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재독 철학자 한병철 신작!
의식, 놀이, 축제, 그리고 팬데믹과 공동체의 소멸에 관하여
꾸준히 오늘의 세계에 대해 예리한 분석과 비타협적인 비판을 선보여온 철학자 한병철의 신작 《리추얼의 종말》이 출간되었다. ‘리추얼’을 열쇳말 삼아, 우리 사회가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진단하고 더 좋은 삶을 위한 모색을 이어간다.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형식적인 것이 일소된 삶이 얼마나 부박한지, 개인의 ‘진정성’에 대한 강박적 추구가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결과를 낳는지, 이 사회에 만연한 집단적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를 살핀다. 자아, 욕망, 소비를 넘어서는 대안적 실천으로서 오래된 새 길 ‘리추얼’을 재조명하고, ‘아름다운 형식의 윤리’를 제안한다.
“나는 리추얼이 소멸해간 역사를 향수 없이 간략히 서술할 것이며 그 소멸의 역사를 해방의 역사로 해석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재의 병적 현상들,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침식을 뚜렷이 드러낼 것이다. 그러면서 사회를 집단적 나르시시즘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법한 다른 삶꼴Lebensform들을 숙고할 것이다.”(7쪽)
루틴과 챌린지의 시대, 리추얼의 사라짐
어찌 보면 리추얼의 시대인 듯하다. 미라클 모닝, 명상, 요가, 헬스, 달리기, 독서, 일기쓰기 등등, 사회관계망서비스에는 자신만의 ‘리추얼’과 ‘루틴’을 소개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참여하기를 권유하며 ‘챌린지’하는 포스팅이 풍성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운신의 폭이 제한된 일상을 좀 더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 이런 흐름에 동참하는 인구가 많다. 그런데 ‘리추얼의 종말’이라니, 무슨 이유에서일까? 《피로사회》 《투명사회》 《심리정치》 《고통 없는 사회》 같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철저히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집중한다. 우리의 존재와 인식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헤치고, 여기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원제 “리추얼의 사라짐: 현재의 위상학”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라져가고 있는 ‘리추얼’에 관한 사색을 펼치면서 현재의 위치를 가늠해보고, 이 시대의 모순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책이다.
리추얼이 삶을 지속하게 한다
이 책에서 대부분 ‘리추얼’로 옮긴 독일어 ‘Ritual’은 저자에 따르면 ‘의례’, ‘의전’, ‘전례’, ‘의식, ‘축제’, ‘잔치’ 등의 의미를 두루 포괄한다. 앞서 말한 최근의 ‘리추얼’ 유행에서 가리키는 ‘반복적으로 행해짐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고 생활에 리듬감을 주는 개인의 일상적 습관’ 정도와는 그 뜻이 사뭇 다른데, 이 책에서 리추얼은 “삶을 더 높은 무언가에 맞추고 그럼으로써 의미와 방향을 제공하는 상징적 힘”(122쪽)을 지닌다. 정처 없는 삶을 정박할 수 있게 해주는 단단한 닻과 같은 구실을 한다. 언제나 드나들고 거주할 수 있는 (공간 속의) 집과 마찬가지로, 시간 안에서 머무를 수 있게 해준다(10쪽). 일정한 형식과 규칙에 몰두하게 함으로써 자아를 탈내면화하고(16쪽), 타자와, 주변의 사물들과, 세계와 관계 맺게 한다. 결정적으로, 이렇다 할 소통 없이도 공동체를 형성하고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홀로’와 ‘덧없음’의 싸늘함을 호흡하는 세계
책은 리추얼이 잘 작동하던 사회, 시대, 문화와 리추얼을 상실한 현재를 끊임없이 대비시키며, 현재의 모습을 그려낸다. 신자유주의는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를 강제하고, 이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는데, 리추얼도 이로 인해 사라지는 것 중 하나다. 그 양상은 어떠한가? 끝없이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업데이트해야 하는 세계, 어느 하나에 머무르는 것, 지속하고 끝맺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세계다. 가령 우리는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를 통해 시리즈물을 지칠 때까지 몰아본다(16쪽). 디지털 세계의 빠른 스크롤과 클릭에 갇혀 견고한 ‘사물’과 관계 맺는 일은 줄어든다. 공동체를 굳건하게 만들던 공동의 느낌은 공유되지 않는 단기적 흥분에 밀려난다(22쪽). 사람들은 개별화, 원자화된다. 역자의 말대로 “우리는 ‘함께’와 ‘머무름’에서 나오는 안정감에서 떨어져나와 ‘홀로’와 ‘덧없음’의 싸늘함을 호흡하며 산다”(159쪽). 언어는 “놀이하는 대신에 노동한다“(82쪽). 축제는 이벤트로(59쪽), 엄격한 규칙을 따르던 결투는 (표적을 얼마나 많이 살해했는지를 기록한 ‘득점표’가 교부되는) 드론 전쟁으로 바뀌고(〈결투에서 드론 전쟁으로〉), 사유는 엄청나게 많고 빠르고 투명한 데이터에 밀려난다(〈신화에서 데이터주의로〉). 연출적 거리, 유희적 거리를 유지하며 타자의 외재성에 기초를 두던 유혹은 종말을 고하고 나르시시즘적 포르노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유혹에서 포르노로〉).
자아, 소망, 소비의 저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서
이러한 진단이 너무 부정적인 것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우리 사회에서도 익히 경험하는 바일 것이다. 〈들어가는 말〉에 명기되었고, 부록의 인터뷰에서도 강조하는 것처럼, 저자가 말하는 것은 리추얼이 살아 있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 욕망과 나르시시즘의 덫에 붙잡힌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나서자는 것이다. 이 책은 이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며, ”자아의 저편, 소망의 저편, 소비의 저편에서 이루어지며 공동체를 조성하는 새로운 행위와 놀이의 형태를 발명하는 일“에 독자를 초대한다.
지난해 봄, 스페인에서 이 책의 출간이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종교예식은 물로 악수와 포옹조차 할 수 없는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리추얼의 실종을 몸으로 느꼈을 독자들에게, 이 책의 내용이 와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스페인 유력 언론 두 곳(〈엘파이스〉〈엘문도〉)에서 진행한 저자 인터뷰를 번역해 부록으로 실었다. 독자가 본문을 읽으며 품을 법한 질문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고, 자칫 오해하기 쉬운 저자의 입장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팬데믹이 가져올 사회적 변화에 대한 저자의 전망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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