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하얀 연골의 크리처가 오고 있다”
최선의 감각으로 우리 곁의 존재를 가늠하는 안미린의 ‘유령론’
2012년 “과감하게 생략하고 비약하고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어법”을 구사한다는 평을 받으며 데뷔한 안미린의 두번째 시집 『눈부신 디테일의 유령론』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시어끼리 의미의 충돌을 일으키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들이 발생하면서 다시 절묘하게 연결된다. 때문에 다수의 시편을 읽어나갈수록 겹겹이 쌓이면서 확장되는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곤 한다.
이번 시집은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유령’이라 불리는 존재가 시집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안미린의 시들은 종이를 접었을 때 모양을 알 수 있는 도면처럼, 사방으로 펼쳤을 때 전체를 볼 수 있는 지도 접책처럼, 서로 포개졌다가 다시 열리기를 반복하며 더듬더듬 나아간다. ‘유령’이 등장하는 시구들이 수없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하나의 형태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시인은 쌓아 올리지만 구축되지 않는 것들, 구축되지 않기에 허물어지지도 않는 미지의 존재에 곁을 내주고, 그를 감각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한다. 더불어 이 시집에서는 별도의 해설을 싣는 대신 유령이 출몰하는 시구들을 모아 색인 형태의 글 「찾아보기―유령류」를 덧붙였다. ‘눈부신 디테일의 유령론’을 가늠해볼 수 있기를 바라며 마련해둔 길라잡이이다.
드러나지 않는 존재들을 열어 보이는
‘비미래’의 차원 속에서 시작된 유령의 시야
드론을 띄웠다. 유리 묘비가 간결하게 도미노를 이루고 있다.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거겠지. 땅 밑에선 작고 우아한 식물성 관이 생분해되고 있겠고. 유리질 묘비에 반사되는 빛. 그 빛을 받고 자라나는 흰 꽃들. 흰 꽃을 으깨어 추출한 향수 한 방울. 도미노처럼 향기가 퍼져나갔다. 드론을 밀어내듯 눈부시게 퍼져나갔다. 지도 모서리를 접은 하얀 빈자리. 드론에 잡히지 않는 곳까지.
이름 모를 유리 묘비에 입김을 불어넣었지.
투명한 유언의 차원은 잊힌 적 없는 선약이었다.
―「유령계/3」 전문
“하얀 연골의 크리처”가 온다. 무른 뼈를 가진 생명체가 다가올 때 눈을 감고 ‘얼린 티스푼을 두 눈에 올리면 차갑고 환한’ 유령의 시야를 얻는다(「유령 기계/1」). 이 유령의 시야로 “유리 묘비”가 도미노를 이루고 있는 곳을 살펴보자. 빛을 반사하는 유리 묘비의 장소에선 “그 빛을 받고 자라나는 흰 꽃들”이 있고, 다시 이 “흰 꽃을 으깨어 추출한 향수”가 있다. 퍼져나가던 향수는 “지도 모서리를 접은 하얀 빈자리”로 흘러든다. 눈에 보이는 세계, 측정할 수 있는 세계를 넘어 뒷면에 도착해 “이름 모를 유리 묘비” 앞에서 입김을 불자 “투명한 유언”이 모습을 드러낸다. 빛과 불로 사물의 형태와 색을 살피는 원래의 시야를 버리고 차갑고 환한 유령의 시야를 획득한 이에게 비로소 유령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위 시의 마지막 행에서 시인은 “투명한 유언의 차원은 잊힌 적 없는 선약”이라 말한다. 누군가에게 쉽게 읽힐 리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잊힐 만하건만, 잊힌 적 없는 약속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선 그의 다른 시 속 시어들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시집에서는 ‘미래’ ‘훗날’ 등 아직 오지 않은 날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단어들의 쓰임은 일상에서 으레 사용하는 의미와 맞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입김을 불었을 때 드러난 투명한 유언처럼, “한 줌 고운 뼛가루를 불어본 순간” 시작되는 것, “떠난 사람으로 비워낸 세계”(「비미래」, p. 35), 즉 공터를 향하는 화살처럼 방향성 없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아니, 어쩌면 철겨운 것 같기도 하다. “초봄의 겨울이, 늦가을의 여름이”(「비미래」, p. 48) 들려오는 사계절로 읽히기도 한다. 모두가 잊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잊힌 적 없는 선약’이, 미래가 ‘비’미래가 되는 시간 속에서 존재를 알린다.
“눈과 입과 영혼 사이에, 조금 짙은 하얀 심장이 뛸 때”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믿어본다는 것
빛과 불을 밝혔다.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오랜 기억 속을 걸어 나오는 눈빛. 이윽고 도착하는 눈빛.
긴 질문의 끝은 온기였다. 길고 긴 유령사는 그보다 더 길고 연약한 인간사를 되짚었다. 미래의 유령보다 유령의 미래를 기억했다. 유령의 끝은 유령이 옅은 몸을 갖는 것, 투명한 형태를 잃어나가는 것, 환한 빛에 불을 붙이듯
따뜻해지는 것.
―「기계의 끝」 부분
첫 시 「유령 기계/1」의 시구인 “하얀 연골의 크리처가 오고 있다”는 4부에 이르러 “하얀 연골의 크리처가 그 세계에 위험이 되지 않게 걸어 나오고 있다”로 변주되어 재등장한다. 하얀 연골의 크리처가 걸어 나올 때 앞서서 두 눈을 감고 ‘차갑고 환한 유령의 시야’를 얻었던 이는 4부에서 “눈을 감기 전에” 눈부심을 보여주길 원한다. 다가올수록 “뼈를 빌려주고” “희고 단단한 뼈를 내어 주고 싶”(「유령의 끝/3」)어 한다. 유령에 형태를 더하고픈 소망은 이후에 등장하는 시에서도 다양한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를테면 “쌀가게 딸” “설탕 가게 아들” 같기도 한 아이들이 흰색의 알갱이들로 ‘눈사람의 심장과 무릎’을 만들고, “눈이 쌓이면 부재한 적 없는 발들이 보인다”며 5부에서는 눈송이 모양의 제목들로 이뤄진 시 열 편을 연속적으로 배치해 눈 내리는 풍경을 상상케 한다.
비슷하면서 서로 다른 장면들을 쌓아가다 보면 형태를 가늠할 수 없어서 손에 쥘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던 유령의 끝에 다다른다. “유령의 끝은 유령이 옅은 몸을 갖는 것, 투명한 형태를 잃어나가는 것”(「기계의 끝」)이다. 차갑고 환한 시야로 첫인사를 건넸던 존재는 따뜻한 입김에 드러나는 투명한 유언으로, 아이들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심장으로, 유령 곁에 더 조용한 사람으로 옆을 내어준다. 유령의 끝에 이르러, 보이지 않아도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보이지 않는다 해도 곁의 존재를 믿는다는 말을 발설하기 위해 최선의 용기로 눈부시도록 디테일한 안미린의 ‘유령론’이 펼쳐진다.
작가 소개
안미린
서울에서 태어나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이 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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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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