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블론드』는 실로 신화적 압승이다, 여기서 매릴린은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니다-의미심장한 거대한 흰고래, 자연의 맹목적 힘뿐 아니라 인간의 맹목적 권력을 상징하는 표상._GQ
매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며 발표하는 소설마다 파란을 일으키고 문단과 독자의 주목을 받아온, 그 이름만으로 고유한 ‘장르’가 된 조이스 캐럴 오츠가 21세기 벽두에 20세기 가장 상징적인 아이콘을 주인공으로 한 거대한 스케일의 장편소설을 내놓는다. 시종일관 굵직하고 논쟁적이며 독특한 미국적 주제를 다뤄온 오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소설, 바로 『블론드』다. 『블론드』는 2000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압도적으로 생생하고 강렬하다” “오츠는 자기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소설을 창조해냈다” “도저히 몰입하지 않을 수 없는 소설”과 같은 극찬과 함께 퓰리처상, 전미도서상 등 여러 문학상 후보에 오르며 걸작이라는 평을 두루 받았다. 그리고 첫 출간 후 20년이 되는 해인 2020년 『블론드』 20주년 기념판이 다시 출판되었다. 그와 발맞춰 넷플릭스에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블론드〉가 제작되었고, 2022년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는 『블론드』가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읽히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는 반증이다. 아니, 오히려 시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새롭게 ‘다시 읽기’가 가능한 혹은 필요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념판 ‘서문’을 쓴 일레인 쇼월터(프린스턴대 영문학과 명예교수)가 말한 것처럼 “고작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책은 먼로의 이야기를 과장하여 선정적으로 다뤘다고 읽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열정적이고 예언적인 변론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먼로는 나의 ‘모비 딕’, 전기충격기 같은 강력한 이미지다.”
『블론드』는 오츠가 우연히 보게 된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되었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조화로 만든 왕관을 쓰고 목에는 귀여운 로켓 목걸이를 건, 아직 전혀 매릴린 먼로로 보이지 않는 열다섯 살 노마 진 베이커의 환히 빛나는 얼굴’을 사진에서 보고 오츠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 시절 녹록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던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이 된 매릴린 먼로에 의해 지워져버린 외로운 이 소녀에게 자신이 생명을 불어넣어줄 수 있으리라는 전율을 느꼈다. 그래서 처음에는 평범한 여고생이 스타로 탈바꿈하는 중편소설을 쓸 계획이었으나, 먼로에 대해 알아갈수록 ‘단순한 피해자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거인이었던 한 여인’을 탐구하려면 보다 거대한 허구적 형식이 절실함을 깨달았다. 오츠가 직접 밝혔듯 “먼로는 나의 ‘모비 딕’, 무수히 다채로운 층위의 의미와 의의가 중첩되어 진짜 대하소설이 나오겠다 싶은, 전기충격기 같은 강력한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츠가 쓰고자 했던 건 매릴린 먼로의 전기가 아니었다. 당연히 역사적 사실을 따르는 전기소설 또한 아니었다. 『블론드』는 전적으로 허구의 산물이다. 오츠는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증류’라는 과정을 통해 사건을 압축하고 융합해 먼로의 인생에서 ‘상징적인 몇몇만 선택적으로’ 살피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밀한 시적 진실과 영적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 오히려 픽션 형식을 극대화했다. 이와 함께 20세기 중엽 미국 사회와 문화를 특징짓는 정치, 스포츠, 종교, 범죄, 공연 등을 먼로의 삶과 교차시키며 시대적 배경의 골격을 창조했다. 남성중심적인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 영화산업 내 공산주의자에 대한 마녀사냥과 문화계 블랙리스트, 살해당한 젊은 여성들에 대한 뉴스 보도 등이 심도 있게 각각의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그려지면서 작품 전체의 ‘서사시적 품격’을 높여준다.
“내가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내 삶의 모든 시간을 정당화해야 했어요.”
오츠는 노마 진 베이커가 그녀 자신의 경험, 그리고 더 폭넓게는 미국 사회에서 어떤 ‘삶의 요소’를 대표한다고 보았다. 가난하게 태어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결국 어머니에게도 버림받아 고아로 성장해야 했던 어린 소녀는 동화에서처럼 금발의 ‘어여쁜 공주’가 되어 만인의 사랑을 받게 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이 진정 원했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 결핍 때문에 노마 진은 배우로서 타고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늘 위축되고 스스로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다. 늘 내적 불안감을 안고 마음을 의지할 누군가를 갈구한다.
영화배우로서 눈부신 커리어를 쌓아가면서도 ‘매릴린 먼로’조차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의 배역이라고 여길 만큼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은 언뜻 보면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여겨질 수도 있다. 오츠는 “내가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내는 내 삶의 모든 시간을 정당화해야 했어요”라는 노마 진의 말을 책상 옆에 붙여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고 말한다. 즉, 오츠가 매릴린 먼로에게서 포착한 것은 그 ‘이례적임’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보편적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내가 쓴 것은 ‘매릴린 먼로’가 아니었다”고, “그녀를 그린 내 초상화가 생물학적 사회적 성을 초월했으면 하고 남성 독자도 여성 독자만큼이나 그녀와 동일시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20세기 가장 화려한 성공을 거둔 한 여성의 내면에 웅크린 거지 소녀, 추방자, 아웃사이더의 목소리와 교신하여 신들린 듯 써내려간 심리적 대서사시!
소설은 매릴린 먼로가 죽기 하루 전날인 1962년 8월 3일로 거슬러올라가 십대 자전거 배달부의 모습을 한 ‘죽음’이 소포를 전하러 오는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이 몽환적인 구절로 오츠는 ‘할리우드, 즉 거울과 스모그와 그림자로 이루어진 세계이자 여자의 몸을 자극과 수익을 위한 상품으로 취급하는 세계에 사는 어느 여성 스타의 운명’에 독자를 끌어들인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아버지, 정신병원에 입원한 어머니, 그리고 고아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다 이른 결혼을 하고, 우연히 ‘카메라의 눈’에 포착되어 잡지 모델로 데뷔하고 이어 처음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급부상해 찍는 영화마다 흥행 가도를 달리는, 그러나 만연한 여성혐오 문화 속에서 여성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에 수치심과 자기혐오를 겪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스캔들에 시달리고 마지막엔 ‘프레지던트’를 사랑하게 되는 비극을 맞는 슬프고도 얄궂은 운명으로.
오츠는 이 삶의 여정을 풀어내기 위해 이전과 다른 문체 양식을 택했다. 그 여정 자체가 까다롭고 복잡한 수수께끼에 다름 아니며 매우 다층적이기에 그에 걸맞은 ‘서사시’ 양식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끊임없이 내적 진실을 찾아 깊이 파고들어가는 ‘심리적 사실주의 양식’이었다. 여기에 오츠는 ‘동화와 고딕소설의 문학적 전통’까지 끌어들여 서사를 더욱 입체화한다. 이를 통해 오츠는 ‘에마 보바리가 자신의 시공간을 표상했듯이, 자신의 시공간을 표상하는 여성의 초상을 창조’하고 했다. 그래서 독자는 어느 장면에서는 동화책을 읽는 듯한, 어느 부분에서는 섬뜩한 괴기소설을 읽는 듯한, 그리고 어느 순간엔 심리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이야기에 빨려들어간다.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여성 문학의 신호탄이 된 예언적 작품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 『블론드』는 독자와 평단의 찬사도 받았지만 ‘충격적이고 기괴하며 과격하다’는 평도 없지 않았다.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성적으로 착취하는 소위 ‘할리우드의 관행’을 가감없이 구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7년 일어난 미투운동은 이것이 마냥 ‘충격적이고 과격한’ 소설적 묘사가 아님을 세상에 드러내줬고, 오늘날 『블론드』는 ‘좀더 현실적으로 여겨지며, 여기에 담긴 페미니스트적 분노는 정당성을 얻’었다.
먼로의 이야기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널리 알려져 있고, 그런 만큼 숱한 책과 영화와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블론드』는 그 유명세에 가려진 혹은 유명세가 지워버린 먼로의 진정성에 천착한다. 따라서 독자는 그저 화려한 삶을 살다 간 한 스타 여배우가 아닌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사랑받기를 원하고 내면적 갈등을 겪고 좌절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한 여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조이스 캐럴 오츠(Joyce Carol Oates)
매년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는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 여덟 살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처음 문학적 감동을 접하고, 열네 살 때 할머니에게 선물받은 타자기로 작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1964년 첫 장편 『아찔한 추락』을 펴낸 뒤 오십 편이 넘는 장편을 비롯해 시, 산문, 비평, 희곡 등 거의 모든 문학 분야에서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찬 현대인의 삶을 예리하게 포착해왔다. 「얼음 나라에서」(1967)와 「사자The Dead」(1973)로 오헨리상, 『그들』(1970)로 전미도서상, 『좀비』(1996)와 『악몽』(2011)으로 브램스토커상, 『폭포』(2005)로 페미나상 외국문학상, 「화석 형상」(2011)으로 세계환상문학상을 받았으며, 『블론드』(2000)는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뿐 아니라 『블랙 워터』(1993), 『내가 사는 이유』(1995)에 이어 세번째로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다. 또한 2003년 문학 부문 업적으로 커먼웰스상과 케니언리뷰상, 2006년 시카고트리뷴 평생공로상, 2019년 예루살렘상을 받았다. 그 밖의 작품으로 『카시지』 『이블 아이』 『대디 러브』 『인형의 주인』 『그림자 없는 남자』 『흉가』 『폭스파이어』 『멀베이니 가족』 등이 있고, 산문집 『적대적인 태양』 『작가의 신념』, 시집 『익명의 죄』 『천사의 불꽃』 『시간 여행자』 『부드러움』 등이 있다.
옮긴이 : 엄일녀
을묘년 화곡동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출판 기획과 잡지 편집을 겸하다 지금은 전업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섬에 있는 서점』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비바, 제인』 『여자는 총을 들고 기다린다』 『레이디 캅 소동을 일으키다』 『미스 콥 한밤중에 자백을 듣다』 『비극 숙제』 『샬럿 스트리트』 『너를 다시 만나면』 『나이트 워치』 『이웃집 여자』 『착한 도둑』 『미스터 세바스찬과 검둥이 마술사』 『안 그러면 아비규환』 『거짓말 규칙』 등을 번역했다. 『리틀 스트레인저』로 제10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목 차
작가의 말 007
서문 011
프롤로그 1962년 8월 3일
특급배송 029
아이 1932 -1938
키스 035
목욕 041
모래 도시 082
제스 이모와 클라이브 삼촌 141
잃어버린 아이 155
선물 주는 사람들 164
고아 171
저주 185
소녀 1942 -1947
상어 205
‘시집갈 때’ 207
장의사의 조수 275
어린 아내 290
전쟁 358
핀업 1945 371
소속사 380
딸과 어머니 389
변종 404
벌새 408
여자 1949-1953
카리스마 왕자님 437
‘미스 골든 드림스’ 1949 441
연인 469
오디션 471
탄생 483
앤절라 1950 486
부서진 제단 537
룸펠슈틸츠헨 554
거래 564
넬 1952 575
룸펠슈틸츠헨의 죽음 599
구출 612
그날 밤… 634
로즈 1953 638
제미니 665
광경 702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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