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전쟁에는 온갖 폭력과 잔인함, 묵인과 공조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전 군인의 몸에 그대로 남는다. 전쟁이 끝난 후 살생보다 생명에 가치를 두는 일상을 살아야 할 때, 그 간극에서 참전 군인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권윤덕
베트남전쟁 이후를 다룬 그림책,
권윤덕 작가의 『용맹호』 출간
2010년 6월 『꽃할머니』(사계절, ‘한중일 공동기획 평화그림책’)를 출간하며, 그림책으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를 성실히 담아낸 권윤덕 작가는 이후로도 십여 년간 수없는 고증과 취재, 모니터링을 거치며 제주 4.3 사건을 다룬 『나무 도장』(평화를품은책),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씩스틴』(평화를품은책) 등의 작품을 발표해 왔습니다. 『꽃할머니』 출간 당시에만 해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그림책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것에 대하여 뜨거운 논란이 있었으나, 작가는 수없이 모니터링에 응해 준 한국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믿고, 실제로 일어난 비극을 가리는 대신 그림책을 매개로 깊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사회의 부조리, 굴곡진 근현대를 거치며 겹겹이 쌓인 전쟁의 기억, 가해자도 숨고 피해자도 숨는 아픈 비극. 알아야 할 실상을 정확히 알고, 아픈 기억들을 균형감 있게 형상화하여 어린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작가의 작업방식은 어떤 구호보다 진실한 평화의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용맹호』는 권윤덕 작가가 『꽃할머니』를 준비하면서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작품으로,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어렴풋이 기억되는 베트남전쟁을 다뤘습니다. 참전 군인 ‘용맹호 씨’의 출퇴근길을 따라가며 그가 겪는 현재의 일상과 과거의 기억을 오갑니다. 『꽃할머니』가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용맹호』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복합적인 인물을 그립니다. 그리고 숨은 가해자가 누구일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각인한 기억, 몸으로 나타나는 아픈 기억들
그림책 속 인물, 용맹호 씨는 매일 아침 정비소로 출근합니다. 온종일 자동차 일곱 대를 수리하고 소금 땀으로 범벅이 된 정비복을 벗고서 퇴근합니다. 용맹호 씨는 파월장병으로 불리는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이며 지금은 딸도 아내도 기억에서만 꺼내며 혼자 살고 있습니다.
1954년 베트남의 상황은 한반도와 비슷했습니다. 오랜 프랑스 식민 지배를 벗어난 기쁨도 잠시, 제네바 협정(휴전 협정)에 따라 남북으로 갈라진 베트남은 2년 뒤인 1956년 통일 정부를 구성하는 총선거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부패한 독재로 신임을 얻지 못한 남베트남 정부가 질 것이 뻔한 총선거를 거부하고,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이 1964년 직접 군사개입하면서 베트남전쟁은 국제전으로 치달았습니다. 미국의 명분은 반공이었으나 가장 가까운 동맹국들조차 전쟁 참가를 거부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총 4만 7,872명(연인원 32만여 명)을 베트남에 파병하였습니다. 안보를 보장받고 경제적 실익을 계산한 결정이었습니다. 미국 외 7개국이 참가한 전쟁에서,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군사를 파병하였습니다. 용맹호 씨도 그중 한 군인으로 베트남에 갔습니다. 용맹호 씨가 간 곳은 베트남 중남부 빈딘성. 야자수가 자라고 바다가 보이는 곳이지만, 곧 고엽제(독성 제초제)로 나무는 타들어 가고 불길에 집어삼켜질 곳이기도 합니다.
이 그림책은 오늘 일터에 가는 평범한 노동자 용맹호 씨를 꼬박꼬박 그리면서, 그의 기억이 불러낸 베트남의 환영을 중첩하여 보여줍니다. 출근길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검정 옷의 베트남 여인과 아기, 잠자리에 들면 꿈틀거리며 떠오르는 짙은 정글의 생명체들, 이국의 땅을 짓누르는 군화와 전장을 채우는 총소리. 현실과 기억이 혼재하는 가운데, 용맹호 씨의 몸은 점점 변해 갑니다. 귀가 셋, 가슴이 셋, 눈이 셋, 발이 셋, 부푼 몸으로 출근 버스에 오르는 용맹호 씨는 오늘도 살아가려 출근을 하고, 그 옆으로는 죽음의 환영들이 어른거립니다.
또 다른 용맹호 씨를 만들지 않기 위하여
베트남전쟁은 특히 부당한 전쟁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오랜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과 통일을 앞둔 베트남에 미국이 반공을 명분 삼아 들이댄 총검은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종전 이후, 20세기말을 잠식하던 냉전 질서에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었고, 패권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들이 들어찼습니다. 미국사회에서는 반전 평화운동이 거세졌습니다만, 한국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베트남전쟁으로 가파르게 성장한 경제 앞에서 전쟁에 대한 문제제기는 숨어들고, 참전 군인들은 국가의 경제를 살린 주역으로 칭송받는 분위기에서 개인의 고통을 말할 창구를 잃어갔습니다.
『용맹호』에서 용맹호 씨 또한 몸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살생의 흔적과 극도의 긴장을 침묵 안에 가두고 열심히 출근을 합니다.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면서 돌봄을 받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런 그의 죄의식에서 출몰하는 환영은 한 농가의 아침 밥상 자리이며 민간인 학살의 현장입니다. 용맹호 씨는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사려 깊은 마음으로, 그러나 기억해야 하는 것
권윤덕 작가는 『용맹호』를 그려야 비로소 『꽃할머니』가 마무리된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하였습니다. 『꽃할머니』에서 한국이 피해자의 입장이라면, 『용맹호』에서 한국은 가해자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과 군인들의 희생 위에 걸린 베트남전쟁은 한국사회의 모순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우리나라가 가해자라는 불편한 과거 앞에서, 베트남전쟁은 외면받고 잊혀 왔습니다. 1968년에 처음 제기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지금도 여전히 한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사건으로, 공식적인 사과 없이 피해자의 상처를 할퀴고 있습니다.
작가는 활활 타는 불길로 소거된 마을 옆 공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삼키며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들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곳엔 명령에 복종하는 참전 군인 용맹호 씨의 모습도 보입니다. 국가의 동원으로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 사람. 그런 수많은 참전 군인들이 더 이상 생겨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쟁을 기억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권윤덕
서울여자대학교 식품과학과와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과를 졸업했다. 이후 미술을 통해 사회참여 운동을 해 오다가 1995년 첫 그림책 『만희네 집』을 출간하면서 그림책 작 가의 길에 들어섰다. 동양 재료를 바탕으로 산수화와 공필화, 불화를 공부하며,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그림책에 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 『만희네 글자벌레』, 『시리동동 거미동동』, 『고양이는 나만 따라해』, 『일과 도구』, 『꽃할머니』, 『피카이아』, 『나무 도장』, 『씩스틴』이 있다. 한국출판 문화상, CJ그림책상, 올해의 여성문화인상-청강문화상,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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