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군산 토박이 김성우(가명)는 최근 6개월짜리 계약직에 사인했다. 전기차 기업 ‘명신’이 새 일터다. 사실 명신에 입사하기 직전 정규직 조건의 사료 공장 면접까지 마친 참이었다. 하지만 명신이 20년 넘게 그가 몸담았던 옛 한국지엠 군산 공장 자리에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굳혔다. 실직 후 어떻게든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생각뿐이었던 그에게 ‘6개월’이니 ‘계약직’이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282쪽)
스물여섯에 당시 대우자동차 공장에 취직했다. 대우에 다니면 1등 신랑감이던 시절이었고, 시쳇말로 공기업 같은 대접을 받았다.(70쪽) 그랬던 한국지엠(대우자동차) 군산 공장이 운영을 중단했다. 경제 구조가 변했기 때문이었고, 자본의 논리를 따른 결정이었다. 김성우는 고민 끝에 희망퇴직서를 냈다. 그리고 10개월 뒤 청소업체를 시작했다. 녹록지 않았다. 사업을 접고 이번에는 페인트 공장과 마스크 공장을 거쳤다. ‘깨끗한 공장에서만 일해 본’ 그에게 작고 열악한 공장은 성에 차지 않았다.(281쪽)
김성우의 삶은 한때 화려했으나 지금은 몰락한 제조업 도시 군산을 닮았다. 젊어서부터 고향에 터를 잡았고, 안정된 중산층 가정을 이뤘다.(129쪽)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느 날 일자리가 사라졌다. 퇴직금을 받고 새로운 일을 찾아봤으나 마뜩잖았다. 쫓기듯 구한 새 직장은 어디 내놓기가 부끄러웠다.(222쪽) 세상에 처음 내쳐지며 존엄 없는 일의 비루함(234쪽)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그나마 저자가 군산에서 만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다시 제조업 현장으로 돌아간 사람이라는 점(287쪽)이 김성우의 삶과 도시에서 찾을 수 있는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이 책은 군산이라는 도시가 제조업 도시로 편입되고 몰락하는 과정을 여러 명의 김성우를 통해 바라본다. 그 중심에 선 ‘현대중공업’과 ‘한국지엠(대우자동차)’은 기업과 공장의 흥망성쇠가 도시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수도권 본사와 지역 생산 기지 등, 군산의 질서가 확립되고 무너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 냄으로써 제4차 산업 혁명 이후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될지도 모를 소도시의 현재를 날것 그대로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제조업 도시 군산의 흥망성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진 개발 바람에서 비켜나 있던 군산은,(61쪽) ‘균형 성장’과 ‘서해안 시대’의 바람을 타고 제조업 도시로 성장했다.(66쪽) 당시 재계 2위였던 대우가 군산 국가 산업 단지에 자동차 공장을 지었다. 그룹 해체와 대우자동차 최종 부도라는 위기가 있었지만 한국지엠이라는 새 주인을 찾았다. 곧이어 군산 제2국가 산업 단지에는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가 자리 잡았다. 조선소를 따라 선박 블록, 기자재 업체들도 군산으로 몰려들었다.(69~71쪽) 양적인 발전은 30여 년간 계속되었다. 자동차 노동자들은 공장에 대한 믿음으로 생활 기반을 도시에 단단히 뿌리 박았다.(186쪽) 사람들은 조선소의 대형 크레인을 보며 세계 도시를 꿈꿨다.(110쪽) 유난히 토박이가 많은 도시 군산은 그곳 사람들에게 일터이자, 삶터이자, 놀이터였다.(47쪽)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닥쳤을 때도 군산의 위기감은 크지 않았다. IMF도 견딘 그들이었다. 오히려 고유가 덕에 군산 공장에서 생산되는 소형차가 잘 팔려 나갔다.(127쪽) 하지만 치솟던 유가가 2013년 하락세로 접어들자 군산의 연비 낮은 차는 더 이상 세계 시장에서 인기 품목이 아니었다. 생산량이 줄기 시작했고, 급기야 지엠 본사는 쉐보레 브랜드를 유럽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유럽으로 팔려 나가는 쉐보레 차는 군산 공장의 생존과 절대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132쪽) 하지만 ‘늘 그랬듯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잔업에 특근까지, 오로지 회사와 일이 전부였던 사람들이었기에 생산량 감소는 애써 무시하고 우아하고 평온한 일상을 즐겼다.(136~137쪽) 재미 삼아 동네에서 찍는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해 보고, 운동을 하거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특히 가족과 함께 있을 땐 ‘아 이런 게 사는 거지’ 싶었다.(135쪽)
2018년 2월 13일, 설을 사흘 앞둔 화요일. 한국지엠 군산 공장은 3개월 보름여 뒤 공장을 패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151쪽) 이미 2008년 미국을 시작으로, 2015년 러시아와 인도네시아, 2017년엔 호주에서 공장이 문을 닫았다. 지엠 본사의 눈에 군산 공장은 누군가의 좋은 일터나 지역 사회의 대들보 같은 게 아니었다. 주주 이익에 충실하지 못한, 그저 이윤을 초과하는 비용일 뿐이었다. 사실 군산이야말로 이러한 효율성과 엄혹한 구조 덕에 호황을 누려 성장한 도시였다.(137~139쪽) 한국지엠 종업원 2044명과 164개 협력 업체 직원 1028명이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었다. 1년 전 조선소 가동 중단으로 이미 4859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상황이었다.(185쪽)
공장이 떠난 뒤 얽히고설킨 운명들
고현창(가명)은 살아남았다. 희망퇴직 대신 회사에 남아 전환 배치되기를 기다렸다. 그가 향한 곳은 군산에서 210킬로미터 떨어진 창원 공장이었다. 아이들 대학 들어갈 때까지 6, 7년만 버티기로 했다.(183쪽) 하지만 불안은 새로운 도시에서도 계속됐다. 언젠가부터 창원 공장에서도 주말 특근이 사라졌다. 곧 2교대 근무가 1교대로 바뀔 분위기다. 공장은 비정규직부터 차례로 직원을 내보낼 것이고, 근무 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공장이 떠나기 전 군산의 모습이 정확히 그랬다.(188쪽)
정순철(가명)은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제조업 기반이 무너진 도시에서 이전 수준이 아닌 그에 버금가는 일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197쪽) 차선으로 치킨집을 차렸다. 가게에 드는 이런저런 비용과 집세로 퇴직금을 거의 다 썼다.(198쪽) 돈보다 가족과 여유라 생각해 왔지만, 가족을 위해 여유를 포기했다. 여유를 포기하니 가족과 멀어지는 것 같았다.(199쪽) 장사 6개월 차에 몸에 이상이 왔다. 손님을 몰아내고 문을 닫을 수 없어 새벽 1시까지 버티다 응급실에 가서 쓰러졌다. 다음 날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출근해서 양파를 썰었다.(201쪽)
공장이 떠난 이후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민첩함을 부러워했다. ‘세상에 나와 보니 정규직들이 완전히 뒤처져 있었다.’ 공장 안에서도 정규직이 등한시하는 힘든 일을 비정규직들이 더 많이 했으니까 능력 면에서도 낫고 생존 능력 자체가 강했다.(230쪽) 실직자가 새 일을 찾는다는 것은 ‘눈을 낮추는 과정’이다.(228쪽) 정규직들은 망설였다. 요양 보호사, 청소업체 경영, 당구장 주인 등 새로운 삶 앞에서 창피함, 부끄러움, 과거의 기준, 자존감과 최소한의 존엄 같은 것을 먼저 떠올렸다.(219~228쪽)
정규직이 머뭇거리는 동안 비정규직은 부두 노동자, 아파트 관리 사무소 직원, 시내버스 운전 노동자 등으로 재취업했다.(230쪽) 한국지엠의 비정규직, 특히 30~40대 젊은 노동자들은 정부와 고용 기관에 모범적인 케이스로 불린다. 독려나 관리 없이도 알아서들 새 일자리를 구했다. 비정규직으로 살아왔기에 임금과 처우에 까다롭지 않고, 희망퇴직금을 받지 못해 다급했으며, 무엇보다 옮겨지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229쪽) 20여 년 전 IMF 외환 위기가 낳은 노동자로 볼 수 있는 이들은 새로운 경제 위기 앞에서도 잘 적응한 것만 같다.(230쪽)
다만 해고 과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의 없는, 비합리적인, 납득할 수 없는 해고는 잘린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했다. 한국지엠이 아닌 협력 업체 대표 말 한마디로 내쳐진 기억, 나란히 옆에서 일했던 정규직에게 주어졌던 희망퇴직금이나 퇴직 이후 삶에 대한 배려를 전부 받지 못했다는 충격이 컸다.(232쪽) 회사가 뒤늦게 마련한 위로금 1000만 원을 포기하고 비정규직들끼리 십시일반 돈을 모아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시작했다.(233쪽)
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은 위기를 겪고 있다
공장이 떠난 지 1년이 지난 시점, 군산에 본격적으로 전환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역이 대기업 생산 기지만으로 성장하는 모델은 10년짜리다.’ 산업의 사이클에 따라 핵심 기능이 없는 지역 생산 기지는 먼저 잘려 나간다. 기업은 호황일 때 돌아와 비정규직으로 자리를 채운다.(241쪽) 따라서 대기업의 생산 기지에 머무는 방식은 안 된다. 노동자 격차나 기업 간 격차를 벌리는 산업도 안 된다. 지역에서 경영과 노동에 관한 의사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작아도 지역에 뿌리 박은 기업 여러 곳이 자생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247쪽)
경제 위기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IMF 사태나 세계 금융 위기를 떠올린다. 트라우마로 남은 그 시절을 두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야기와 분석을 쏟아 낸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 제4차 산업 혁명으로의 움직임은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해 온 한국 경제에 다시 한번 커다란 변화를 예고한다. 국지적으로 나타나는 이 새로운 위기는 지난번의 그것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 군산은 물론 거제, 울산 동구, 통영, 고성, 창원 진해구, 목포, 영암, 해남까지 자동차와 조선을 경제의 중추로 삼았던 도시들은 모두 고용 위기에 빠져 있다.
한순간 일자리를 잃게 된 사람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 운명들, 불안과 절망이 삶을 잠식하는 순간들, 놓지 못한 영광의 기억들, 억지 희망을 비웃는 허망한 풍경들이 쇳소리와 불꽃 대신 제조업 도시를 채우고 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군산의 반성과 노력이 그들만의 바람에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것이 된다면, 그것은 군산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의 실험이 될 것이고, 더 나아가 큰 변화를 맞는 세계 산업과 노동, 도시 정책 일반의 실험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247쪽)
‘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은 위기를 겪고 있다.’ 이 한 문장을 풀어내기 위해 저자 방준호 기자는 6주 동안 군산에 머물며 그곳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2019년 7월 둘째 주 《한겨레21》 커버 기사로 소개되었다. 그 후 2년 반이 지났다. 그곳 사람들의 일상은 어떻게 바뀌어 있는지 궁금해 다시 찾았다. 이 책에는 그 뒷얘기를 담았다. 지방에 대한 서울 사람의 무심함과 기자의 타산적 태도를 반성하는 마음도 담았다. 저자는 ‘누군가의 혼란이 나의 혼란이 된다는 것은 불행이되 우리를 한데 엮을 공통 감각’이라 말한다. 따라서 저기 군산의 황망함을 여기 우리가 들여다볼 여지가 있다. 이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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