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얼음에 이끌린 사람들
‘부엌’의 어원은 ‘불’에서 찾을 수 있다. 주먹도끼와 돌칼로 사냥을 해온 호모속에게 불에 탄 고기는 인기가 좋았고, 불은 인간의 진화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부엌의 모든 것이 불과 연결되어오던 차에 유독 냉장고만 불에 반대됐다. 따뜻한 불에서 진화의 핵심 요소를 얻은 인간들은 점점 신선한 음식을 선호하면서 얼음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1842년 바닷가재가 처음 열차를 타고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시카고까지 급행으로 이동했다. 1868년 호주의 소고기는 영국으로 처음 출항했고, 1882년 4000여 마리의 양고기는 최초의 냉장선을 타고 뉴질랜드에서 런던으로 항해했다. 1920년대 말부터는 미국에서 섭씨 영하 40도의 급속 냉동 기술이 개발되면서, 식재료의 손상을 최소화하여 해동 후에도 맛과 모양이 변함없는 냉동식품이 발명되었다.
그렇다면 국내 냉장고의 시초는 뭘까? 1965년에 출시된 금성사의 GR-120 ‘눈표 냉장고’다. 용량은 120리터밖에 안 됐지만, 이마저 자체 기술로는 만들 수 없어 일본 히타치사와 기술 제휴를 했다. 대졸 초임 월급이 1만1000원이던 1968년에 냉장고 가격은 8만600원이었으니 경제 상위 1퍼센트만 집에 갖춰둘 수 있는 물건이었다. 95퍼센트의 국민이 이를 보유하기까진 25년쯤 더 기다려야 했다.
이 책은 냉장고 발명 전의 얼음 연대기도 다룬다. 고려와 조선에서도 얼음 꿀물이나 화채를 즐겨 먹었지만, 냉차가 들어오고 빙과류가 대중화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부터다. 1900년대에 경성 시내에 일본식 빙수점氷水店이 등장한 데다 1915년 서울의 빙수 상인은 442명에 달했다. 어린이 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도 빙수 마니아여서 『별건곤』에 이런 글을 남겼다. “사알-사알 가러서 참말로 눈결가티 가른 고흔 어름을 삽풋떠서 혀ㅅ바닥 우에 가저다 놋키만 하면 씹을 것도 업시 깨물 것도 업시 그냥 그대로 혀도 움즉일 새 업시 스르르 녹아버리면서 달콤한 향긋한 찬 긔운에 혀끗이 환-해지고 입속이 환-해지고 머리 속이 환-해지면서 가슴속 배 속 등덜미까지 찬긔운이 돈다.”
시계를 한참 돌려 〈전원일기〉 방영 시점으로 와보자. 냉장고 구매는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아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드라마 속 복길네는 짠순이로 소문 났는데, 이웃 사람들은 복길 엄마에게 냉장고를 한 대 장만하라며 대거 설득에 나선다. 그녀가 버티는 이유는 그 돈으로 차라리 논밭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동네 친구들이 재차 설득했다. “(복길 엄마) 봐요. 김치를 한번 담그면 일주일 싱겁거든? 그러니깐 버리는 것도 없고, 일손도 안 들고.” “맞아. 매일 아침 김치 담는 수고, 그야말로 헛수고지 뭐.” “그래. 큰맘 먹고 사버려요, 응?” 이에 대해 복길 엄마는 고민을 거듭하다 대답한다. “역시 아니야. 지금 산다고 해봐. 나중에 몇 년 지나면 또 사야 한다며? 그리고 냉장고 사가지고 써봐서 좋으면 세탁기 놓고 싶을 거고, 세탁기 사서 써보고 좋으면은 또 칼라 텔리비전도 보고 싶을 거고…… 아휴, 안 돼!”
그랬던 냉장고였건만 이제는 과잉공급되고 전기세를 잡아먹으면서 ‘과연 냉장고가 필요할까’라는 의문을 낳는 시대에까지 이르렀다. 인간은 언제나 사력을 다해 무언가를 개발하지만, 지나친 탐욕으로 그것을 과잉 추구하다가 부작용을 낳고, 마침내 그것이 개발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려는 일에 열중하곤 한다.
종갓집 냉장고 속과 택배 노동자의 냉장고 속
저자는 인류학 전공자로서 국내외 현지조사를 많이 다닌다. 종갓집의 명맥을 잇고 있는 전남 나주의 남파고택에도 갔는데, 이 집 냉장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3000제곱미터의 대지에 안채, 사랑채 등 총 일곱 동의 건물이 있는 집에서 강정숙 종부는 마침 마루에 앉아 고추전을 만들고 있었다. 종부는 1974년 결혼하면서 혼수품으로 냉장고를 마련했다. 남파고택에 처음으로 냉장고가 들어온 날이다.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봤더니 이 집만의 내림음식이 한가득이었다. 대표적으로 반동치미가 있고, 톡 쏘는 맛이 일품인 홍갓김치, 나주배 보쌈김치, 파김치, 고춧잎을 넣은 집장, 멸치젓 등 조상 대대로 전해온 비법의 반찬들이 있었다. 이 집은 부엌이 두 개인데, 안채 뒷마루에는 현대식 김치냉장고가 두 대 있다.
저자는 서울로 발길을 돌렸다. 여기엔 1인가구가 무척 많아 시선은 자연히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로 쏠렸다. 2019년 10월부터 3개월간 1인가구의 부엌을 조사했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정씨 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져 요양원으로 옮기셨다. 그분 집의 냉장고를 여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야채칸에 수북이 쌓인 초코파이였다. 노인의 당을 초코과자가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서울 노원구 김씨 할머니 댁 냉장고는 음식과 재료로 꽉 채워져 있었지만, 집 안엔 쓰레기가 널려 있고 주방 바닥은 물이 튄 채 그대로인 걸 보니 냉장고 속 음식들도 유통기한이 많이 지난 듯했다. 저자는 고독감이나 우울 증상에 빠지면 가장 먼저 마음의 문이 닫히고, 이어 냉장고 문도 열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음이 죽으면 밥솥 안의 밥은 부패하고 날짜가 지난 햇반과 라면, 통조림이 나뒹굴면서 부엌도 함께 죽는 것이다.
냉장고와 계급
이 책은 경제, 문화, 역사, 민속, 시각예술, 사회사 연구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연구를 파고들며 냉장고에 관한 함의를 이끌어낸다. 그중 마지막 대단원은 계급과 환경 문제에 좀더 초점을 맞춘다. 우리 사회 노인들의 냉장고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장수 욕망을 보여주는 ‘냉장고 타입 A’다. 불로장생, 안티에이징을 향한 이 욕망의 냉장고에는 영양제와 약재료, 홍삼팩, 인삼으로 만든 담금주와 꿀단지가 보인다. 야채칸에는 오렌지, 참외, 호박, 파프리카, 아보카도 등 싱싱한 채소와 과일이 담겨 있다. 마치 신선의 냉장고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다음은 ‘냉장고 타입 B’로, 노년 노동자의 것이다. B 냉장고의 주인은 80대 남성으로, 지하철 택배 일을 10년간 해왔다. 하루 세 건 정도 뛰고 버는 돈은 월 70만 원. 그의 냉장고 첫 칸엔 눕힌 소주병이 있다. 늘 이동 중이라 점심은 주로 빵과 떡으로 해결하기에 10개들이 모닝빵 같은 것도 냉장고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연사회의 ‘냉장고 타입 C’가 있다. C 냉장고의 주인은 1인가구로 자녀는 없다. C 냉장고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미니멀한 모습을 하고 있다. 차마 그 속을 보여줄 수 없는 걸까. 사진 속 냉장고 문은 아주 조금만 열려 있다. 게다가 이 냉장고에는 구청에서 설치한 안심 단말기 센서가 달려 있다. 만약 일정 시간 이상 어르신의 움직임이 없거나 이상 징후가 감지되면, 즉시 지자체에서 해당 가정에 연락을 취하거나 직접 방문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냉장고는 그 사람이 무엇을 먹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처지, 경제적 신분, 나아가 사회계급까지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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