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다시 한번 밝힙니다
이 소설은 허구입니다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들여다본 적은 없는 이야기,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고 고통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던 그 이야기를 김중미 작가가 세상에 꺼내 놓았다. 작가가 수십 년을 마음속에 품어 왔지만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고 싶었고, 글을 시작하고도 여러 번 멈춰서고 망설였던 이야기다.
그동안 깊은 이해와 애정을 바탕으로 가난한 이웃들의 삶을 따뜻하게 담아낸 작품을 통해 ‘리얼리즘의 정석’이라고 불려 왔던 김중미 작가가 이 소설만큼은 ‘허구’라는 것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야기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소설 속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현실과 너무나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우리 가까이에서 너무나 빈번하게 벌어지지만, 쉽게 지워지고 무시되고 묻혀 버리는 일을 겪은 아픈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것은 성폭력이다.
당신이 내게 한 짓,
그 행동을 가능케 한 세상을 고발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직접적인 성폭력 피해자는 최지영과 이하늘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에는 최지영의 딸 가온이와 이하늘의 동생 결이가 있다. 봄만 되면 도지는 불안증과 불면증을 안고 사는 엄마를 오래 지켜본 가온이는 친구 결이가 위태롭다는 것을 알아챈다. 언니의 자살로 힘들어했던 결이는 가온이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회복해 가고, 언니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간다.
피해자는 긴 세월 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홀로 그 고통을 감당하다가 죽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을 찾지 못했다. 가해자는 성폭행을 저지른 남자 하나가 아니었다.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게 막고, 그들이 생각하는 더 중요한 무언가를 위해 너만 참고 견디면 된다는 암묵적인 강요를 했던 이들 역시 모두 가해자였다.
이 이야기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새겨진 폭력의 기억이 어떻게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 보여 준다. 또한 그 폭력의 트라우마가 피해자의 가족과 친구에게까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깊이 있게 파고든다. 최지영과 이하늘은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고통과 싸우는 동시에, 딸들과 동생들이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 증언을 시작한다.
그날의 일을 복기하기 위해, 되도록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나는 잊고 싶은 기억들을 다시 불러내야 합니다. 그게 너무 무서워서 지금도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주위를 맴맴 도는 것 같습니다. 이 두려움과 고통을 당신은 상상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이 글을 읽는 것은 당신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적어도 그렇기를 바랍니다. - 157쪽
일기와 편지 그리고 유서
내가 아닌 너를 위한 증언
이 이야기에는 일기와 편지 그리고 유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개인적이고도 내밀한 고백이 담겨 있는 형식으로 쓰인 글들은 이 소설이 ‘허구’라는 점을 자꾸 잊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김중미 작가의 상상력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 놓고, 그들의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며 세심하게 살핀다. 이 이야기가 단순한 고발이 아닌 이유다.
지영의 고통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경미는 가온이와 결이를 돌보며 치유의 과정에 함께한다. 미래는 가온이와 결이가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자리를 계속해서 만든다. 서로의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눈물을 닦아 주고, 기댈 어깨를 내어 주는 따뜻한 연대는 상처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지켜 주는 작은 반창고가 된다.
긴 가뭄에 뿌리를 다친 것 같아요. 어린나무를 홀로 방치한 걸 후회했어요. 뿌리가 큰 상처를 입지 않도록 도와야 했는데 말이에요. 저도 이제 더는 죽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게 누구든. - 204쪽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작품을 써 온 김중미 작가가 지금 이 시점에서 마음이 아픈 여자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죽은 이들을 위해 시작한 이 글은 결국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이야기가 되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중미
196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87년부터 인천 만석동에서 ‘기차길옆공부방’을 꾸려 왔으며, 지금은 강화로 터전을 옮겨 농사를 짓고 인천과 강화를 오가며 ‘기차길옆작은학교’의 큰이모로 살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과 이웃들의 삶을 녹여낸 장편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동화 작가가 되었고, 깊은 고민과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들로 세상에 감동을 전하고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동화 『종이밥』 『꽃섬 고양이』, 청소년 소설 『모두 깜언』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곁에 있다는 것』 , 에세이 『꽃은 많을수록 좋다』 등이 있다.
목 차
1. 엄마가 왜 그랬는지
2. 살아 있는 게 미안했어
3. 안전하다고 믿는 세계가 무너져도
4. 길고 긴 터널의 끝
5. 함께라면 어디라도
6. 그 괴로움에 가닿을 수 없어서
7. 흉터 또한 나의 한 부분
8. 사라지지 말아요
9. 동생들을 위한 증언
10. 뿌리가 큰 상처를 입지 않도록
11. 가면을 벗을 용기
12. 나를 지킬 힘
13. 아무도 죽지 않을 거야
14. 서로를 돌보는 일
15. 우리는 다 빛나
작가의 말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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