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역사의 급소’를 알면 세계사가 쉬워진다!
세계사 중심을 관통하는 13가지 질문과 통찰력 있는 답변
역사에도 ‘급소’가 있다. 상대의 급소를 효과적으로 가격하면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듯 역사의 급소를 날카롭게 통찰하면 방대하고 복잡한 세계사를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다. 이 책은 세계사 중심부를 관통하는 13개 명장면과 ‘역사의 급소’에 해당하는 통찰력 있는 질문・답변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사의 급소를 찌르는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Vital Point 1.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오래 살았다면 자신이 지배한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렸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 이와 관련된, 그러면서도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고대 그리스 세계의 변방에 머물렀던 국가 마케도니아는 어떻게 그토록 빠르게 그리스 전역을 제패하고 대제국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후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저자 다마키 도시아키는 두 가지 비결을 꼽는다. 첫째,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핵심에 들지 못하고 변방에 머무른 탓에 무사안일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도전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필리포스 2세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로 이어지는 위대한 영웅 군주의 출현으로 잠재력과 에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데 그리스 세계를 완벽하게 지배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토록 빠른 속도로 페르시아제국을 제패할 수 있었던 흥미로운 요인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교통망! 인더스 문명과 오리엔트 상업망에서 시작해 페르시아가 공들여 정비한 교역로를 아우르는 장대한 교통망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는 제국 안에서 ‘왕의 길(Royal Road)’로 불린 도로망을 정비했다. 학자들은 이 도로가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인더스까지 이어지던 오리엔트 통상로를 기초 삼아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이 ‘왕의 길’을 지나며 페르시아제국을 제패하고 인도를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시대와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 소수의 상인이 지나다니던 통상로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규모 군대가 통과하는 군사도로로 바뀐 셈이다. 달리 말하자면 페르시아는 자신을 크게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진정한 제국으로 만들어준 그 교역로 탓에 역설적으로 알렉산드로스 군대에 치명적 일격을 당한 뒤 몰락한 셈이기도 하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 한 가지.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왜 인더스강 유역에서 인도 중심부를 향해 동쪽으로 더 진군하지 않고 기수를 돌렸을까?’ 그것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위에 언급한 ‘교통망’ 문제와 맞닿아 있다. 왜냐하면 그 대단한 페르시아제국의 ‘왕의 길’이 인더스강 너머 지역까지 정비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 군대의 진군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오래 살았다면 자신이 지배한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렸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았을 거로 본다. 왜일까? 마케도니아로 대표되는 당대 그리스 세계에 그토록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체제와 지식, 경험 등이 결정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수한 그리스 문명이 오리엔트와 인더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라는 견해는 오늘날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에도 동서 문화・경제 교류는 꾸준히 있어 왔고, 그러한 과거 유산이 오히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보는 관점이 옳다는 것이다. ‘앞서가던 그리스에서 후진적인 오리엔트와 인도로 문명을 전파했다’는 구도가 아닌(실제로 오리엔트의 경제와 문물이 그리스보다 훨씬 풍요로웠다) 서로에게 없던 것을 얻는 ‘더불어 이로운 교역모델’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실제 역사에 좀 더 가깝다는 논리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생각해볼 때 알렉산드로스가 오래 살았더라도 그가 지배하는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리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판단된다.
Vital Point 2. 16세기 전국시대에 일본이 유럽의 군사혁명을 불가능에 가까운 속도로 따라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회’의 무기 판매 덕이었다는데, 과연 사실일까?
유럽의 근대적 ‘군사혁명’은 15~16세기에 일어났다.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을 지배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 발루아 가문과 건곤일척의 전쟁을 벌인 이탈리아전쟁은 실전에서 소총과 대포 등의 화기가 대량으로 사용된 최초의 전투로 기록된다.
일본은 유럽의 근대적 군사혁명을 불가능에 가까운 속도로 따라잡아 가장 성공적으로 군사혁명을 이룬 국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16세기 일본에 처음 총포가 전래된 이후 불과 몇십 년 만에 일본인은 대량의 소총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16세기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일본 군사혁명의 성과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인물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속도로 유럽 군사혁명 성과를 따라잡을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을 풀 열쇠는 ‘예수회’에 있다. 1534년 스페인 성직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창설한 예수회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가톨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선교 단체이자 종교 단체의 얼굴이며, 다른 하나는 무역상인의 얼굴이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들이 일본에 판매한 주요 상품 중 하나가 바로 ‘무기’였다는 점이다.
예수회는 1540년 로마 교황의 공인을 얻은 이후 인도와 신대륙 선교 활동에 온 힘을 쏟았으며 급격히 세력을 확대해갔다. 그들은 특히 ‘포르투갈령 동인도’, 즉 중근동부터 일본에 이르는 광대한 아시아 지역 선교에 주력했다. 그 과정에 예수회는 경제와 군사 양면에서 포르투갈 국왕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예수회는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이권을 옹호하고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실제로 예수회는 포르투갈과 일본의 무역에서 가격 교섭 등 여러 방면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당시 포르투갈을 거쳐 들여오는 매력적인 상품은 일본 선교의 강력한 지원군 역할을 했다. 일본 전국시대 장수들은 포르투갈 선박이 싣고 오는 군수품에 눈독을 들였다. 예수회는 대포, 초석, 탄약 등을 조달해준 대가로 영주에게서 선교권을 얻어냈다. 오다 노부나가도 그 여러 장수 중 한 명이었다.
예수회가 깊이 관여한 무기 가운데 ‘구니구즈시(国崩し, 국토를 파괴하는 것)’라는 별명이 붙은 포르투갈제 대포가 있다. 규슈 지방의 패장 오토모 소린은 이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고 경쟁자들을 크게 위협할 수 있었다. ‘구니구즈시’는 예수회 소속 마카오 교구 사제의 중개로 일본에 들어왔으니 예수회는 일본에 유럽 무기를 조달하는 ‘죽음의 상인’이었던 셈이다.
예수회의 활동으로 선교, 무역, 군사가 마치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절묘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군수품 조달로 예수회와 거래한 전국시대 장수 중에는 스스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오토모 소린도 세례를 받고 규슈 지방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려 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오무라 스미타다처럼 자신의 영지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바치려는 영주도 나타났다.
Vital Point 3.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에도 오랫동안 인도에 비해 한참 뒤처졌던 영국의 면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세계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그 흐름을 뒤바꾼 상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면’을 빼놓을 수 없다. 면의 역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세계 경제에서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균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인류는 언제, 어디에서 맨 처음 면을 생산하기 시작했을까? 대략 기원전 28세기 무렵 인도 서부에서 기원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런 터라 인도는 오랜 세월 면 생산에 관한 한 가장 앞선 나라였으며, 주요 면 수출 지역이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이후 신항로 개척시대가 본격화했다. 그리고 15세기말,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에 진출한 유럽 상인은 인도 시장을 마주하고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인도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 종류와 거래에 참여하는 상인 집단의 규모 면에서 유럽은 상대도 안 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인도 시장에서 취급되는 상품은 지리적으로도 유럽보다 훨씬 광대한 지역에서 수집되었기에 구색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거래 체계 또한 한층 정밀하고 복잡했다.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인도 상권은 동남아시아까지 확장되었다. 또한 인도 북서부, 오늘날 파키스탄 국경에 접한 구자라트의 상인은 인도양을 건너 믈라카까지 진출했다. 이후 구자라트 상인과 믈라카의 결속력은 점점 단단해져 구자라트의 ‘캄바트항과 믈라카는 서로의 존재 없이는 번영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이 시기 인도에는 그 이전의 세계사에서는 결코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경제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규모는 당시 최대 제국이던 중국의 명나라, 청나라와 맞먹을 정도로 거대했다. 유럽 경제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유럽 상인이 직접 인도양에 진출하게 된 17세기 무렵 인도 면은 스페인을 시작으로 차츰 유럽 각 지역에 유입되었다. 그런데 유럽 상인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그들이 인도에 가져다 팔 수 있는 상품을 좀처럼 확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에 따라 유럽-인도 무역에서 유럽은 줄곧 적자 상황을 면치 못했다. 무역 불균형 문제가 심각해지자 유럽 각국에서는 인도 면 수입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1700년 영국이 가장 먼저 인도 면 수입 금지법을 제정했고, 연이어 네덜란드를 제외한 유럽 여러 나라가 비슷한 법안을 시행했다.
“산업혁명으로 양국 섬유산업이 기계화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인도의 전통적인 면직 공업은 기계로 짠 영국제 저렴한 면포에 밀려 큰 타격을 받았다.” 세계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일반적인 설명이다. 큰 흐름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교과서에서 설명한 대로 영국 면제품이 인도 면제품을 간단히 제압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 산업혁명은 멘체스터의 면직물 산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멘체스터의 면직물 생산은 1730년대 중반까지는 내수용 소규모 산업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멘체스터에서 생산된 면은 품질에 있어서 인도산 면과 경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조악한 수준이었다. 영국의 면 산업은 심지어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후로도 한동안 인도를 쉽사리 앞지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영국에서 면 생산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기계가 줄줄이 발명되면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무렵 인도의 면 생산은 여전히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반면 영국에서는 공장제도가 정착해 발전하면서 영국 면직물 생산량은 1770~1790년에 10배로, 그로부터 12년이 흐르는 동안 다시 10배로 증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1820년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영국의 면제품 생산량은 인도의 생산량을 밑돌았다.
오랫동안 영국과 인도의 면 산업에 놀랍게도 큰 격차가 벌어지게 한 결정적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기술 혁신이나 공장 시스템 이외의 부분에 있었다. 즉, 영국에서는 원료인 목화가 재배되지 않는 점이었다. 목화 생산 여부야말로 영국이 해결해야 할 핵심 문제였다.
결국 영국은 이 만만치 않은 문제를 해결하고 면 생산 체제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을까? 답은 간단한데, 영국이 세계 최대 해양제국이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노예를 수송하고, 신대륙에서 목화를 싣고 와 본국에서 제품을 만들고, 그것을 아시아 시장에 내다 파는 강력하고도 효율적인 시스템과 메커니즘을 구축해 최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과 메커니즘은 전 세계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갈등과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켰다.
이 책의 저자는 세계사 중심을 관통하는 13개 명장면과 ‘급소’를 통해 방대하고 복잡한 세계사를 명쾌하게 정리한다. 위에 제시한 세 가지 관점은 그중에서도 가장 필수적인 내용이다. 그밖에도 이 책에는 ‘바이킹은 왜 콜럼버스보다 500년 일찍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도 ‘최초 발견자’로 인정받지 못했을까?’, ‘근대 유럽의 경제 성장이 ‘근면’과 ‘금욕’을 중시하는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허구인 이유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과연 ‘역사의 페이스메이커’에 지나지 않을까?’, ‘19세기에 범선을 몰아내고 유럽 각국의 주요 운송수단이 된 증기선은 어쩌다 제국주의의 첨병이 되었나?’, ‘중국은 과연 미국에 이어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을까?’ 등 흥미로우면서도 세계사의 급소를 찌르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역사에 문리가 트이고 인간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고 싶어 하는 독자에게 유용한 책이다.
역사의 급소를 찌르는 13가지 질문과 통찰력 있는 답변
•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오래 살았다면 자신이 지배한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렸을까?
• 바이킹은 왜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아메리카대륙에 발을 디디고도 ‘최초 발견자’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까?
• 신항로 개척시대 초기, 포르투갈이 아시아의 향신료보다 더 눈독 들인 물품은 무엇이었을까?
• 16세기 전국시대에 일본이 유럽의 군사혁명을 불가능에 가까운 속도로 따라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회’의 무기
덕이라는데, 과연 사실일까?
• 근대 유럽의 경제 성장이 ‘근면’과 ‘금욕’을 중시하는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허구인 이유는?
•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과연 ‘역사의 페이스메이커’였을까?
• 천재 수학자 페르마가 고안한 ‘확률론’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보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18~19세기에 영국은 천문학적 부채, 남해 버블사건, 수많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까?
•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 오랫동안 인도에 비해 한참 뒤처졌던 영국의 면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 ‘중립국’은 전쟁을 반대하는 국가가 아니라 전쟁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국가다?
• 19세기에 범선을 몰아내고 유럽 각국의 주요 운송 수단이 된 증기선은 어쩌다 제국주의의 첨병이 되었나?
• ‘영국이 산업혁명 덕분에 19세기를 세계를 지배하는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었다’라는 논리가 허구인 이유는?
• 중국은 과연 미국에 이어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작가 소개
지은이 : 다마키 도시아키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시샤대학교(同志社大学) 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했다. 동대학원 박사 과정을 중퇴하고, 교토산업대학교 경제학부 강사를 거쳐 조교수로 근무했다. 이후 「북유럽의 상업과 경제 1550~1815년」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오사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경제사학을 전공한 그는 현재 교토산업대학교 경제학부 경제학과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다이아몬드의 세계』『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물류는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이주, 이동, 식민, 이민의 세계사』『근대 유럽의 탄생—네덜란드와 영국』『해양제국 번영사』『유럽 패권사』『‘정보’ 제국의 흥망-소프트파워 500년사』『선생님도 모르는 세계사』『선생님도 모르는 경제 세계사』등이 있다.
옮긴이 : 서수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직장생활에서 접한 일본어에 빠져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해 출판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옮긴 책에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이주, 이동, 식민, 이민의 세계사』『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2가지 심리실험—욕망과 경제편』『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88가지 심리실험—자기계발편』『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1가지 심리실험—인간관계편』『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3가지 심리실험—
뇌과학편』『소수는 어떻게 사람을 매혹하는가?』등이 있다.
목 차
vital point 1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오래 살았다면 자신이 지배한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렸을까?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등 고대 문명과 관련 깊었던 마케도니아 왕국 |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와 페르시아제국을 제패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점’을 확보하는 방식의 지배가 아닌 ‘면’을 확보하는 방식의 지배 덕분이었다? |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더스 문명이 서로 활발히 무역했다는데,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 투탕카멘 왕의 마스크에 박힌 보석 라피스라줄리가 인더스 문명에서 수입한 것이었다고? |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통일하여 오리엔트 세계를 지배한 ‘철’의 왕국 아시리아 |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의 번영을 가능케 한 ‘왕의 길’이 역설적으로 훗날 알렉산드로스를 끌어들여 패망을 앞당겼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오래 살았더라도 그가 전쟁으로 지배한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리지 못했을 것으로 보는 근원적 이유
vital point 2
바이킹은 왜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아메리카대륙에 발을 디디고도 ‘최초 발견자’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까?
바이킹의 무역은 약탈인가 무역인가? | 콜럼버스보다 500년 일찍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도 ‘최초 발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 | “무함마드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 | 유럽과 이슬람 세계를 연결하는 상업 네트워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바이킹 | 바이킹의 교역로가 없었다면 한자동맹의 번영도 없었을 것이다?
vital point 3
신항로 개척시대 초기, 포르투갈이 아시아의 향신료보다 더 눈독 들인 물품은 무엇이었을까?
대항해시대 초기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향신료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황금’을 노렸다는데? |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이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끌고 간 코끼리는 인도코끼리였을까 아프리카코끼리였을까? | 메카 순례길에 엄청난 양의 금을 뿌리고 다녀 카이로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던 ‘역사상 최고 부자’ 만사무사 국왕 | 뱃멀미로 배에 타지 못했던 ‘항해 왕자’ 엔히크 |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신항로 개척자’는 누구였을까? |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에 도달하기 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사이를 사람들이 오갔다는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 향신료 운송로가 바뀌며 이탈리아 경제가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
vital point 4
16세기 전국시대에 일본이 유럽의 군사혁명을 불가능에 가까운 속도로 따라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회’의 무기 판매 덕분이었다는데, 과연 사실일까?
신항로 개척시대 초기에 포르투갈과 예수회는 무슬림의 결정적 도움으로 탄탄한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데? | 무슬림 상인이 제패한 아시아의 바다 | 예수회가 ‘죽음의 상인’이라는 악명 높은 이름으로 불린 까닭 | 오다 노부나가는 예수회와 관계를 단절했을까?
vital point 5
근대 유럽의 경제 성장이 ‘근면’과 ‘금욕’을 중시하는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허구인 이유는?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술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없었다? | 근대 유럽의 경제성장이 ‘근면’과 ‘금욕’을 중시한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는 시각이 잘못된 프레임인 이유 | 15세기 근대 유럽에서 상업은 어떻게 그토록 크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 상업 발전이 언어 발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 활판 인쇄술 보급으로 등장하여 근대 유럽 비즈니스를 송두리째 바꾼 상업 안내서 | 유럽의 상업 시스템과 메커니즘은 어떻게 국제 표준으로 자리 잡았나
vital point 6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과연 ‘역사의 페이스메이커’였을까?
15~16세기는 물론이고 18~19세기까지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세계를 제멋대로 양분한 두 개의 조약,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 | 포르투갈의 실체가 ‘상인의 제국’인 까닭 | 스페인의 최전성기와 쇠퇴기를 모두 경험한 국왕, 펠리페 2세 | 태평양 무역의 개척자가 스페인이라고? | 사실은 ‘좀처럼 쇠퇴하지 않은 두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vital point 7
천재 수학자 페르마가 고안한 ‘확률론’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보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페르마의 확률론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보험 시스템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데? |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편지로만 확률론 분야를 함께 개척한 두 천재, 파스칼과 페르마 |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도 해상보험이 존재했다는데? | 해상 운송 사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분담하기 위한 한자동맹의 시스템, 파르텐레더라이 | ‘근대적 기업’의 탄생 | 핼리 혜성과 생명보험 | 커피하우스에서 세계 최고의 보험조직으로
vital point 8
18~19세기에 영국은 천문학적 부채, ‘남해 버블’ 사건, 수많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까?
근대 세계의 가장 막강한 나라 대영제국이 사실은 부채 대국이었다? | 영국은 어떻게 천문학적인 부채에 시달리면서도 재정 파탄을 면할 수 있었을까? | 빚은 영국이 더 많았는데, 영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이유 | 똑같은 ‘버블 사건’의 위기에 대한 전혀 다른 대응으로 백팔십도 다른 운명을 맞이한 두 나라 영국과 프랑스 | 18~19세기에 영국은 어떻게 수많은 전쟁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
vital point 9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 오랫동안 인도에 비해 한참 뒤처졌던 영국의 면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세계사를 바꾼 상품으로 ‘면’을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 이유 | 15세기 말, 인도 시장에 진출한 유럽 상인의 눈이 휘둥그레진 까닭은? | 모직물과 달리 면직물이 세계화에 적합한 이유 |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로도 오랫동안 영국의 면 산업이 인도의 그것에 비해 많이 뒤처져 있었다는데? | 영국이 면 생산 체제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결정적 비결은?
vital point 10
‘중립국’은 전쟁을 반대하는 국가가 아니라 전쟁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국가다?
근세 유럽이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서도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 | 함부르크에 온갖 민족, 온갖 종교의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는? | 18세기 중반~19세 초반,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역동적인 도시였던 함부르크 |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최대 수혜국은? | 미국이 ‘중립’을 표방한 진짜 이유 | ‘중립국’은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익을 챙기려는 국가다?
vital point 11
19세기에 범선을 몰아내고 유럽 각국의 주요 운송 수단이 된 증기선은 어쩌다 제국주의의 첨병이
되었나?
19세기 유럽 각국이 산업화로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신대륙 아메리카로 떠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 까닭은? | 범선을 압도하는 증기선의 가장 큰 장점은? | 제국주의의 주요 운송 수단이 돼버린 증기선 | 증기선이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다 | 점점 더 좁아지는 세계 |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도운 증기선
vital point 12
‘영국이 산업혁명 덕분에 19세기 세계를 지배하는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었다’라는 논리가 허구인 이유는?
‘헤게모니 국가’의 결정적 한 방은? | 생각보다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산업혁명 | 사람보다 물건보다 빠르게 | 왜 수수료 비즈니스는 돈을 벌까? | 세계사 속의 전신망
vital point 13
중국은 과연 미국에 이어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오늘날의 미국을 헤게모니 국가라고 답하기 어려운 까닭 | 15세기 초 명나라 황제 정화의 대원정 루트를 그대로 답습한 중국의 일대일로 | 중국이 영국이나 미국처럼 헤게모니 국가가 되는 데 방해되는 가장 치명적 약점은? | ‘자국 우선주의’의 한계에 부닥친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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