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여행자의 골목’이란 부제를 단 「간판」 「맨홀」 「철제 난간」 등의 시는 시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구체성을 넘어서는 쓰디쓴 인생의 역정을 그리고 있다. 염창권의 작품을 읽으며 필자는 시조의 형식에 어떻게 이런 폭발적인 이미지를 실을 수 있나 하는 놀라움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전편을 통해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을 즐기는 가운데 여행의 동기이기도 하고 결실이기도 한 다소 비극적인 자아 성찰의 의미가 “Who am I”―이 오래된 한마디 경구를 통해 끊임없이 되살아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방법론적인 고민이 일정한 성과를 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염창권의 시가 갖는 특징은 세련된 도시 감각과 문장의 밀도가 갖는 견고함이다. 소재와 전언 방식의 다변화를 꾀하는 현대시조의 노력은 염창권의 시에 이르러 높은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주유소 불빛 아래서」를 보자. 에드워드 호퍼의 ‘가스(Gas, 주유소)’를 연상케 하는 이 시는 추상적 사고나 사상보다 내적 정감의 감각적 표현을 중시하는 염창권의 시적 특징을 잘 드러낸다. 호퍼의 경계가 문명과 자연의 경계를 구분 짓는다면, 염창권의 경계는 삶과 죽음의 사이를 가른다. 연료통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가스를 사람의 꺼져가는 호흡처럼 묘사한 후, “은하계 너머에서 몸을 잃은 여행자는/ 시간을 앓다가 잠시 먼 곳을 바라본다,// 나, 라는 통속이 지워진, 영원이/ 또/ 다녀갔다”라는 시의 마지막은 그의 시가 현대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내적 정서를 표현하는 데 탁월함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작가 소개
염창권
1960년 보성 출생.
신춘문예에 시조(1990 동아일보), 동시(1991 소년중앙), 시(1996 서울신문) 등과 신인상에 평론(1992 겨레시조)이 각기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일상들』 『한밤의 우편취급소』가, 시조집으로 『햇살의 길』 『숨』 『호두껍질 속의 별』 『마음의 음력』이, 평론집으로 『존재의 기척』『몽유의 시학』 등이 있다.
중앙시조대상, 노산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목 차
1부
만년필 /유리창 가에서 /오후의 시차 /공중전화 /귀래에 닿다 /간판 /맨홀 /철제 난간 /밀국수 /칫솔 /송전탑 /가판대 /버스 표지판
2부
간격 /만난 적이 있는 /며칠 뒤다 /야외 침낭 /12시의 이별 /밤의 전설 /꽃 피어 지기까지 /습관성 이별 /아무것도 아닌 날, 네가 보여 /추억은 도사처럼 /언젠가는 /갚는다는 말 /강림2길에서
3부
하루 /주유소 불빛 아래서 /행적 /접힌 부분을 읽다 /그곳으로 돌아온, 그는 /부음 /감추어놓은 전생에서 이별 /감추어놓은 전생에서 너는 /감추어놓은 전생 같은 날 /냉담이 물끄러미 서 있었다 /지연된 일상들 /액자 속의 냉담을 보았다 /소와 함께 걷다
4부
그믐 /증심사 가는 길 /약국 /손 없는 날 /숨겨둔 날을 인정하는 방식 /여름 강물에 몸 부시듯이 /정방폭포에서 소년이 본 것은 /오동꽃 필 때 /저녁의 안쪽 /겪은 일을 생각하다 /그 꽃들을 보다 /구름 아래를 걷다 /객석
5부
바닥 /이 거리의 쓸쓸함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어제라는 그녀의 얼굴을 지웠다 /길거리에서의 용서 /세면대 /그의 시선들 /날계란을 깨뜨린 적이 있다 /복제a /복제b /밤 9시 /조서 /너는 백야라는 알약을 삼킨 것처럼 /까마귀의 숲
6부
섬 /마른 갈대에 내리는 비 /그을린 불빛 /뒷개에 내리는 비 /한 줌 /꽁초 /빈 접시 /키치에게 당하다 /선지자가 숨어든 사원의 벽에는 /구멍에서 구몽으로 /침전하는 방 /고립된 사랑 /빈집 /해설_황치복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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