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칸딘스키의 그림처럼 추상의 세계를 꿈의 형식으로 드러낸 임헤라의 시들
2015년 『시와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임헤라 시인이 두 번째 시집 『화요일 자정에 걸을 수 있는 여자는 모두 나오세요』를 현대시세계 시인선 146으로 출간하였다.
임헤라 시인의 시집 『화요일 자정에 걸을 수 있는 여자는 모두 나오세요』는 불우한 꿈의 형식을 담고 있는 탓에 현실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세계가 명쾌하게 설명되어지지 않는다는 시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나와 나의 관계, 나와 당신의 관계는 자명한 합리적 이해 너머에 있기 때문에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으로 실재할 뿐이다. 그러니 임헤라의 시는 전통 서정시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그가 자신의 시에서 호명한 칸딘스키의 작품처럼 추상의 세계가 꿈의 형식으로 드러난 것이 이 시집이라 할 수 있다.
꿈은 의식의 억압과 그 억압에 응전하는 시적 화자의 처절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새벽 한 시의 계단」은 현실이나 혹은 구체적 경험이라기보다는 의식의 치열한 내면을 보여준다.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하이에나처럼 나를 물어뜯고 있었다”는 시적 진술은 시적 화자의 실존적 위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소통의 도구로 전화벨은 여전히 울리지만 시적 화자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 “킬리만자로로 가는 열차”는 치열한 의식의 객관적 상관물이라 할 수 있다. 설산으로 가는 열차는 세계의 끝을 상징하게 된다.
임헤라의 시에 나타난 꿈은 감각밖에 될 수 없는 상태를 보여준다. 그의 다른 시에 “해독할 수 없는 눈보라가 흩날립니다”(「검은 레깅스」 부분)라는 시 구절이나 “해독할 수 없는 먼 꿈의 속살”(「어쩌면 다 안개여서」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해독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시가 비롯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 「꽃들이 얼룩말처럼」 구조된 세계를 부정하고 꿈의 세계를 탐닉하는 시적 화자에게 언어는 거짓된 가상의 세계를 권력화하는 수단으로 비추어진다. “말과 말 사이에서 꽃들이 흔들린다”는 것은 기표와 기의 관계 너머의 사물의 진실에 시적 화자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이다. 기표되지 않는 혹은 기의 되지 않는 기호 사이의 진실이 꽃들이며 그 꽃들은 흔들린다. 흔들린다는 것은 기호의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표와 기의의 세계로 일반화되지 못한 사물들의 속성이 꽃으로 형상화되고 있으며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인식은 의미화된 가시적 세계 너머에 시적 화자의 욕망이 그 끈을 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극단적 불신은 “포세이돈의 팔, 꽃은 거기서 왔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물의 신으로부터 꽃이 왔다는 것은 구체적인 의미와는 상관없는 상상력의 소산이다. 기호의 인과적 껍질을 벗겨내는 역할을 할 뿐이다. 마지막 연도 같은 역할을 한다. 얼룩말처럼 달려오는 꽃이라는 형상화는 꽃이라는 일반적 기호 체계를 거부하며 전혀 생각하지 못한 꽃의 이미지를 생성하게 된다. 꽃이라고 하는 세계의 본질을 찾아가는 길이 임헤라에게는 시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시집 제목이 들어 있는 표제시 「밤은 꼭 있어야 해요」는 그림자를 두고 상자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의 행위에서 일반적 관계 맺기가 아니라 불륜의 형식으로 사물과의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밤이 꼭 있어야 한다”는 주문을 외우며 정해놓은 한낮의 규칙을 무너트리며 사물과 접속하는 여자의 모습 속에 시적 화자가 투영되어 있다. 밤의 상징은 이 세계가 명백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뜻하며 어둠을 통하여 사물과의 불륜을 꿈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치열하게 세계와 싸우는 자아가 쓸쓸하게 웃으며 나는 괜찮다고 고백하는 시가 바로 「밤은 꼭 있어야 해요」이다.
작가 소개
임헤라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2015년 『시와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초경의 바다』가 있다.
목 차
1부 발을 넣으면 금세 쏟아져버리는 구름
나는 구두가 없어요 · 13
장수하늘소 · 14
연꽃의 탄생 · 15
물뱀 이야기 · 16
검은 레깅스 · 18
새벽 한 시의 계단 · 20
목련의 눈 · 21
장미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 22
오래된 고백 · 23
꽃들이 얼룩말처럼 · 24
아홉시에 만나요 · 25
창공의 이름으로 · 26
2부 여전해요 이틀 밤 잠을 못 잤어요
나는 계단에 앉아 있고 목소리를 잃었어요 · 31
강가 무덤 · 32
백지의 꿈 · 33
어쩌면 다 안개여서 · 34
트렁크 · 36
절벽과 새 · 37
밤은 꼭 있어야 해요 · 38
손맛 · 40
붉은 높은음자리 · 41
폐문(廢門) · 42
밀실 · 43
우리의 일요일 · 44
3부 뒤뚱거리는 나의 늙은 피터팬
보아뱀을 생각해야 할 때 · 49
피터팬 · 50
당신의 내전 · 52
바람의 숲 · 53
그늘의 손금 · 54
반지 · 56
에드바르트 뭉크의 들판 · 57
예순 · 58
플랫폼 · 59
콤포지션 2 · 60
함정 · 62
노크 소리는 방에 들어와 죽는다 · 64
4부 허수아비는 자주 나를 안겠다는 듯
토르소 · 69
나의 파일럿 · 70
파킨슨병 · 72
지하와 철의 방 · 73
빙하기 · 74
자정과 박쥐와 환영 · 75
이상한 역에서 타거나 내린 · 76
마법에 걸린 눈사람을 위하여 · 78
산다는 것은 · 80
거울 속 허수아비 · 82
플라톤 아파트 · 83
굴뚝새 · 84
해설 들린 자의 불우(不遇) 또는 불후(不朽)의 노래 / 우대식 · 86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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