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여름 가고 여름 오는 열대의 나라에서
다음 생을 향해 보낸 그리움의 편지
채인숙 첫 시집 『여름 가고 여름』이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상에 「1945, 그리운 바타비아」 외 5편의 시가 당선되며 시작 활동을 시작한 채인숙은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교포다. 30여 년간 이국의 땅에서 고립된 그의 마음을 달래 준 것은 시에 대한 추억과 시를 향한 열망이었다. 살아가는 땅은 달라졌지만 ‘시’라는 땅에서는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으니, 그의 첫 시집은 그의 온 생애와 함께한 시에 대한 고백이자 “8000일을 한 계절 속에서” 살고 있는 열대의 시간 속에 남겨진 “병의 흔적”이기도 하다.
시집에는 이국에서 길어 올린 서사와 감각이 짙게 배어 있다. 아잔 소리가 없어도 시간을 맞춰 기도를 마친 소년, 화산재를 밟으며 사라진 사원을 오르는 맨발의 여자들, 부기스의 마지막 해적이 되어 마카사르 항구를 떠난 열아홉 청년, 씨앗 무늬 사롱을 걸친 맨발의 남자, 자와어를 쓰는 이웃집 할머니……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활화산과 세상에서 가장 많은 항구를 가진 나라에서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실패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며 경건하고 소박한 삶이 시가 되는 순간들을 발견한다.
먼 나라에 살며 다음 생에는 고향을 떠나지도, 사투리를 고치지도 않겠다고 다짐하는 시인은 “거짓말처럼 사라지지 않”는 여름을, 한 번도 표정을 바꾼 적 없는 여름을 “첩첩산중의 마음”으로 건넌다. 세월 속에서 천천히 나이 들며 사랑을 지속하자 적도의 햇빛도 조금씩 다른 깊이의 색을 보여 준다. 여름이 간 자리에 또다시 여름이 오는 무한한 반복 속에서 “분주한 고독”이 깨어나고 “심해의 어둠”이 불을 밝힐 때, 낯선 곳에 불시착한 우리의 가슴에도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단어의 빛이 쏟아진다.
■ 다음 생으로 보내는 전생의 노래
채인숙 시의 주된 공간은 그가 거주하는 인도네시아다. 데뷔작 「1945, 그리운 바타비아」 역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배경으로 쓴 시다. 이국적인 풍경 안에서 식민지라는 공적 기억과 사랑이라는 사적 기억이 섞이며 만들어 내는 독창적인 정조가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모습으로 재현된다. 구체적인 사건으로서는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과 다르지만 그 서사의 보편성은 “바타비아의 밤”을 특정한 시공간에서 벗어나게 한다. 채인숙 시의 주된 공간이 갖는 특수성은 공통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보편성을 획득한다. 소리를 죽여 혼자 우는 자바의 물소나 깜보자 꽃송이, 자바의 검은 돌계단 같은 이방인들의 단어도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된다. 과거와 미래로 확장되는 노래는 낯설지만 편안하다.
■ 잃어버린 재의 서사
열대에 부는 찬 바람은 따뜻한 느낌일까 차가운 느낌일까. 언젠가 이국에서 맞았던 훈풍은 그때 그 감각을 잊을 수 없는 유일한 바람이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던 그 바람은 바람 그 자체였다. 그저 움직임만이 느껴졌다는 점에서 순수한 바람이기도 했다. 시집을 펼치면 독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시 「디엥고원」은 “열대에 찬 바람이 분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순식간에 우리를 한 계절이 되풀이되는 열대의 섬나라로 이동시킨다. 뜨거워졌다 차가워지기를 반복하는 내면을 품은 사람들은 바깥을 에워싼 지독한 ‘한결같음’을 어떻게 견딜까. 그때 시인의 눈에 들어오는 건 “가장 단순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땅의 뜨거움과/ 하늘의 차가움을 견디”기 위해 화산재를 밟으며 사라진 사원을 오르는 여자들. 더 바라지 않는 경지만이 다다를 수 있는 초월의 상태 속에서 인내와 정화의 상징이자 지금은 잃어버린 재의 서사가 무심코 일어선다. 그들의 이야기는 순수한 바람 같고 또 지독하게 한결같다.
■ 그리움의 동사
시집에는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는 왕복운동에 관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밤이 오고 밤이 갔다”거나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갔다”는 식, 또는 “파도가 가고 파도가 온다”와 같은 왕복운동에는 떠나는 행위와 돌아오는 행위의 반복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움은 이토록 오고 가는 동사의 모습을 취한다. 시는 병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그리움을 달래는 치유의 기록이기도 하다. 속절없이 여름이 반복되는 계절과 무관하게 내면은 덜컹거리며 오고갈 때 “습기의 무기”가 무거워지면 마음엔 스콜처럼 시가 쏟아졌다. 시집의 후반부는 시로 안부를 전하고 시로 안부를 물었던 시간들에 대한 회상으로 가득하다. 이상한 식물과 수상한 동물들의 나라에서 출발한 시원적 그리움이 열대에 부는 찬바람에 섞여 우리에게 날아든다. 어떻게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마다 습작한 시의 형체로, 그칠 수 없는 존재의 형식으로.
작가 소개
채인숙
1971년 경남 통영군 사량도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성장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상에 「1945, 그리운 바타비아」 외 5편의 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목 차
자서(自序)
Ⅰ
디엥 고원 13
인디언 오션 15
그리운 바타비아 16
여름 가고 여름 18
밤의 항구 20
네덜란드 인 묘지 22
밤의 그림자 극장 24
유파스나무 숲의 은둔자 26
무인도 시퀀스 28
나무어미 30
해변의 모스크 32
아홉 개의 힌두사원으로 가는 숲 34
미낭까바우, 여자 36
언덕 위의 승방 38
Ⅱ
다음 생의 운세 43
옛집의 언정 45
격자무늬 창문 48
이사 50
독작 52
냉장고가 없는 야채 가게 54
레이디 D 56
천 개의 문 58
우기의 독서 60
부조 61
그린란드 상어 62
시니 64
금요일 66
Ⅲ
내가 당신의 애인이었을 때 71
눈물 73
제이 74
까마귀가 나는 밀밭 76
굳바이, 시인 78
비인 80
노산여인숙 82
저수지 소네트 84
사루비아 화단 86
장마 88
북아현 89
골목 90
Ⅳ
1989 93
습작 일기 94
사시 96
우주 허밍 98
여름 병동 100
삼천포 102
동대구행 103
마지막 장마 104
배드민턴 치는 저녁 106
죽은 시인을 위한 낭독회 108
사량 110
메리제인 구두 112
출국 113
작품 해설 -소유정 (문학평론가)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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