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달려라, “우당탕탕 김민서”
시집의 화자 김민서는 “보기보다 밝고 생각이 많”으며 “후회도 잘하고 반성도 잘”(「물질과 성질」)하는 순진한 사춘기 소녀다. 삶은 버겁고 “앞날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지만 언제나 “깨발랄 명랑 토끼로 오래오래/살고 싶은”(「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행복한 꿈이 있고, “넘어져 병”에 걸린 것처럼 걸핏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스텝이 꼬이”고 결승선 앞에서 주저앉거나 구르기 일쑤여서 “우당탕탕 김민서”라는 별명도 얻지만 넘어지고 엎어지고 깨져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우당탕탕 김민서」) ‘우당탕탕’ 신나게 달린다. 어른들은 “벗어나지 마라/벗어나면 떨어진다/떨어지면 낙오자가 되는 거”라고, 오로지 제자리에서 ‘높이’ 뛰기만 하라고 강요하지만 김민서는 “천장을 뚫고 우주 밖으로”, “자유를 향해 열린 지평선” 너머까지 더 ‘멀리’ 날아가고자 한다. 문제는 ‘높이’가 아니라 ‘거리’, “오백 원짜리 동전 한 개”(「우리가 방방이라고 부르는」)면 충분히 풀 수 있는 일이다.
왜 방방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오백 원짜리 동전 한 개면 됐다
천장을 뚫고 우주 밖으로
발을 세게 굴렸다 구르는 만큼
통통 튕겨 주는 게 좋았다
문제가 ‘높이’를 구하는 게 아니라
‘거리’를 구하는 거면 더 좋겠지만
초원의 얼룩말
물소의 다리
야자수 사이로 부는 바람
자유를 향해 열린 지평선
노트 가득 이런 말들을 적으면
나도 어딘가로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벗어나지 마라
벗어나면 떨어진다
떨어지면 낙오자가 되는 거야
어른들은 쉽게 말하지만
트램펄린 위에서
높이높이 뛰고 뛰어
지평선 너머로 가고 싶었다
―「우리가 방방이라고 부르는」 전문(22~23쪽)
누가 뭐라 해도 주인공은 나야
김민서는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아이다. “외롭다고 아무하고나”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는 자존감과 “덧칠은 언제나 떡칠”이 된다는 걸 알기에 “시간이 남아돈다고 다 그린 그림에 덧칠”(「나의 MBTI」)하지 않는 지혜가 있다. 또 “다리를 넓게 펴고 그리면/운동장쯤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야무진 포부와 “시험을 망친 일”이나 “친구에게 들은 거슬리는 말”(「지구의 반지름」)쯤은 툭툭 털어 버리는 긍정의 마인드가 매력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임을 알고 있다는 것. “공부 말고 하고 싶은 거 있음 말해 봐!”라는 아빠의 말이 “공부 안 하냐?”(「지구가 둥근 이유」)라는 말보다 더 무섭지만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뭘 잘하는지 곰곰 생각해 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김민서는 “잘하는 게 하나 없는 나”(「멍때리기」)지만 실제는 “아직 자기가 고수라는 것을 모르는 애”(「내가 쓰는 책」)라는 것을 슬쩍 내비치며 세상의 주인공인 자신을 잘 지켜 내려고 애쓴다.
꽃들이 멀리서도 눈에 띄는 건
풀이 무성하게 있어서지
생각해 봐!
만약 세상에 새들이 없다면
나무가 그렇게 아름다울까?
이 풀밭에서도
내가 주인공이면 돼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야
지은이도 나야
―「일인칭 주인공」 부분(62~63쪽)
악몽을 수집하고, 귀신과 친구 하기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오늘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삶이 마냥 즐겁고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밝고 씩씩한 김민서에게도 악몽은 일상이다. “눈을 비벼도 계속 꿈”(「기말고사」)이고, 빤히 “꿈인 줄 알겠는데도”(「암탉을 잡으려다」) 무서워 눈물이 나고, “같은 장면을 여러 번”(「이상한 운동회」) 꾸기도 한다. 기묘한 꿈이 현실을 밀어내고 버젓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할수록 내가 유령인지 유령이 ‘나’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쯤에서 김민서는 결심한다. 악몽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악몽을 수집하기로 하면서 악몽과 같은 현실을 끌어안고 당당히 맞서 보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가위눌린다고 피하는 자리였다
그날따라 애들이 자리를 다 차지해 어쩔 수 없이
보건실 창가 침대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다 깼는데
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저건 난데…
그럼 서 있는 나는 누구지?
침대에 누워 있는 나는
서서 나를 바라보는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더 자라고
이불을 끌어당겨 그 애를 덮어 주었다
그 애가 나인지
내가 그 애인지…
창밖에서 햇살이 긴 팔을 뻗어
내 배를 살살 만져 주었다
아프던 배가 잠잠해졌다
―「보건실 창가」 전문(26쪽)
악몽을 수집하면서 김민서는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본다. 악몽 속에 나오는 귀신은 이제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또래 친구로서 “공포의 영역에서 우정의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건너온다”(김지은, 해설). 악몽 속 귀신들은 실상 나의 친구들이며, “밤마다 내 침대에 걸터앉아 길 잃은 뼈와/흩어진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은 유령”(「나의 서랍 속에는」)은 바로 “나를 바라보는 나”(「보건실 창가」), 김민서 자신의 자아다. 이제 악몽 속 귀신들은 불안한 밤을 지켜 주는 요정이 되고, 김민서는 “그러니까 우리 한번 보자!”(「지신 강림」)고 호기롭게 말을 걸 수 있게 되면서 서서히 악몽을 다스려 나간다. 임수현 시인은 여기서 “악몽을 잘 모으면 꽤 괜찮은 사람이 된다는 걸”(시인의 말) 넌지시 알려 준다.
뭐야 뾰족한 손톱도
찢어진 입도 치렁치렁한 머리카락도
아무것도 없잖아
말캉말캉 슬라임처럼 흐느적거리네
발바닥을 살살 간지럽히고
이름을 불러 주면 친구도 될 수 있겠다
책상 어지럽히지 말고
내 옷 입고 돌아다니지 말고
엄마한테 들키면
방마다 소금을 뿌릴지 몰라
신발장이나 장롱 위에 올라가지 말고
싱크대나 세탁기 안은 위험해
책상 밑에 얌전히 있어
아무도 없는 날 널 부를게
이어폰을 하나씩 꽂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줄게
―「친구가 되어 줄게」 전문(38~39쪽)
그때도 있고 지금도 있는 아이
‘「별책 부록」’이라는 제목을 단 4부에서는 옛이야기와 고전 소설 속의 인물들을 현재로 불러와 재구성한 색다른 시들을 만날 수 있다. 참신한 소재와 기발한 발상으로 엮어 낸 시편들이 청소년시의 새로운 형식으로 단연 주목받을 만하다. “전생에 나는 엄마의 엄마/엄마는 내 자식이었는지 모른다”(「이생규장전」)며 엄마와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헤아려 보기도 하고, “인당수에 뛰어내린 심청”을 받아 안으려면 “연꽃이 얼마나 커야 되는지”(「연꽃 속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 따져 보는가 하면, 흥부는 “흥이 많은 사람”(「흥부의 노래」)이라는 뜻밖의 해석을 내놓는 등 열두 작품이 모두 흥미롭게 와닿는다. 특히 “수학여행 떠난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한/4월의 어느 날”(「주먹 쥐고 손을 펴서」)을 기억하며 “비가 쏟아지는 날” “일요일인 줄 모르고” “빈 교실에 앉아 있는 장화와 홍련이”(「일요일의 장화와 홍련」)의 모습을 그린 장면은 가슴속에 오래도록 깊은 여운을 남긴다.
나 홍길동
입신양명까지는 바라지 않아
내 이름 걸고 살아가고 싶을 뿐
(중략)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고 기고
기고 날아도 제자리만 아니면 좋겠어
세상을 구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
이름을 걸고
나도 뭔가 되고 싶어
―「세상의 모든 홍길동」 부분(98~99쪽)
좋은 꿈은 너에게로, 밝은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더
악몽 같은 현실을 차분히 받아들인다 해도 악몽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불안한 심리나 스트레스가 악몽을 꾸는 원인이기도 한데, 이는 성장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미 불안한 밤을 통과해 본 청소년들에게 악몽은 이제 두렵지 않다. 임수현 시인은 “악몽도 잘 적어 두면 언젠가 쓸모 있을 거”(시인의 말)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은 결국 수많은 악몽을 통해서 자아의 본모습을 이해하고 성장해 나간다는 것을 이 시집을 통해서 보여 준다. 임수현의 청소년시가 가슴 깊이 와닿는 것은 악몽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친절하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이 시집을 읽으며 청소년들은 “악몽과 동행하는 서정적인 궤도”(해설) 안에서 사춘기라는 불안과 혼돈의 시기를 지혜롭게 건너 한 걸음 더 성장해 나갈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아, 오늘 밤에는 근심 걱정일랑 잊어버리고 “모두 잘 자요!/쥐었던 주먹을 펴고”(「주먹 쥐고 손을 펴서」).
얘들아
노래를 부르렴 춤을 추렴
한 손에는 사탕을 다른 손에는 꽃을
손에 손 잡고 춤을 추렴
빨간 꽃은 더 빨갛게
노란 꽃은 더 노랗게 마법을 걸어 주마
(중략)
이를 어째! 난 이제 불운만 덮칠 거야
울지 말거라 어린 영혼아
파도 쓰나미 지진 따위가 네 책상 위로 마구
쏟아진대도 내가 널 지켜 줄게
좋은 꿈은 너에게로
나쁜 꿈은 구멍으로 내보낼게
―「침대 밑에 사는 요정」 부분(56~57쪽)
작가 소개
임수현
2016년 『창비어린이』 동시 부문 신인문학상, 2017년 『시인동네』 시 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2019년 『외톨이 왕』으로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시집 『아는 낱말의 수만큼 밤이 되겠지』, 동시집 『미지의 아이』(공저)를 냈다.
목 차
제1부 난 왜 잘 깨는 거야
기말고사
천사 피아노
잠자는 금붕어
암탉을 잡으려다
수호천사
절교
홀수
걔들은 ‘우리’인 거고 난 그냥 ‘너’였던 거
우리가 방방이라고 부르는
개구리가 진짜 저주를 푸는 법
보건실 창가
0교시
시험 전날
괜찮다고 말해 줘
이상한 운동회
폭죽놀이
제2부 악몽을 모으는 중이야
지신 강림
친구가 되어 줄게
귀신은 발목을 가져다 뭘 할까
멍때리기
내가 쓰는 책
우당탕탕 김민서
곁
무성하게 무성의하게
지구가 둥근 이유
비즈니스 관계
저수조의 추억
침대 밑에 사는 요정
야간과 자율과 학습
백만 년 동안
일인칭 주인공
지구의 반지름
너는 누구니?
제3부 나의 드림캐처
악몽을 모으는 드림캐처
밤에 더 아픈 이유
손 모서리에 까만 줄이 옮겨 올 때까지
나의 서랍 속에는
착한 사람들
주먹 쥐고 손을 펴서
가장 무서운 이야기
불이 났다
영혼을 찾아서
물질과 성질
지켜 줄게
행운의 여신
물놀이용 유니콘 튜브처럼
목욕탕에서
나의 MBTI
제4부 「별책 부록」: 그때도 있고 지금도 있는 아이
이생규장전
흥부의 노래
연꽃 속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심청
세상의 모든 홍길동
두 김생 이야기
난춘-춘향
마음의 문-허생
호랑이는 고양잇과-호질
사춘기는 계절의 다른 이름-별주부전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토끼전
취유부벽정기
일요일의 장화와 홍련
해설
시인의 말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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