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일등칸을 탄 식민지 여성, 나혜석. 삼등칸을 탄 제국 여성, 하야시 후미코.
이 여행기는 여행이란 남성만이 누리던 시절, 민족과 계급이 다른 두 ‘여성’의 기록이다. ‘여성’은 한일 근대기에 형성된 하나의 계급이었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태어난 새로운 여성이란 누구인가. 화가와 작가라는 자신만의 세계와 일을 가진 여성이다. 여행이 가능한 여성이다.
식민지 한국과 피식민지 일본의 근대 시기를 대표하는 여성 나혜석(1896~1948)과 하야시 후미코(1903~1951)는 같은 시대에 태어나 4년이라는 차이를 두고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횡단하여 유럽을 다녀왔다. 그리고 각자 「구미여행기」와 「삼등여행기」를 남겼다. 그러나 둘의 여행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당시 식민지 여성 나혜석은 일등칸으로 다닌 반면 제국 여성 후미코는 가장 저렴한 삼등칸으로 여행을 다닌다. 때문에 만나는 사람도 보이는 풍경도 모두 다르다. 근대와 함께 탄생한 새로운 계급, 여성. 식민지와 피식민지라는 배경 안에서 펼쳐진 두 여성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30년 전후 제국주의의 절정기, 동양 여성이 세계를 여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여자는 작다. 그러나 크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강하다.
- 나혜석
나는 사람에게 지치고 세정에 질리면
여행을 떠올립니다.
- 하야시 후미코
같은 길 다른 여행, 일등칸과 삼등칸
나혜석의 구미여행은 만주 단둥 부영사를 지낸 남편 김우영에게 주어진 포상이었다. 김우영의 단둥 부영사 임기가 끝나자 일본 외무성은 벽지 근무를 마친 그에게 위로 출장 명목으로 구미 시찰 여행을 보내준다. 여행하는 동안 부부가 쓴 경비는 당시 일반 봉급자가 꼬박 30년을 모아야 하는 금액이었다. 일등칸으로만 여행한 나혜석 부부가 만난 사람들은 물론 일등칸 여행객이다. 브라질에 가는 귀족 의원, 제네바군축회의에 참석차 가는 중의원 직원, 독일 시찰을 떠나는 공학자 등이 동행자다. 일등칸을 탄 나혜석이 그리는 열차 안 풍경은 국적이나 남녀의 위계와 상관없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다. 하지만 여행이 평화롭지만은 않다. 미국에서는 친일파를 응징한다는 습격에 남편 김우영이 칼에 찔리고, 파리에서는 최린과 나혜석의 스캔들로 귀국 후 이혼, 나혜석은 그 후 행려병자로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후미코는 가난을 팔아먹는 소설이라는 혹평도 있던 자전소설 『방랑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받은 인세로 나 홀로 여행을 결심한다. 돌아올 여비는 없다. 그녀가 탄 삼등칸은 사과 하나 달걀 한 개의 값이 비싸서 선뜻 집을 수 없고, 거저 얻은 것이라곤 뜨거운 물뿐이다. 사사건건 물건을 달라고 졸라대는 아기 엄마, 끼니때마다 빵을 얻으러 오는 소년, 화장실에 숨은 듯 서 있는 조선인 청년, 서슴지 않고 추행하는 남자, 발 한쪽이 없는 남자, 불경기에 옆 나라에서 일하러 오는 건 참을 수 없다며 욕하는 독일인 노동자 등 삼등 열차의 프롤레타리아는 모두 굶주림에 허덕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삼등 열차는 한 가족 같다는 후미코. 기차에서 내린 뒤 일류 요릿집에서 대접받을 땐 삼등칸에 남은 가난한 이들이 생각나서 눈을 감고 싶을 만큼 죄스럽다고 고백한다.
같은 곳 다른 풍경, 나혜석의 파리와 후미코의 파리
화가 나혜석과 작가 하야시 후미코에게 파리는 창작하는 예술인이라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나혜석도 후미코도 여행 기간 중 파리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다. 나혜석의 파리는 공원, 교통기관, 오락 시설을 기록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많은 감상은 역시 미술관이다. 여행 중 나혜석은 이 행복스러운 운명에 감사를 아니 드릴 수 없으며 삶에 허덕이는 고국 동포가 불쌍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 후미코의 파리는 심한 여독으로 인해 도착 후 일주일 동안 잠만 잔 곳이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파리 시내 곳곳을 무작정 거닐고, 거리에서 만난 노숙 여성이 집에까지 따라와 함께 생활하고, 쪼들리는 생활비에 전당포를 드나들기도 한다. 가난의 대명사로 불리는 후미코는 일본에 남아 있는 남편에게 프롤레타리아 방언으로 쓴 소설책을 보내기도 한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냉엄한 현실 고민은 여행기 곳곳에서 드러난다.
여행하는 여성의 탄생, 나혜석과 후미코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모두 비슷한 삶을 살까? 아니다. 제국에서 태어난 사람과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이 반드시 제국인에 어울리는 삶, 식민지인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않는다. 특히 나혜석의 경우 당시 식민지 조선의 부르주아 신여성이라는 점을 볼 때 그의 여행기는 보다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다. 나혜석만의 특별한 정체성을 배제하고 그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식민지 조선의 여성이 아니다. 우리 근대사의 문제적 인물이었던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나혜석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언제든지 좋은 구경 많이 한 사람과 다니는 것보다 도무지 구경 못 한 사람과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사람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퍽 유쾌하다.” 나혜석이 「구미여행기」를 쓴 목적 역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조선팔도의 모든 여성을 데리고 여행할 수는 없지만, 책으로 남긴다면 읽은 이들이 좋아하고 기뻐하고 떠날 꿈을 꿀지도 모르니까.
작가 소개
지은이 : 나혜석
1896년 4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1913년 도쿄 사립 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해 1918년에 졸업한 후 잠시 미술교사로 활동했으며, 1919년 3월 만세 운동을 한 혐의로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했으며, 25세 때인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첫 유화 개인전을 가졌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가 연 첫 여성 개인 전람회였다. 같은 해에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홍일점으로 유화를 출품했으며,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해마다 작품을 출품해 수상과 특선을 거듭했다.
그는 작가이자 여성의 주체적 권리와 인권을 펼친 운동가이기도 했다. 1914년 〈이상적 부인〉을, 1918년에는 조혼 문제를 다룬 단편소설 〈경희〉를 썼으며, 1923년 〈모(母) 된 감상기〉와 1934년에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며 파문을 불러왔다. 특히 〈이혼 고백서〉에서 그는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한편, 경직된 사회와 이로 인한 여성 문제를 비판했다. 이후 다양한 글을 쓰고 발표했으나 이혼녀라는 이유로 몸과 마음이 병들었다.
이후 수덕사 등을 떠돌다가 1944년 8월 한 양로원에 맡겨진 뒤 1949년 3월 14일에 관보에 무연고자 시신 공고로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 1948년 11월에 시립 자제원 병동에 무연고자로 입원해 있던 중 12월 10일 눈을 감은 것이다. 시대의 벽을 허물지 못한 채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되었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지은이 : 하야시 후미코
1903~1951.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난한 부모를 따라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닌다. 여학교 졸업 후 도쿄에 올라와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를 꿈꾸며 고단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침내 1930년 자신의 가난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방랑기』를 출판해 일약 인기 작가가 된다. 대공황의 와중에도 60만 부나 팔린 『방랑기』를 비롯한 그녀의 작품은 당시 도시 생활자의 밑바닥 삶, 특히 여성의 자립과 가족, 사회 문제를 생생하게 그려내 대중에게 사랑받는 한편 다수의 작품이 영화, 연극, 드라마로 만들어진다. 1948년 제3회 여류문학자상을 수상하며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는다.
옮긴이 : 안은미
출판 편집자로 일하면서 매혹된 책을 직접 독자에게 전하고픈 마음에 두 언어 사이를 왕복하는 번역가의 길에 들어섰다. 낯선 일본 근대문학을 알아가는 마중물이 되길 바라며 ‘작가 시리즈’를 엮었고, 『아무도 없는 곳을 찾고 있어』, 『술집 학교』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목 차
책을 엮으며–편집부
구미여행기
서문을 대신해
소비에트 러시아행
CCCP
베를린과 파리
꽃의 파리행
베를린에서 런던까지
서양 예술과 나체미
정열의 스페인행
파리에서 뉴욕으로
태평양 건너 고국으로
여행이 끝난 후
나혜석 연보
잇는 글–이다혜 작가
삼등여행기
시베리아 횡단열차
파리까지 맑은 하늘
게다 신고 걸은 파리
거리 천사, 매춘부와 순경
파리 부엌, 도쿄 부엌
낮 목욕탕, 밤 카바레
나 홀로 런던 여행기
퐁텐블로 숲을 거닐다
아듀 마르세유, 아듀 프랑스
여덟 달 동안 구두 네 켤레
후기를 대신해
하야시 후미코 연보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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