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에 빠지기 위해,
사랑에 윤곽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하여 사랑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
기쁨과 슬픔, 경이와 혼란, 분노와 고통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짤막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지구 전체를 뒤덮을 만큼 기나긴 글이 필요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미 제출된 답변들이 지구를 한참 뒤덮고도 남았는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인들, 소설가들, 극작가들이 사랑에 관한 글을 썼다. 지금에 이르러서 사랑은 더 흔해졌다. 사랑을 다룬 서사는 전통적인 문학을 넘어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웹소설, 웹툰, 영화, 드라마, 유튜브 동영상, 게임, 온갖 가십 등 폭발적으로 늘었고, 사랑에 초점을 둔 학문적 경계 역시 사회학,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문화이론 등으로 넓어졌다. 그뿐인가. 교통 및 통신 수단 발달은 물론 전 지구적으로 보급된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하고든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됐다(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동행이 사랑으로 옮겨 가는 두 사람을 섬세하게 비추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사랑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사이먼 메이는 《사랑의 탄생》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사랑을 어찌 정의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랑을 정의 내리려는 무수한 시도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에게 사랑은 가장 숭고한 것, 신을 향한 도약으로 여겨졌다. 어떤 이들에게는 가부장제가 여성을 휘두르기 위해 씌운 눈가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사랑이 진화심리학적 행위나 호르몬 작용에 불과했던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제 나머지 반쪽,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찾는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 중 어떤 것도 사랑을 완전무결하게 정의하지는 못했다.
사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감정이자 다른 많은 감정을 포괄하는 감정이며, 상태이고,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은 좋은 것이자 고통스러운 것이며, 자연발생적이고 꾸밈없는 것이자 일종의 계약 관계이며, 영원불멸한 것이자 언제든 산산이 부서질 수 있는 불완전한 것이며, 상대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면서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사랑은 딱 떨어지게 구획 지을 수 없는, 더없이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는 기묘한 역설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사랑은 흔해졌고, 많은 이들이 사랑에 대해 떠들어대지만,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사랑은 정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아무런 동기도, 조건도 없는 것인가? 단지 ‘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이기 때문에 어떠한 의무를 지지 않았음에도 가진 것을 모두 내주려는 것인가? 비틀스가 노래했듯이, 사랑에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뿐”인가? 하여 사랑은 계급을, 인종을, 성性을, 온갖 위계질서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사랑이 복잡한 만큼이나 사랑을 둘러싼 판타지의 역사는 고대 신화에서부터 디즈니 영화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견고하다. 사랑의 판타지가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변함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몇몇 판타지는 비록 그 형태는 늘 변화를 겪었을지라도 지속성을 보여주었다. 로젠와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영속적인 판타지를 탐구한다. 가령 사랑은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끄는 것이지 더 낮은 곳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 아니며(초월), 불화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 아니라 한마음에서 비롯되고 한마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부부는 일심동체’ 같은 관습어구들이 보여주듯이).
판타지, 특히 사랑에 관한 판타지를 다룬 것이라면 백마 탄 왕자 따위는 없다는 식으로 판타지를 낱낱이 해체하는 책이라 예상하기 쉽겠지만, 로젠와인은 판타지를 그렇게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판타지 없이 살 수 없다. 판타지는 현실을 떠받치는 기둥이자 현실의 부분이므로. 예컨대 여러 이야기에서 수없이 재현된 사랑의 판타지는 우리에게 적절한 행동 규범과 대본과 모범을 제공한다. 썸을 탈 때나 연애를 할 때 그런 대본 없이는 상대가 내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아차릴 도리가 없을 것이다. 판타지는 이제 막 피어나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윤곽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 그것은 꼭 사랑만이 아니라 삶 전반에서 그렇다. 여성성의 대본과 남성성의 대본이 짜여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타지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재구상되기도 하며, 전용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해방의 가능성이 놓여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고 또 로젠와인이 다룬 오랜 사랑의 판타지들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지지만, 이질적인 판타지들이 뒤엉켜 만들어낸 사랑의 역사 자체가 판타지를 제공한다. 사랑에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그러하듯이) 못을 박고 영원한 진리로 만들고자 하는 판타지를.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판타지들이 묘사하는 형상대로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여 사랑 자체가 거대한 판타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이르러도 놀랄 필요는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판타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놓는다면, 이 문장을 별 냉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바버라 H. 로젠와인
중세학자이자, 감정사학자이자, 시카고 로욜라 대학 명예교수다. 중세학자로서 로젠와인은 《중세의 짧은 역사》, 《중세 읽기》, 《50가지 사물에 담긴 중세》(공저), 《서양의 창조》(공저) 등을 썼다. 중세의 여러 측면 가운데서도 ‘감정’에 관심을 가졌던 로젠와인은 《중세 초기의 감정적 공동체》에서 감정에 대한 인지 이론 및 사회 구성주의 이론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미시적 역사 연구를 바탕으로 중세에 존재했던 다양한 감정적 공동체를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감정사에서 주요 패러다임이었던)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즉 감정을 억제하고 일정한 행위 규범을 받아들이면서 문명화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을 담은 이 책은 “획기적”이고 “독창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밖에도 《감정의 세대》, 《감정의 역사란 무엇인가》(공저) 등 감정사에 관한 책을 저술한 로젠와인은 2020년 《분노: 감정의 충돌하는 역사》로 한 가지 감정에 집중한 책을 내놓았고,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에 눈을 돌렸다.” 분노보다 한층 더 어렵고, 모순적이며, 수많은 이야기와 밈, 속담, 판타지로 둘러싸여 있는 감정, 그 자체로 많고도 다양한 의미를 아우르는 것을 넘어 다른 수많은 감정(기쁨, 고통, 경이, 혼란, 자부심, 모욕감, 수치심, 평온함, 분노 등)들과 관련되어 있는 감정에. 이 책은 우리가 사랑을 무엇이라 생각하고 생각해왔는지를, 말하자면 사랑에 대한 인식의 지도를 제시한다. 우리는 어떤 틀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는가? 혹은, 우리는 사랑으로 하여금 어떤 틀을 통해 우리를 들여다보게 만드는가?
옮긴이 : 김지선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출판사 편집자를 거쳐 현재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반대자의 초상》, 《기사도에서 테러리즘까지》,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 《런웨이 위의 자본주의》, 《북유럽 세계사》 등이 있다.
목 차
머리말
1장 한마음
2장 초월
3장 의무
4장 집착
5장 충족 불가능성
맺음말
참고문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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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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