초반의 두 학자 장루이 미시카(경제학·언론학), 도미니크 볼통(사회학자)과의 1 대 2 대담을 3부작으로 방영한다. 8개월 동안 준비하고 실행한 대담을 책에 걸맞게 다듬어 이듬해 『참여하는 방관자』로 출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2년 『20세기의 증언』(박정자 옮김)으로 소개됐던 것을 개정판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박정자 옮김, 기파랑, 2021)으로 새로이 내놓는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우정을 간직하기 어려운 시대
1905년생, 장폴 사르트르와 동갑내기로 파리 고등사범학교 동기동창인 레이몽 아롱은 20세기 전체주의의 위협의 산 증인이다.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태어나 10대에 1차대전을 겪고, 히틀러가 떠오르던 시기 청년으로서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2차대전으로 프랑스가 점령당하자 런던의 드골 망명정부의 <자유 프랑스>지에 투신하면서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전후 프랑스의 혼란, 소련·중공의 위협과 6·25전쟁, 베트남과 알제리의 탈식민 전쟁, 1968년 5월, 미·소 양강의 냉전 등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목도하며 반(反)전체주의 투사가 됐다. 6·25 전쟁에 대한 입장 차이로 친구인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알튀세 등으로부터 결별당했다.
“요즘 세상은 정치적 선택이 다르면 우정을 간직하기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정치란 아마도 너무나 심각하고 비극적인 것이어서 우정이 그 압력을 감당하기 어려운가 봅니다. 나와 사르트르의 관계에서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186~187쪽)
아롱과 사르트르는 만년인 1979년에 베트남의 ‘보트피플’ 인권 문제로 손을 잡으며 극적으로 화해하지만, 사르트르가 1980년, 아롱이 1983년 타계함으로써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을 보지 못한다.
프랑스의 단결과 자유세계의 미래
이 책은 레이몽 아롱이 그 ‘68 세대’ 두 젊은 학자 장루이 미시카, 도미니크 볼통과 1980년 말에 가진 TV 3부작용 1 대 2 대담을 책에 걸맞게 손질해 출간한 것이다. 원제 『참여하는 방관자』, 우리나라에는 1982년 『20세기의 증언』(박정자 옮김)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소개되었던 것을 40년 만에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이라는 제목으로 개정 출판한다.
대담 당시 레이몽 아롱은 75세, 두 학자는 30대였다. 젊은 학자들의 대담 준비와 질문은 가차없고, 레이몽 아롱도 때로 격하게 반응한다.
“당신의 흥분과 열정은 여하튼 매우 상대적이군요. 흥분이라고 해 봤자 그것은 절반의 흥분 아닌가요?” (볼통)
“웃음이 나오네. 들어 보시오, 나를 막 몰아붙여서 격하게 만드는군요.” “내가 혐오하는 줄 뻔히 알면서 나의 글쓰기 습관을 빌미로 나를 비난하는 당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군요.” “진심으로 하는 얘깁니까? 지금 내 얘기를 다 들었고, 그리고 책을 다 읽고서도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습니까?” (아롱)
“내 말씀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화부터 내시다니요.” (장루이)
열띤 논쟁의 결과는 그러나 ‘상호 재발견’이다. 미시카와 볼통은 책 서문에서 “우리의 마음을 새삼 움직인 것은 레이몽 아롱의 따뜻한 인간미였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진행중인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진실을 밝히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한 민감한 사람을 만났다”(24쪽)고 고백한다. 레이몽 아롱도 손수 쓴 결론에서 “두 명의 친구를 새로 얻었다는 말로 대화를 끝냈으면 한다. 나는 두 친구를 설득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에게 풍요로운 회의(懷疑)의 정신은 불어넣어 줬다고 자부한다”(482쪽)고 화답한다.
한국의 586, 그 40년의 지체
대담 이듬해인 1981년은 프랑스 대통령 선거의 해이기도 했다. 선거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당선되자 레이몽 아롱은 선거 후 시점에서 젊은 두 학자와의 가상 문답을 새로 집필해 책의 결론으로 삼았다. 놀라운 것은, 당시 아롱이 우려하던 현상들이 정확히 40년 지난 지금 한국에서 판박이처럼 벌어지고 있다는 것.
“가난한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부자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가장 엄중한 세제도 끝내 인플레를 막지 못했습니다.”
“공무원 20만 명을 늘리는 데는 지금 당장은 별로 비싼 값이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국고 부담은 해가 갈수록 점점 무거워질 겁니다. 공무원은 일의 필요도에 따라서 늘려야지, 실업 퇴치를 위해 공무원 수를 늘려서는 안 됩니다. 일은 적게 하면서 돈은 더 많이 벌게 하는 방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국가는 불의의 사고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사람들만을 보호해 주고, 자신을 지킬 수단을 갖고 있는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기업을 통한 사회보장 자금 지출은 언젠가 한계에 이를 테니까요.”
“오늘날 새로운 권력자들은 과거의 체제를 전제적 체제로 몰아붙입니다. 그들은 이번의 미테랑 선거를 1944년(한국의 경우 1945년)의 해방에라도 비교하고 싶을 겁니다. 새로운 권력자들도 과거의 지배자들이 했던 것과 같은 권력 남용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상 471~477쪽)
히틀러의 극우든 스탈린·마오쩌둥의 극좌든, 전체주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거나 지리멸렬한 오늘,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은 역사를 통찰하는 혜안과 ‘우리 안의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와 더불어, 우리 사회 586의 ‘40년의 지체’를 비춰 주는 거울로 다시금 빛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레이몽 아롱
프랑스의 언론인이자 사회학자·역사가·철학자이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우파 지식인이다. 파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동갑내기 장폴 사르트르와 동기동창으로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히틀러 집권 직전 독일에 유학했고, 귀국 후 고교 교사와 툴루즈 대학 교수로 있던 중 2차대전에 참전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런던으로 탈출,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위원회의 기관지 <자유 프랑스>에 합류함으로써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종전 후 1947년부터 30년간 <피가로>지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국립행정학교(ENA), 소르본 대학교 등의 교수를 겸임했다. 젊은 시절 잠깐 좌파 운동에 참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전체주의와 좌파 이념에 맞서 필봉을 휘둘렀다. 『지식인의 아편』에서 서구사회 내 마르크시스트들을 비판하여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과 결별했다. 『산업사회에 관한 18개의 강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환상적 마르크시즘』 등의 저서가 있다.
대담자 : 장루이 미시카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정치학자, 미디어사회학자이며 후에 파리 부시장을 지냈다.
대담자 : 도미니크 볼통
프랑스 국립 과학연구센터(CNRS) 리서치 디렉터이자, CNRS 산하 소통과학연구소(Institute of Communication Sciences) 소장. 지난 30여 년간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한 프랑스 최고 석학 중 한 사람이다. 국제적 연구 잡지인 「헤르메스(Herm?s)」의 창립자이자 디렉터이며, 프랑스 국립 방송 프랑스 2(France 2) 위원회 이사, 유네스코 위원회 프랑스 대표이다. 프랑스 국민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한 그는 현재 프랑스 방송과 뉴스, 신문에서 문화 비평과 사회현상 분석에 관해 가장 많은 인터뷰를 요청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또 다른 세계화』 『미래의 프랑코포니』 『마지막 유토피아』 『인터넷 그 이후』 등 30여 권이 있으며, 이들은 영어와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옮긴이 : 박정자
현대인들은 똑같은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라도 시장 물건이 아니라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을 엄청나게 비싼 값에 산다. 실제 물건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방증이다. 저자 박정자는 그 욕망의 근원에 상향 계층이동의 욕구가 있음을 전작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에서 갈파하였다.
그리고 지금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다시 보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럭셔리를 추구하는 현대사회를 새롭게 분석하고 있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극도로 고도화되는 정보기술, 전 지구를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 전통적 금융과 예술계를 위협하고 있는 가상화폐와 NFT 미술 열풍 등이 상응하는 이론의 틀 속에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펼쳐진다.
박정자의 다른 책들로는 『빈센트의 구두』, 『시선은 권력이다』, 『이것은 Apple이 아니다』, 『마이클 잭슨에서 데리다까지』, 『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 조각』, 『시뮬라크르의 시대』, 『잉여의 미학』, 『눈과 손, 그리고 햅틱』,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사르트르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변증법적 이성비판』(공역)과, 푸코의 『성은 억압되었는가?』, 『비정상인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만화로 읽는 푸코』, 『푸코의 전기』, 『광기의 역사 30년 후』가 있으며,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 세계의 일상성』, 앙드레 글뤽스만의 『사상의 거장들』도 있다.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를 했다. 박사논문은 “비실재 미학으로의 회귀: 사르트르의 『집안의 백치』를 중심으로”이다. 상명대학교에서 사범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많은 팔로워들이 좋아하는 페이스북 필자이기도 하다.
목 차
새 국역판을 펴내며_ 박정자
머리말_ 장루이 미시카, 도미티크 볼통
제1부 혼란의 프랑스
1_ 1930년대의 한 젊은 지식인
a) 1928년 윌름 거리~1933년 베를린 / b) 인민전선: 좌파는 자신들의 패배를 찬양하기를 좋아한다 / c) 프랑스의 쇠퇴
2_ 어두운 시대, 1940~1945
a) 런던으로 / b) 드골과 페탱 / c) 홀로코스트
3_ 해방의 환상에서 깨어나다
a) 프랑스 재건 / b) 정치 바이러스 / c) 얄타, 세계 분할의 신화
제2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4_ 대분열, 1947~1956
a) 냉전의 승자는 / b) RPF(프랑스 인민연합)에 참여하다 / c) 지식인의 아편 250
5_ 탈식민
a) 알제리의 비극 / b) 드골과 탈식민 정책 / c) 지식인과 반식민
6_ 국가 간의 평화와 전쟁
a) 핵전쟁을 생각한다 / b) 경제 성장과 이데올로기 전쟁 / c) 드골, 이스라엘, 유대인
제3부 자유와 이성
7_ 격변의 좌익
a) 1968년 5월 / b) 네모난 동그라미
8_ 제국들의 충격
a) 데탕트의 환상 / b) 미제국의 쇠퇴 / c) 중공과 제3세계 / d) 인권은 정책이 될 수 없다 / e) 쇠퇴하는 유럽
9_ 참여하는 방관자
a) 저술의 일관성 / b) 신문기자, 대학 교수 / c) 정치적 선택 / d) 다양한 가치
맺는 말_ 레이몽 아롱
레이몽 아롱의 주요 저서
역자의 말(한국어 초판)_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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