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정책은 권한이 아닌 책임이다!”
최악의 경제 위기를 이겨낸 ‘인플레이션 파이터’의 기록
유능한 정부와 효율적인 정책을 위한 헌신적인 도전
“끝났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긴축을 계속할 것입니다we will keep at it.”_제롬 파월 현 연준 의장, 2022년 6월 잭슨홀 연설
현 연준 의장 제롬 파월이 여러 차례 제목을 인용한, 역대 최고의 연준 의장 폴 볼커의 회고록 Keeping At It이 드디어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금융 및 경제정책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소식 밝은 이들은 이미 원서를 구해 읽기도 했다는 필독서 중의 필독서다. ‘권총을 품고 다니면서까지 고물가 정책을 펼친 의장’ ‘인플레이션 파이터’ ‘볼커 룰의 입안자’ 등 그 쟁쟁한 이력과 인상적인 별명을 아는 이도 많을 것이다. 파월의 언급이 보여주듯, 볼커는 지금도 경제정책 분야에서 아주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타계할 때까지도 종종 ‘의장님Mr. Chairman’으로 불리곤 했다.
연준 의장으로서 198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을 제어해낸 것이 볼커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다. 그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연준 의장 외에도 재무부 차관,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직을 역임하는 등 30년 가까이 미국 정부에서 직접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한 굴지의 경제 관료다. 고정환율제가 종료된 국제금융의 역사적 순간에도 그가 있었으며, 퍼스트펜실베이니아, 콘티넨털일리노이 등 여러 대형 은행이 파산할 때마다 성공적으로 대처하여 거대 금융 위기를 막아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볼커는 지난 세기 중후반 세계 경제가 요동치던 현장 속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상세하게 서술한다. 그는 공직자들의 권한보다 책임을 중시하며, 물가안정이라는 경제기관의 중차대한 임무를 강조하고, 어떻게 하면 국민의 삶을 이롭게 할 ‘유능한 정부’가 가능할지 묻는다. 근시안적인 욕망 때문에 파멸로 치닫지 않도록 ‘건전한 금융’을 바로 세우는 것 또한 그의 오랜 관심사였다. 이 책을 읽은 독자는 볼커가 국제금융에 남긴 영향력을 새로이 알게 되는 것 외에도, 경제정책이 실제로 어떻게 기획되고 실행되며 정치와 상호작용하는지, 효율적인 정책 결정을 위해서는 어떤 조건과 태도가 필요한지를 1인칭 시점으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인플레이션과의 전쟁
1970년대 후반, 잇따른 석유파동과 달러화 약세로 인한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이 미국을 휩쓸었다. 폴 볼커가 연준 의장에 취임한 것이 바로 이 시점, 1979년이었다. 그는 임명 직전 카터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연준의 독립성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준은 인플레이션과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밀러 의장이 유지해온 통화정책 기조보다 더 긴축적인 기조를 지지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연준 의장이 될 가능성을 날려버렸다’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했지만, 이튿날 아침 대통령으로부터 의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바야흐로 볼커와 인플레이션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취임 열흘 뒤 곧바로 재할인율을 10.5퍼센트로 인상했다. 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물가상승률은 연간 15퍼센트 이상이었고, 긴축을 미룰 여유가 없었다. 금리 조정으로는 부족했던 나머지 그는 통화공급 또한 억제하기 시작했고, 시중 금리가 21.5퍼센트라는 최고 수준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미국 금융 역사에서 금리가 그렇게 높았던 적은 없었다. 불만을 가진 농부들이 워싱턴으로 몰려와 연준 빌딩을 트랙터로 에워싸기도 했고, 무장한 남성이 연준 건물에 난입해 이사들을 인질로 삼으려 한 일까지 생겼다. 연준은 볼커에게 경호를 붙이려 했다. 그는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온갖 위협과 경기침체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계속해나갔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1982년 여름, 인플레이션율은 뚜렷한 하락세를 보이면서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이후 미국의 경기는 회복되어 1990년대 이르러서는 찬란한 호황기가 찾아온다. 볼커의 승리였다.
그의 투쟁은 연준에 규칙 하나를 만들어냈다. 중앙은행의 신뢰성은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 힘들다. 강경한 전략을 철회하면 신뢰성을 잃어버리고, 이는 더 큰 부정적 결과를 부른다. 볼커는 당시의 상황을 ‘돛대에 묶여’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비유한다. 금리를 어디까지 올려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그것만이 방법이었고 그는 그 방법을 끝까지 고수해낸 것이다.
국가는 파산하지 않는다?
그는 1970년대 말에 이미 금융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규제의 허점을 노린 금융상품이 늘어났고 근시안적인 이익 추구가 모두를 위험에 빠트렸다. 대표적인 사례는 크라이슬러 구제금융 사건과 ‘헌트 형제’가 초래한 ‘은의 목요일’ 사태, 그리고 콘티넨털일리노이 은행의 위기였다. 특히 헌트 형제 사건은 무분별한 투기 관행이 불러온 참사였으며, 콘티넨털일리노이 위기는 무리한 대출 채권 사업이 여러 금융기관을 거꾸러트릴 뻔한 사건이었다.
1980년대 초 멕시코에서 시작된 라틴아메리카의 대규모 금융위기도 볼커를 시험대에 올렸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상환능력 이상으로 자금을 차입하다가 결국 한계를 넘어버린 것이다. 국제적 협력을 통해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아낸 볼커는 당시의 사건이 오랫동안 방만하게 지속되어온 경제정책과 은행의 무모한 대출 관행이 합쳐진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국가는 파산하지 않는다”며 호언장담했던 월터 리스턴의 시티뱅크가 이 사태에서 가장 큰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은 그저 아이러니이기 이전에, 볼커가 우려한 금융시스템 불건전성의 명백한 예시일 것이다.
의장직을 내려놓은 후 UN과 세계은행 등을 거치며 공적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음으로써,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침체가 도래한 금융시스템을 복구하는 데 전력했다. 자문위원회는 도드-프랭크법을 제정하여 대형 금융기업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고, 볼커의 이름을 딴 ‘볼커 룰’이 그 규제에 포함되었다. 상업은행의 투기적 활동을 금지하는 조치였다. 하지만 그는 “트레이더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 경계선을 시험하게 되리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예언했다. 15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여러 은행이 파산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쩔 도리 없이 볼커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정책은 권한이 아닌 책임이다
볼커는 정책의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실행이 방해받는 사례를 수도 없이 겪었다. 의장으로 지낼 때는 레이건 대통령이 비공식적인 자리를 만들어 ‘선거를 위해 금리를 더 이상 올리지 말라’고 압박했고, 그 전에 카터 대통령은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도우려는 의욕이 앞섰던 나머지 신용통제조치를 발동하여 연준의 정책 계획을 어그러뜨렸다. 그러니 볼커가 연준이 정치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책은 실패할 수 있지만, 실패가 지속되도록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정을 효율화하고 유능한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직자들의 책임감이 필요하다. 인상적이게도, 볼커는 ‘권한’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도 될 것 같은 자리에 ‘책임’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쓴다. 공직자로서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후생을 증진시키는 ‘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과 싸우고 금융위기를 막아낸 볼커의 공적을 읽는 것 외에도, 이런 공공정책에 대한 그의 우려와 고민을 따라가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의미다. 어느새 ‘좋은 정부’라는 말이 농담이 되어버린 오늘날, 수십 년간 공직에 헌신한 그가 전해주는 공공정책에 대한 통찰은 한 권의 회고록을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한 제언으로 격상시킨다. 사회의 분열과 불안, 정책의 비효율성이 우리 삶을 괴롭히는 지금이야말로 어느 때보다 볼커의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할 시점일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폴 볼커
1927년 미국 뉴저지 주 케이프 메이에서 독일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다양한 학생모임에서 활동했고, 정치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또래들과 선생님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책에 특화한 프린스턴대학교 우드로 윌슨 스쿨(Woodrow Wilson School)을 최우등으로 마쳤다. 그는 졸업논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데 실패한 점을 비판했다.
뉴욕 연준에서 리서치 보조로 일하다가 하버드대학원에 진학해 정치경제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런던정경대에서 수학했다. 1952년 뉴욕 연준에서 풀타임 이코노미스트로 재직하다 1957년에 체이스맨해튼은행으로 자리를 옮겨 금융 담당 이코노미스트로 일했다. 이후 1962년에 자신의 멘토인 로버트 루사에 의해 재무부 금융분석국장으로 등용되었고, 1963년 미국 재무부 통화 담당 차관보에 임명되었다. 1965년에 다시 체이스맨해튼은행 부행장 겸 기획 담당 임원으로 있다가 1969년에 닉슨 행정부의 부름을 받고 1974년까지 재무부 국제통화 담당 차관을 역임했다. 1971년 8월 15일 금태환 정지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볼커는, 이 일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다고 회고했다.
1975년 뉴욕 연준 총재를 거쳐 1979년 8월 카터 대통령의 지명으로 미국 연준 의장에 취임했다. 볼커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나타났던 대대적인 인플레이션을 공격적인 통화긴축정책으로 퇴치하면서 ‘인플레이션 파이터’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1980년 3월 14.8%까지 올라갔던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1983년에는 3% 밑으로 떨어졌다. 볼커 의장의 연준은 1979년 평균 11.2%이던 연방기금금리를 1981년 6월 20%까지 인상했다. 1981년 프라임 레이트(prime rate)가 21.5%까지 상승하는 과정에서 경기침체에 빠졌고(1980~1982년), 실업률이 10% 위로 올라갔다. 당시 연준에 항의하는 전례 없는 강력한 시위가 발발했다.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와 연준 본관 에클스빌딩을 봉쇄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볼커는 언제까지 인플레이션과 싸울 것이냐는 세간의 항의에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잡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볼커의 뚝심은 성과로 나타났다. 인플레이션이 떨어지면서 미국 경제성장의 여건을 조성한 것이다. 이후 1982년부터 통화긴축을 풀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경제성장세를 재개했다. 볼커는 1983년 레이건 행정부에서 연준 의장에 연임되었다.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악화하는 미국의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에 대응하면서, 독일과 일본 등이 달러에 대해 자국 통화를 절상하도록 유도했다.
1987년 8월 연준 의장에서 퇴임한 뒤에도 볼커는 정부와 중앙은행의 멘토로 활약했다. 후임자 그린스펀 연준 의장은 볼커처럼 인플레이션을 낮게 유지하는데 정책의 초점을 맞췄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여든이 넘은 볼커에게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의장직(2009년 2월-2011년 1월)을 맡겼다. 볼커는 은행들의 자기매매와 프라이빗 에쿼티 및 헤지펀드와의 거래를 제한하는 내용의 강력한 금융규제를 발표했다. 이러한 볼커의 정책은 ‘볼커룰(Volcker Rule)’이라 불리며, 금융과잉을 막는 예방장치 역할을 해왔다.
“연준이 금리인하를 더 하지 않아 미국 경제가 망가지고 있다면서 미국의 적은 중국이 아니라 연준”이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인 불평에, “중앙은행은 정치적 권력에 휘둘리지 말고 공정성을 지켜내야 한다”며 맞섰던 볼커는, 2019년 12월 8일 92세로 영면했다.
지은이 : 크리스틴 하퍼
『블룸버그마켓』 편집장. 20년 이상 금융 분야 기자 및 편집자로 활동했다. 『블룸버그뉴스』의 글로벌 금융 기업 부문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옮긴이 : 남민호
2001년 한국은행에 입행했으며, 이후 금융시장국, 조사국, 통화정책국 등을 거쳐 현재 국제국 국제금융연구팀장으로 재직 중이다. 2013년에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학에서 Essays on Housing and Monetary Policy라는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목 차
추천사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며: 어느 지혜로운 늙은 앵무새
1장 공직자의 아들
2장 프린스턴, 하버드, 런던
3장 젊은 이코노미스트
4장 워싱턴으로
5장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자리
6장 통화개혁, 좌절되다
7장 다시 출발점으로
8장 인플레이션과의 전쟁
9장 국내 그리고 국제 금융위기들
10장 미완의 임무: 금융시스템의 복구
11장 연준 이후
12장 수많은 의장직
13장 진실함을 좇다
14장 회계기준 제정
15장 새로운 금융의 세계: 붕괴와 개혁
16장 세 가지 진정한 가치
나가며: 칭송받아 마땅한 사람들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일대기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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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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