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글씨 속의 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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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경미
출판사항문학의전당, 발행일:2021/10/08
형태사항p.110 A5판:21
매장위치문학부(1층)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58965303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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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정경미 시인은 그간 『차라투스트라의 입』, 『어린 철학자는 꽃이 지는 이유를 잊고』 등의 시집을 통해 ‘문명과 인간’의 문제, 특히 관계 설정에서 번번이 실패하고 좌절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왔다. 때로는 문명 비판적인 단일한 시적 화자의 음성으로, 또 다르게는 외부 압력에 의해 상처받은 자아가 토해내는 내적 분열의 ‘퍼포먼스’를 격한 어조로 표출해왔다. 이번 시집도 일정 부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벨탑을 쌓는 주파수가
기지국을 빠져나가는 동안
스티븐 잡스의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홍옥 반쪽
세상의 잡음을 행성 밖으로 송출한다
깨어진 소문들이 굴러다니는 지구촌엔
붉은 로맨스가 쏟아지고
뉴스를 강탈하고
앵커들의 입술은 3박 4일 헤드라인에 떠다닌다
메아리 없는 대답이
거미줄에 걸려 아우성치면
허공에 찍히는 너의 목소리에 경고등이 울린다
― 「소리의 일탈」 부분


누가 뭐래도 ‘휴대전화(cellular)’야말로 현대 기술 문명의 성취를 과시하는 아이콘이며 지금-여기 일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도구, 그 자체로 최상의 상징이다. 사용하는 기종에 따라 세대와 계층이 저절로 구분되고, 이른바 지구촌의 ‘인싸’인가, ‘아웃사이더’인가가 결정된다. 인류 문명에서 도구에 대해 공통으로 전 기간에 걸쳐 유지했던 관념은 이제 이렇다 할 반발 없이 폐기되었다. 휴대전화는 더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고, 더 다양한 분야와 결합한다는 기술적 의미를 초월해 일상 존재의 현전(現前)을 보장하는 가장 적합한 근거로 제시된다.
정경미 시인은 성취가 아니라 불가항력으로 생기는 ‘일탈’에 주목한다. ‘바벨탑’은 널리 알려진 구약성서의 일화다. 신(神)이 되려는 인간의 교만은 하늘에 닿고자 ‘바벨탑’을 쌓았지만 어리석음을 꾸짖고 응징하는 판관(判官)으로서의 신은 그 탑을 간단히 허물고 인간 족속의 언어를 흩어버렸다. 하지만 이제 그 어떤 종교적 저항 없이 ‘지구촌’을 촘촘히 에워싼 기지국들은 말 그대로 거침없이 “세상의 잡음을 행성 밖으로 송출한다”. 방해만 없는 게 아니라 거리낌도 없고, 나아가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다는 자연법칙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는다. “깨어진 소문”, “붉은 로맨스”처럼 그저 노출만을 목적으로 하는 ‘소리’가 “3박 4일 헤드라인”에 떠다니고, 정작 존재의 음성은 “메아리 없는 대답”으로 아우성이라도 칠라치면 ‘허공’에서마저 ‘경고’를 받는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1연의 “블랙홀 속에서 빠져나가는 보잉747 함성”과 마지막 연의 두 행, “탈출한 하늘이 늙은 길을 끌고 오면/성난 천둥소리가 떼 지어 날아오른다”를 대비적으로 배치해서 ‘일탈’의 의미를 암시적으로 그러나 강력하게 환기한다. 그 물음은 자연의 ‘굉음(轟音)’마저 듣지 못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존재 성찰로 이어진다.


공터를 빠져나가는 낮달이 가속페달을 밟는다 미분양 속도가 플랜카드에 매달려 요동을 친다 폭주족의 정오는 늘 이렇듯 격렬하다 오토바이 바퀴에 검은 산 하나가 끌려온다 검은 산 하나가 내 어깨 뒤에서 솟아난다 산 그림자는 구십 도 각도로 마지막 가로등을 목에 감는다 사거리 교차로를 짊어진 사내가 바람의 갈퀴를 뽑아들고 구름을 향해 뛰어오른다 주홍 글씨 속의 유령들이 태양의 목덜미에서 타들어 간다 비명을 지르는 자동차들의 공중부양, 놀란 LED 간판들 형광 속에서 튀어 나온다 팔월과 구월 사이 삼백 볼트 내비게이션이 지구촌을 뜨겁게 발화시킨다 플라타너스 오른쪽 눈에 붉은 사이렌이 타오른다 점멸등에서 종소리가 쏟아지고 분양받은 지구 하나가 소용돌이친다
― 「주홍 글씨 속의 유령들」 전문


인용 작품의 표면은 계획이 어긋나 활기를 잃은 소도시나 읍내 풍경을 차고 어두운 음조로 그리고 있다. 이곳의 활기 없음은 가속페달을 밟는 ‘낮달’이나 검은 산을 끌고 오는 폭주족의 “오토바이 바퀴”를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숨겨진 진짜 이유는 플랜카드에 매달려 요동치는 “미분양 속도”에 있다. 기대했던 경제적 이익이 눈앞의 현실로 실현되지 않는 곳, 거기는 실재하는 현실 공간이면서 동시에 갖가지 기묘한 현상, 가령 공중부양 하는 자동차들과 오른쪽 눈에 붉은 사이렌을 단 플라타너스, 종소리를 쏟아내는 점멸등의 공간이다.
이 작품은 표제작이기도 하거니와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전언이 들어 있다. “주홍 글씨 속의 유령들이 태양의 목덜미에서 타들어 간다”가 그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주홍 글씨’는 ‘인간의 굴레’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확장해서 “주홍 글씨 속의 유령들”은 무엇, 어떤 상태의 상징이고, “태양의 목덜미에서 타들어 간다”는 사태는 또 무슨 의미인가. 이 의문에 나름의 답을 만들어가는 것도 이 시집을 읽는 하나의 독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고영(시인)

작가 소개

정경미
필명 정빈.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2005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길은 언제나 뜬눈이다』 『거제도 시편』 『차라투스트라의 입』 『어린 철학자는 꽃이 지는 이유를 잊고』 등이 있다. 한국시인협회, 부산작가회의 회원. 〈가변차선〉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 차

제1부


찬비는 모르고 13/좌회전 14/해독되지 않는 15/프로스트의 침묵 16/야행성 18/수족관 속의 폭풍 19/나는 아직 발아 중이다 20/재개발 22/익스프레스 23/무료급식소 24/표류하는 그림자 25/소리의 일탈 26/붉은 커피콩의 반란 28/오래된 골목 29/이륙하는 신발 30/주홍 글씨 속의 유령들 32


제2부


미술관 인문학 35/폴 세잔의 고뇌 36/시간 여행자 37/폴 고갱의 여인들 38/유리병 속의 미술관 39/미술관 퍼포먼스 40/천경자 42/빈센트 반 고흐와의 조우 43/회랑의 유령들 44/어느 사진작가의 달빛 46/어느 사진작가의 달빛 2 47/천경자의 꽃밭 48/생텍쥐페리의 모래밭 50/어느 사진작가의 바다 51/침묵의 귀 52/북극성 53/모래시계 54


제3부


19번 방 57/거리 두기 58/거리 두기 2 59/이륙하는 신발 2 60/19번 게이트 62/과속금지구역 63/한밤의 경주 64/꿈속의 잉카 66/나는 길을 조율한다 67/소리에 대한 변론 68/도시철도 3 70/마지막 낙엽 71/포토 72/카르멘 74/아웃사이더 76


제4부


변방의 서(書) 79/유배 80/무연고자의 봄날 81/달팽이의 신발 82/맨드라미 84/종이 가면 85/사랑 86/잠들지 않는 여백 87/캠프 하야리아 88/달빛 소나타 90/팬터마임 91/정지된 행로 92/다시 봄날 93/그믐달 94/잉카 모텔 95/협제바다 병법 96


해설 백색소음 속의 유령들/고영(시인) 97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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