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콜센터의 탄생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학자가 만난 여성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
한국 산업근대화의 상징인 구로공단이 주력하는 산업 분야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으며, 자연스레 공단 내 여성 노동자의 일자리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 구로공단에 ‘공순이’라 불린 여공들이 있었다면, 오늘날 같은 장소에서 이름을 바꾼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이하 디지털단지)에는 스스로를 ‘콜순이’라 부르는 콜센터 상담사들이 있다. 1부 「콜센터의 탄생」은 디지털단지에서 콜센터를 찾아 나선 저자가 여성 노동 및 인권의 현주소를 50여년 전 구로공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추적한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콜센터 여성 상담사의 삶이 ‘공순이’로 불리던 여공의 삶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밝혀낸다.
특히 오랫동안 흡연과 중독에 대해 연구해온 저자는 콜센터가 상담사들 사이에서 ‘흡연 천국’으로 불린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악성 고객의 갑질과 관리자의 실적 압박에 시달리고 콜센터의 물리적ㆍ전자적 감시 시스템에 통제당하는 상담사들은 흡연실을 도피처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콜센터 흡연실은 “한숨들의 무덤”이며 “여기서 흡연이냐 아니면 뛰어내리느냐”는 선택지만 있을 뿐이라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상담사가 있을 정도다. 이 책은 여성 상담사의 흡연율이 높은 원인이 열악한 노동 현장에 있음을 낱낱이 보여주며, 노동자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어떻게 그들의 건강을 해치는지 밝힌다.
‘친절, 정확, 신속’ 뒤에 가려진
감정 그 이상의 노동 현장, 콜센터
콜센터의 콜은 언제나 밀린다. ‘친절, 정확, 신속’을 외치며 항상 ‘미소 띤 음성’으로 콜을 받는 상담사의 신체적ㆍ정신적 건강은 쏟아지는 전화에 밀려 뒷전이 되기 십상이다. 2부 「투구가 된 헤드셋」은 현장에서 상담사가 겪는 구체적인 문제상황을 생생한 인터뷰와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명료하게 전한다. 상담사들은 업무가 바빠 오전에는 자리에서 한번도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상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상담 과정에서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평가 대상이며, 점수에 따라 ‘급’이 나뉘고 월급이 차등 지급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콜센터 상담사가 사회의 필수 노동자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코로나19 관련 업무는 급증한 반면 현실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스스로를 ‘불판 위 마른오징어’ ‘일회용 배터리’라고 표현하는 상담사들은 악성 고객은 물론 치밀하게 실적을 관리하고 압박하는 상사, 하청업체 소속 상담사를 하대하는 원청업체 직원, 그리고 잠재적 경쟁자가 되어버린 동료들과도 갈등을 겪는다. 이런 현실은 상담사의 신체적ㆍ정신적 질병을 유발하며, 실제로 콜센터 상담사는 다른 직군의 서비스업 종사자에 비해 거의 모든 질병에서 월등히 높은 유병률을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담사들은 질병을 마치 세금처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고질적인 원ㆍ하청 구조 때문에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물을 소재조차 불분명한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감정노동이라는 명명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상담노동을 ‘정동노동’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설명한다. 상담사들은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조절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욕적이고 부당한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정동’에 길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상담사, 사람입니다”
수화기 너머에 존재하는 삶을 말하다
저자는 현장연구를 진행하며 여성이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본능적으로’ 적합하다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과 맞닥뜨렸다고 고백한다. 여성은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 해도 돌봄노동에서 자유롭기 어려우며, 대부분이 여성인 상담사 직군(민주노총 콜센터 노조 여성 조합원 비율 94.1%, 2021년 기준) 역시 고객을 친절하게 보살피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요구받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모두가 현실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 실마리를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3부 「새로운 몸을 찾아서」에서 찾는데, 상담사들이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노동조합을 결성해 사측에 대항한 사례, 그리고 생활운동 모임을 운영하며 자신의 몸, 나아가 업무를 대하는 자세를 적극적으로 개선한 사례 등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일찍이 콜센터가 발달한 영국과 인도의 사례와 한국의 사례를 비교ㆍ분석하며 전세계적으로 여성 하청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폭넓게 조망한다.
콜센터는 모든 산업 분야에 걸쳐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수화기 너머 상담사는 지워지기 일쑤다. 우리는 누구나 낯선 번호로 걸려오는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하는 전화를 받은 적이, 혹은 고객센터 전화번호를 누르고 상담사 연결을 기다려본 적이 있다. 저자는 매일 수백번씩 ‘안녕’하느냐는 인사를 건네는 상담사들이 정작 스스로의 안녕을 챙기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는 사회, 노동 때문에 질병을 앓는 이웃이 없는 사회를 꿈꾸는 한 문화인류학자의 긴 여정이 이제 독자들에게도 안부 인사를 건넨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관욱
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이자 가정의학과 전문의. 의료인류학 전공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을 지내고 서울대, 한양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강의했다. 오랫동안 흡연과 중독, 감정노동과 건강에 대해 연구해왔으며 최근 몸, 수행성, 정동, 배치, 리미널리티, 의례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과학적 입증 가능성 너머의 피해자들(콜센터 상담사, 이주노동자, 흡연자, 부랑인 시설 입소자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폴 파머, 세상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 줘』 『흡연자가 가장 궁금한 것들』 『굿바이 니코틴홀릭』 『아프면 보이는 것들』(공저)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공저) 『의료, 아시아의 근대성을 읽는 창』(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의 병적 징후들』(공역) 『보건과 문명』(공역) 등이 있다.
목 차
프롤로그 안녕하세요, 콜센터 연구하는 인류학자입니다
1부 콜센터의 탄생
1장 공순이에서 콜순이로
2장 담배 연기 속 한숨들의 무덤
2부 투구가 된 헤드셋
3장 감정 이상의 노동 현장, 콜센터
4장 어느 상담사의 하루
5장 코로나19 팬데믹이 들춰낸 콜센터의 현주소
3부 새로운 몸을 찾아서
6장 상담사들의 노동운동 도전기
7장 일단 몸부터 펴고 이야기합시다
8장 사이버타리아의 시대, 콜키퍼의 탄생
에필로그 콜키퍼 선언
주
참고문헌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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