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해설을 쓴 시인이지 문학평론가인 오민석 단국대 교수는 이번 시집을 이렇게 평한다.
“엄의현 시인에게 시는 일상의 기록이다. 그에게 삶은 물 같다. 그에게 삶은 흐르고, 새롭고, 변화하며, 움직이는 어떤 것이다. 그는 유동하는 삶의 윤슬들에 마치 플라이 낚시하듯 시의 찌를 던진다. 그의 낚싯대에 걸려 올라오는 것은 개인사나 가정사만이 아니다. 그에게 삶이란 개인적인 층위와 사회적인 층위가 만나는 두물머리이다. 그의 시에서 개인과 사회는 별도의 공간이 아니라 삶이라는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씨실과 날실이다. 그의 시는 총체성의 재현을 향해 있고, 이런 점에서 그는 리얼리스트이다. 그의 시는 화려한 수사를 거부한다. 그의 시는 마치 무색, 무취의 물 같다. 노자의 말대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그의 정동affect은 물처럼 낮고 고요하며 맑다. 그는 겸허하고 담백하게 현실을 언어화한다. 그의 시선은 낮은 곳을 향해 있고, 그의 언어는 낮은 곳을 그리며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다.”
검각산劍角山 칼날 중앙 부근에 있는 새터마을 생가生家 번지이고 등록기준지로는 남면 살개골길 14의 12이다
할아버지가 열네 살에 당신의 아버지를 잃고 가장이 되고 열여덟 살에 혼인하신 후 직접 지은 집이다
초입부터 일자로 된 건물에는 돼지우리와 소 외양간과 재래식 뒷간과 갈비와 땔감을 보관하던 작은 공간과 탈곡하던 큰 마당 옆에는 담배 건조실이 있었다
다섯 계단 위 대문 옆에는 사랑채가 붙어 있고 대문을 지나 들어서면 작은 마당과 행랑채가 있었다
행랑채에는 작은방과 먹거리를 보관하는 광이 있고 작은 마당에는 지하수를 퍼 올리는 수동식 펌프가 있었다
안채는 니은 자로 봉당封堂 위에 대청마루와 안방이 있고 소죽을 끓이던 대형 무쇠솥이 걸렸던 건너방 서쪽의 툇마루에는 큰 한약장이 놓여 있었다
대청마루에는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도 있었다
행랑채에서 태어나 십 년을 자라고 은행나무 아래 하송리로 옮겨와 반세기도 훌쩍 넘었다
- 「연당리 672」 부분
“태어나 자란 곳에 대한 이 세밀한 기록엔, 보다시피 낭만적 허위나 과장이 전혀 없다. 화자는 육십 세를 ‘훌쩍’ 넘겼지만, 고향을 회상하는 노인들이 통상 그러하듯 추억을 뻥튀기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고고학자나 역사학자처럼 생가의 모습을 마치 사진을 찍듯이 정확하게 재현한다. 이 세부 묘사의 진실성은 먼 과거의 공간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삶의 객관적 모습을 호출해낸다. 그리하여 ‘연당리 672’엔 ‘열네 살에 당신의 아버지를 잃고 가장이 되고 열여덟 살에 혼인하신 후 직접’ 이 집을 지은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여 그곳에서 ‘태어나 십 년을 자라고 은행나무 아래 하송리로 옮겨와 반세기도 훌쩍’ 넘긴 화자의 역사가 기록된다. 독자들은 마치 선명한 흑백 화면을 보듯 순식간에 3대에 걸친 가계의 역사를 훑게 된다. 그것은 마치 먼 발원지에서 현재로 흘러온 시간의 물줄기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엄의현 시인의 시선은 매우 포괄적이며 총체적이다. 이런 시선은 그만의 독특한 리얼리즘적 세계관을 이룬다. 모더니스트들에게 개인의 삶이 탈사회적이고 탈정치적인 것이라면 즉, 늘 고립되고 파편화된 실존의 모습이라면, 리얼리스트들에게 개인의 삶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역사적이다. 리얼리스트들에게 모든 개인은 사회적 개인이고, 역사적 개인이며, 정치적 개인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언은 리얼리즘의 유구한 인간관이다. 역사는 오로지 개인들의 삶 속에서 실존하며, 개인은 오로지 역사적인 삶 속에서 실존한다. 리얼리스트들에게 개인은 역사가 머무는 자리이다. 그들에게 개인은 역사와 분리 불가능하다. 역사는 수많은 개인들을 통하여 움직인다. 실물의 개인들 없이 역사는 가동될 수 없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밥그릇 무겁다”라는 문장은 시집 속의 시 「밥그릇의 무게」에서 따온 문장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문장에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하고 싶었던 말을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보기에 민초들의 삶이란 것이, 밥그릇 하나를 얻기 위해 죽기 살기로 살아낸/살아내고 있는 삶들인 것이다. 밥그릇 하나에 어쩌면 고달픈 생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내야 하지는지, 시인은 남들이 그냥 지나칠 법한 시시콜콜한 일상의 소품까지 찾아내어 한 땀 한 땀 시로 기록을 남기고 있는 중이다. 시집을 읽다 보면 사라져서는 안 되는데 사라져가고 있는 어떤 풍경이 서늘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작가 소개
엄의현
시인 엄의현은 1959년 영월 새터에서 태어나 하송리 은행나무 아래서 자랐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행정학과를 졸업(행정학 박사)하고 행정대학원 객원교수로 오랫동안 출강했다. 2017년 칼럼 및 수필집 『엄의현의 세상여행과 생각』 발간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고향으로 귀향하여 영월 동강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2020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창작준비금 지원사업의 수혜로 시집 『연어는 왜 돌아오는가』 출간으로 시인이 되었다. 영월문화원 회원, 영월향교 장의掌議로 활동하며, 세경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포토에세이 『덕안당 사람들』, 시화집 『엄의현의 도보여행_새터에서 하송리까지』, 공저 『동강에 뜨는 별』, 『노루목에 부는 바람』, 저서 『지방정부 노인복지』 등이 있다.
목 차
시인의 말
1부
봄 부추|발산鉢山|무서리가 내렸다|동사|연당리 672|대관령 아흔아홉 구비|오월의 하숙집|대성전 뜰에 서다|강 그리고 길|양재역 8번 출구|마음에도 길이 있다|숨구멍|목련이 지다|길을 잃은 적은 없었다|친구를 위한 조사弔辭|말 속에 혼이 깃든다|관수재觀水齊|춘春
2부
개인의 삶은 역사|발꿈치를 한껏 들었다|밥그릇의 무게|각한치를 넘는다|관음보살의 미소|욕망의 크기|본능의 향기|손두부|서강西江|영월 요리 골목에서|1인 시위|필수 노동자|폭우에 방이 잠겼다|콩 심은 데 콩 나는가|1029|故 이지한|난쏘공|유년의 추억|사람 꽃
3부
태백산 유일사를 지나며|살아 있다는 것과 죽어가는 것|전보를 쳤다|살아간다는 것은|뒤태|단테 알리기에리|땅속을 돌고 있다|아름다운 소풍|평생 삿갓을 썼다|주민등록 초본|가보지 못한 곳의 호기심|음과 양|팔월의 바다|월담 작은도서관 앞에서|미련은 연민이다|복숭아 몇 알|새들에게 묻는다|덕안당 멧비둘기|새우젓
4부
누구와 밥을 먹는가|십문칠|인연人然 인문학당|오토바이|카톡|글마루 손님|빈터가 쉼터|낮술|경자년庚子年 겨울|시|시집|삼만 원에 팔았다|시적인 사람|미스 미얀마 한 레이Han Lay|시집을 읽다|아들의 메일 1|아들의 메일 2|아들의 메일 3|청록다방|평화가 밥이다|관풍헌觀風軒
해설 _ 물의 흐름을 쓰다 ㆍ 오민석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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